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2억 5천만 년 전의 생명체라던가, 소금 결정체 속에 가사상태로 죽어 있던 미생물을 미국 과학자들이 되살렸단다. 그 생물은, 그러니까 2억 5천만 년의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아직도 그 미생물은 살아 있을까. 무얼 먹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2억 5천만 년의 잠에서 깨어난 그 미생물은 무얼 보고 무얼 느끼며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회생한 지 수초 뒤에 외롭고 쓸쓸하게, 진짜로 죽어갔을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은 영원할지도 모를 그의 꿈과 생존을 앗아간 건지도 모른다.

개미와 바퀴벌레와 전갈과 지네가 살아 있는 것은, 살기 위한 지난한 투쟁의 결과일 것이다. 잠을 자고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왕성한 번식과 섭취, 다른 개체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과 방어, 그로 인한 끝없는 진화의 결과일 것이다. 당초의 개미며 바퀴벌레며 전갈 따위는 지금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수천만 년 혹은 수백만 년이 흐르는 동안 이 우주에서 완전히 소멸한 생명체들도 많을 것이다.

어찌 생명체만 그렇겠는가. 문화도 그렇고 체제도 그렇고 언어도 그렇고 의식도 그렇지 않겠는가. 변화를 거듭하다 혹은 아주 죽거나 죽어가고 있고, 혹은 살거나 여전히 살아갈 것이다.

소설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길게 잡아봤자 소설의 역사는 겨우 5～6백년이다. 그래도 당초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듯이 앞으로도 계속 달라질 것이다. 수세기 전의 소설을 보면서 이것을 과연 소설이랄 수 있는 걸까 의심하듯이, 미래의 소설도 그것이 과연 소설이라 수 있는 걸까 의심 받을 것이다. 여전히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질 것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자책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은 어쩌면 소설 혹은 문자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그건 종이의 운명에 관한 문제일 듯 싶다. 1천8백여년 동안 거의 유일하게 언어의 기록과 전달 수단으로 쓰여지던 종이가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면 그건 분명 종이쪽 사정인 것이다.

문자가, 혹은 소설이 여전히 종이 위에 기록될 때에도 문학은 나름대로의 변화를 겪었다. 그것이 이제 전기적 기호를 차용한다 해서 ‘아’가 ‘어’로 바뀌지는 않는다. 바뀌더라도 그것은 문자 혹은 소설의 내부적 문제이지 그것을 싣는 수단의 문제는 아니다. 붓으로 쓰던 글이 만년필로 쓴다고 해서 그 본질적 측면이 달라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 문자와 소설은 그 숙주(宿主)를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놓여 있을 뿐이다. 돌과 흙, 거북이 등껍데기와 대나무판, 그리고 갈대와 종이를 숙주로 삼았던 글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자석가루의 세계로 터전을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과연 전자책이라는 게 성공할 것이냐는 논란은 이미 정보의 대량저장과 복제, 그것을 편리하고 빠르게 검색하고 전송하는 이기(利器) 앞에 무색해지고 말았다. 즉 작가나 소설이 전자책을 받아들이는 것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전혀 새로운 환경의 숙주 안에서 그 동안 누렸던 생명력을 얼마큼이나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만이 고민거리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생명력이라는 것을 새로운 환경 이전의 숙주에게서 체득되고 유용했던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유지하려 한다면 자멸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종이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들에겐 치명적인 타격이 될 터인데, 야속한 말이지만 그건 사실 소설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새로운 전자책 환경은 어쩌면 소설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급격하게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과거의 시각으로 보면 머잖은 미래엔 소설 같은 건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미래 공상과학 영화를 봐도 소설 읽는 인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주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변하거나 아주 죽어 버린대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은 계속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 소설을 써 먹고 사는 작가들이나, 그것을 팔아야 하는 출판사들에게나 절박한 일일 것이다.

제 모습을 2억5천만년 동안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잠을 깨는 순간 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 잠은 생존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개미나 바퀴벌레나 전갈이나 지네처럼 작가도 소설도 생존을 위해 어떻게든 부단히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살거나 좋은 날도 있을 것이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는 시절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