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최원식_평론가, 인하대 국문과 교수, 창작과비평 주간. 1949년생. 평론집 『민족문학의 논리』 『한 국의 민족문학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등
1.
달포전 이런 기사가 났다. “깡패국가의 괴수 김정일의 대남 적화공작의 총책이자 하수인인 김용순”을 “체포․고발하라”(조선일보 9월 16일).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가 김용순 비서의 방문을 두고 발표한 성명의 일절이다. 예전같으면 유월에 서리 내릴 등골 서늘한 발언이지만, 요즘은 ‘아, 아직도 이런 분이 있군’ 하고 약간의 감탄과 더불어 지나쳐도 될 만큼 세상이 변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급류를 탔다. 예전이라면 세상을 놀랠 큰 뉴스들이 거의 매일 보도된다. 이제 북한 관련 보도들이 남한의 일상으로 깊숙이 자리잡은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국제적 주목도 일층 강화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그 단적인 예의 하나다. 한반도 주변 4강의 태도도 달라졌다. 남북관계의 진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 중국은 계속적 후원을 다짐하고,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그 소외를 불평하고, 일말의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던 미국과 일본의 자세도 전향적으로 재조정되는 중이다. 특히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 소식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한반도 통일에 결정적 열쇠의 하나를 쥔 미국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마침내 20세기의 출구 또는 21세기의 입구에서 분단시대로부터 통일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탈냉전시대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좀체 해체의 기미를 보이지 않던 분단체제가 마침내 근본에서 요동하고 있는 것이다. 홍콩과 마카오의 반환이 20세기를 마감하는 빅쇼라면, 한반도의 통일과정은 21세기를 여는 세기의 드라마가 될 공산이 커졌다.
우리는 여기서 ‘통일’의 의미를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통일’은 극적으로 이루어진 일회성 사건을 주로 지칭해 왔다. 예컨대 북베트남에 의한 남베트남 무력통일 또는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통일은 대표적인 것이다. 무력이든 자본이든 어느 한쪽의 우세에 의해 다른 한쪽이 붕괴되는 것을 계기로 ‘통일’은 성취되었다. 그런데 ‘6․15 남북선언’은 그 동안 남북 양 정부가 각기 추진해 왔던 북의 ‘남조선해방’ 또는 남의 ‘북진통일’의 폐기를 공식으로 확인하였다. 다시 말하면 남북은 극적인 통일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통일에 합의한 것이다. 적대적인 남과 북이 서로 그 실체를 인정하고 기초적인 국가연합(confederation)의 형태인 남북연합을 일차로 지향하면서 중장기적 평화통일을 함께 일궈나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통일’이 재정의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드디어 한반도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세계사적 실험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출발선 위에 겨우 서있을 따름이다. ‘6․15 선언’은 두 정상의 합의라는 지극히 취약한 인적(人的) 요소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수준의 인적 결합, 특히 민중적 참여의 회로를 구축하는 체계들을 만들어내고 그 기초 위에 인적 요소를 넘는 건국의 비전을 합의해 나가는 첩첩산중의 작업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어쩌면 지루할지도 모를 그 과정을 제대로 겪어내기 위해서 우리 국민 하나하나의 인내와 용기와 상상력의 총화가 결집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2.
남북정상회담을 수행해 평양에 간 고은(高銀)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고문은 6월 14일 개최된 사회분야 간담회에서 남북작가회담을 북측에 공식 제기하였다(한겨레 6월 15일). 아다시피, 1989년 남북작가회담이 이루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 작가회의의 제안을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이 받아들여 성사를 눈앞에 두었던 이 역사적인 회담은 노태우 정권의 탄압으로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은 시인은 바로 이 당시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장으로서 몸소 옥고까지 치뤘던 터다. 이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그 사이 남북작가들의 공식적 만남은 철저히 봉쇄되었다.
