대산문화재단 웹진

이 책은 작중인물의 내면의 삶을 그려내는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는 소설가 이승우씨의 대표적인 장편소설 『생의 이면』을 고광단․장-노엘 주테(Jean-Noël Juttet)가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의 줄마출판사에서 2000년 봄에 간행한 것이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작가가 등장한다. 한 명은 ‘나’라는 화자로, 다른 한 명은 그의 글쓰기의 대상인 ‘박부길’이라는 이름의 소설가로 설정되어 있다.어느날 한 출판사에서 화자에게 그와는 친분이 없는 소설가 박부길이 살아온 삶의 이력을 그의 소설과 관련지어 추적하고 집중조명해서 <작가탐구> 시리즈에 들어갈 한 권의 책으로 묶을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해온다. 화자는 박부길과의 두 번의 인터뷰와 그의 소설, 자전적인 작품, 연보, 그에 대한 신문기사 등을 “섭렵해가면서 우선 그의 유년기를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승우는 그의 소설 속의 작가이며 화자인 ‘나’가 취재한 사실과, 그가 작업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실마리들을 제공해 줄 박부길의 작품들에서 발췌한 단편을 교묘하게 배치해가면서 치밀하게 소설을 구성해나간다.

어린 시절에 박부길은 몰락한 시골 명문가의 어른인 엄한 큰아버지 밑에서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다. 주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발에 차꼬를 찬 채 뒤채의 골방에서 갇혀 살고 있는 남자는 누구일까? 무극사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아버지를 찾으러 가다가 읍내에서 친척 어른의 눈에 띄어 되돌아온 날 큰아버지는 왜 그에게 심한 체벌을 가하고 내쫓았으며 뒤란에는 못 가도록 금지했을까? 어머니는 왜 갑자기 사라졌나? “삶은, 그에게 혼란이었다. 해독불가였다.” 뒤채에 갇혀 살던 정신질환자, 사실은 그의 아버지의 매장 때 사람들이 그를 보는 시선에서 느낀 소외감을 통해서 “세상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가 아닌 모든 사람의 편이었다”는 생각을 평생 지니게 된다. 이러한 고향마을로부터 탈주하는 의식으로 아버지의 무덤에 불을 지르고 고향을 영영 떠난 그는 유랑과 빈궁의 생활 끝에 어머니를 다시 만나 그 도움으로 서울로 옮겨 학교에 다시 입학한다. 독서에 몰두하는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날 피아노 소리에 끌려 찾아들어간 교회에서 젊은 여자 피아니스트를 본다. 그 후 거듭된 만남 끝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그는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녀를 통해 신에게 이르고자 할 만큼 절대적인 사랑을 바쳤건만 그의 지나친 격정이 화근이 되어 그녀는 냉담해진다.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신학교를 퇴교한 그에게는 갈 곳이 없다.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다. 머리에 떠오른 곳이 고등학교 시절의 하숙방. 그곳에 틀어박혀 그는 충동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결국 그가 돌아간 곳은 문학이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박부길의 지적인 형성과정, 사고의 발달과정 그리고 정서적으로 메말랐던 그에게 사랑이 싹트고 자라나는 과정을 훌륭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박부길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이 남쪽 끝이고 소설을 쓴다는 점에서 작가 이승우를 연상케 한다. 화자는 “작가가 창조해낸 가짜의 인물, 가짜의 역사를 통해 비밀스러운 기쁨을 가지고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앙드레 지드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번역은 적확한 역어의 선택과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의 내용과 맛을 훌륭히 살려내고 있으며 특히 내면묘사 부분에서는 자유간접화법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지문과 작중인물의 생각을 구별하면서 매끄럽게 문장이 이어져나가게 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제 1회 대상문학상 수상작인 『생의 이면』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출간되자마자 프랑스의 『르 몽드』를 비롯한 여덟개의 일간․주간․월간지와 라디오 방송이 톱기사 내지 특집기사로 보도하고 스위스의 유력일간지 『르 탕』도 문화면 한 면을 거의 할애하여 대서특필하는 등 유럽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이 보편성을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