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최윤_본명 최현무. 소설가, 서강대 불문과 교수. 1953년생. 소설 『겨울, 아틀란티스』 『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 『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등
다문화세계 속에서 경계를 넘어 글쓰기. ‘시인과 시쓰기’. ‘소설가와 소설쓰기’.
이번 포럼에서 제안된 주제들 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의 세계관이나 문학관과 직결되어 있는 가장 광범하고 추상적일수 있는 주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였다고 생각된다.
프랑스의 시인 자크 루보는 말한다. 가짜 기억과 이미지로 가득찬, 개조된 두뇌의 시대에 시인이 할 일은 모든 나라, 모든 상황에서 언어와 시의 살아있는 기억을 유지하는 일이다. 한국 시인 정현종은 말한다. 시쓰기란, 물질적․경제적 생산성에 중독되어 맹목적으로 굴러가는 세상을 거슬러 몽상해야 하며, 바로 이 꿈의 생산성을 높이고자하는 활동이라고.
또 다른 한국의 시인 황동규는, 모든 경계가 무너지는 때, 동양과 서양의 틈새에서, 또 거듭남을 통해서 생성된, ‘다름’의 아름다움을 실현하는 시쓰기의 여정에 대해 말한다.
장장 네시간에 걸쳐 시종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진행된 작가와 글쓰기(시)의 세션에서 발제한 시인들의 글과 녹음된 영상테이프(직접 참가하지 못하고 참관기를 쓰는 것을 용서하시길…)를 읽고, 보고 난 후에 오랫동안 뇌리에 남은 전언들이다.
프랑스와 한국 양쪽에서 고유한 시적 경지에 다다른 대표적 시인들의 글, 그리고 그 중의 몇몇 시들을 적절한 맥락속에서 육성으로 다시 들어보는 경험이 준 파장이 남달랐던 것은, 각 시인의 시적 여정이 달라도, 시짓는 방법과 내용과 언어가 달라도 궁극적으로 그들이 우려하는, 시를 둘러싼 지금의 세상에 대한 진단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주체(혹은 인간이나 생명), 언어, 기억, 차이의 점차적인 소멸… 그 용어는 시인들마다 다르게 사용되었지만 시를 둘러싼 근본적인 절대 조건들의 사라짐의 징후에 대한 예각화된 인식은 그 소멸이나 거부의 징후들에 대응하는 각 시인의 시론 속에 다양하게 감지되었다. 파괴적인 경계를 경계하되, 이미 인위적인 구별의 경계를 훌쩍 넘은 어느 지점에서, 기억과 생명과 차이의 시학을 펼치는 세 시인의 어조가 우려이건 예찬이건 고통스런 거듭남이건 중요한 것은 이들 세 시인에게 시는 생생하고 도통한듯 명쾌하게 살아있다는 확인이다.
‘소설가와 소설쓰기’의 경우 문제가 좀더 구체적이며 서술적으로 전개될 수 있고 또 논쟁적일 수 있었던 것은 발제를 한 두 분의 소설가, 서인도제도에 위치한 마르티니크에서 활동하는 프랑스어권의 소설가 라파엘 콩피앙, 한국의 소설가 서정인의 독특한 위상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정반대되는 방법으로 두 작가는 언어의 경계(국가적, 지역적, 계층적, 장르적 경계)에 대한 문제를 꾸준히 천착해왔기 때문이다.
라파엘 콩피앙은 과거 유럽 식민지역의 작가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인 지배언어(프랑스어)와 피지배언어(크레올어)의 언어병용의 경험을 통해 단일화, 획일화되는 서구일변도의 세계화에 저항할수 있는 대안의 한 방안으로 다언어적 정체성, 문화혼용을 제시한다.
서정인은 환경과 인간이 파괴되는 도도한 미국 주도의 세계적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대한 우려를,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색과 박식한 실례를 동원해 표현하면서, 이러한 인위적인 장벽을 허무는 글쓰기를 제안한다.
사실 라파엘 콩피앙이나 월레 소잉카처럼 이중 언어의 병용을 경험한 특수한 상황의 작가들의 참여 자체가, 단일언어나 언어의 순수주의에 가까이 있는 우리의 맥락에서 생소한 경계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점만으로도 자극적이었을 수도 있다. 역사적인 정황의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생소함은 늘 기존의 경계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런 반응처럼 보이는 토론자편의 격렬한 토론도 있었다.
언어 병용(크레올어와 프랑스어)과 언어의 고유성(한국어)이라는 두 작가의 대조적으로 보이는 경험과 추구가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시인들에게 그랬듯이, 소설가들에게도 궁극적으로는 획일적이며 파괴적으로 인식되는 현재의 세계화적인 현실에 대한 위기인식인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번 포럼의 여러 세션에서, 비록 강도와 촛점은 달라도 여일하게 감지된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더 깊고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접근되어야할 숙제를 부과받은 것은 의미심장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