이 봉쇄 속에서 비공식적 접촉의 혈로를 뚫는 문인들의 고투가 비롯되었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던진 문인들의 방북사건이 그것이다. 특히 1989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소설가 황석영(黃晳瑛) 사건은 단연 충격적이었다. 남한의 대표적인 작가가 국가보안법을 횡단하여 방북(월북이 아니라), 북의 문인들과 문학적 또는 인간적 친교를 맺고 돌아와 긴 영어(囹圄)생활을 겪어야 했던 이 사건은 1989년에 무산된 남북작가회담의 별동적(別動的) 성격을 가진다.
1989년에 병발한 두 사건에 비추어 볼 때, 남북 문학교류에 있어 제일 먼저 성취되어야 할 점은 봉쇄된 공식성을 공식화하는 일이다. 통일시대의 남북 문학교류는 개별적 또는 비공식적 만남을 넘어서 남과 북의 작가들이 공식적으로 만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작가회담의 개최를 촉구한 작가회의 5월 성명에 기초하여 고은 시인이 평양에서 남북작가회담을 재제안한 것은 뜻깊다.
6․15 이후 남북교류의 속도를 감안할 때 남북작가회담도 조만간 개최될 것이다. 남북문학교류의 첫 단초가 될 작가회담을 어떻게 준비할까, 이것이 초미(焦眉)의 과제다. 먼저 해방(=분단) 이후 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남북문학에 대한 상호무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다. 교류는 상호이해의 확산 속에서만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남측 문인들의 북한문학 이해와 북측 문인들의 남한문학 이해는 필수적이다. 매우 끈질긴 인내로 다름 속에서 같음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두 문학의 다름을 같음으로 변용하려는 조급증에 지펴서는 곤란하다. 다시 말하면 남의 동일성을 북으로 일방 확대하거나 북의 동일성을 남으로 강제 복제하려는 동일성의 충동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가 살아갈 통일시대는 남과 북의 다름을 존중하는 긴 대화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다른 것이고 다른 것이 같은 것”(同卽異 異卽同)이라는 원효(元曉)의 화쟁(和諍)정신으로 남과 북의 다름을 다름으로 존중하면서 같음을 추구하는 도덕적 열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묘한 변용을 기대해도 좋다. 상호이해가 깊어지면서 각 문학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 가능할 것이다. 상호이해와 호상비판의 미묘한 상승과정 속에서 남북작가들은 길들여진 반국(半國)의식의 불구성에서 벗어나 각기 남과 북의 국민 또는 인민으로서의 삶에 충실하면서도 서로의 반쪽을 진심으로 고려하는 일국(一國)의식으로 나아갈 터이다.
이 단계에서, 아니 이와 함께 통일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문학을 건설하는 핵심적 공동작업이 발진해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의 창작현실을 각기 충분히 고려하면서 두 문학을 아우를 새로운 이론의 구축을 목표로 삼는 이 작업은 매우 논쟁적이다. 예컨대 북의 주체문학론과 민족문학론을 비롯한 남의 다양한 문학론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회통(會通)을 모색하는 이 지난한 비평적 작업은 두 문학의 반국성(半國性)을 폭로하는 한편, 그를 넘어설 종요로운 종자를 발견, 북돋음으로써 역으로 두 문학의 창조적 해체를 촉진할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창작의 역할 또한 막중하다. 이론의 구축을 추동하며, 그 구축을 넘어섬으로써 새 이론의 태동을 촉진하는 새로운 창작경험들이 축적되는 긴 과정 속에서 마침내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을 하나의 독자층으로 묶어낼 수 있는 기념비적 문학작품들이 출현할 때, 통일시대는 문득 남북 민중의 실감으로 현실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문학은 괴테의 출현, 푸쉬킨의 등장을 고대하고 있다. 분단이라는 열악한 조건을 오히려 풍요로운 먹이로 위대한 시대의 표징을 생산하는 새 문학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