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해외소개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가장 많은 작품이 번역, 소개되었고 또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 미국이지만, 한국문학이 가장 발을 붙이기 힘든 곳 역시 미국이라는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미국인들이 프랑스나 독일 같은 유럽 사람들에 비해 군소문화권에 쏟는 관심이 인색하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 중의 하나임은 분명해 보인다. 즉 다양한 문화적 흐름들이 존재하기에는 미국 문화의 토양이 그리 비옥하지 못하다는 뜻인데, 이 때문인지 미국에서 활동했거나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작가들의 활약상은 전체 한국인들의 미국 진출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었다. 그 두터운 아메리카니즘의 벽을 뚫고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킨 몇 안되는 작가 중의 한명이 『순교자 The Martyrd』의 김은국(金恩國, 미국명 리처드 김)이다.
1928년 유일한의 『내가 한국에서 소년이었을 때』로 고고성을 울린 재미 한국인 작가들의 활동은 『초당』과 『서유기』를 쓴 강용흘에 의해 본격화되었고 김은국을 거쳐 90년대 들어 『네이티브 스피커』의 이창래와 수잔 최, 차학경, 김난영, 강견실 등에 의해 도약의 계기를 맞고 있다. 1세대 작가인 강용흘이 그의 조선에서의 유년기를 회고조의 시선으로 그려낸 자전적 소설들을 썼고 3세대인 이창래 등이 민족과 언어의 굴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작품들을 발표했다면,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은국의 소설세계는 그 둘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김은국은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하면서도 그 바탕에 깔린 종교나 도덕 같은 보편적 가치들을 탐구하는 장편소설들을 발표해 미국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김은국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1964년에 처녀작 『순교자』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원래 『순교자』는 아이오와대학 석사학위 작품으로 씌어진 것이다(논문이 아닌 소설로 학위를 받는다는 것이 우리 현실에선 생소하지만 미국에서는 일반화된 일이라 한다). 그는 이 소설에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 실존의 문제와 신을 향한 절대적 구원의 메시지를 정면에서 다뤄 일약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특집으로 다루기까지 한 이 소설은 12개 언어로 번역돼 2백여판이 나올 정도로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소설은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서 14명의 목사들이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들 14명의 목사 중 12명이 인민군에게 살해되고 1명은 충격으로 정신이상자가 되고 나머지 1명(신 목사)만이 살아돌아오는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순교한 12명의 목사를 애도하고 멀쩡하게 살아남은 신 목사에게 비난을 퍼붓지만 사실은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당당하게 공산당원들에게 대항한 반면 나머지 죽은 목사들은 고문에 못이겨 배교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신 목사는 사람들의 비난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 아니라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가지 않고 평양에 남았다가 그마저도 실종되고 만다는 것이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순교자』는 당대의 베스트셀러답게 영화와 오페라로도 만들어져 많은 인기를 끌었다. 거장 유현목 감독이 65년에 만든 영화는 남궁원, 김진규 등 최고의 인기배우들과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대한 스케일로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대종상 4개 부문을 휩쓸 만큼 작품성에서도 크게 인정받았다. 한국에서 살다 한국의 외국인 묘지에 묻힌 미국인 작곡가 제임스 웨이드가 작곡한 오페라 「순교자」 역시 현대적 감각을 잘 살린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순교자』가 6․25 동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면 그의 또다른 대표작 『잃어버린 이름 Lost Name』과 『심판자 The Innocent』는 각각 일제하 창씨개명과 군사정변을 다룬 소설들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잃어버린 이름』, 『순교자』, 『심판자』로 이어지는 그의 소설세계가 곧 한국 현대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대학에서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전공한 그의 이력과도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듯싶다. 실제로 그는 한 강연에서 그런 이유로 언제나 ‘역사’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고 밝힌 바 있다.
1932년 함흥에서 태어난 김은국은 뛰어난 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된 목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광장』의 최인훈이 그와 구 목포중 5회 동창이고 『만선』의 작가 천승세가 1년 후배다. 서울 상대 재학 중 6․25에 참전한 뒤 제대 후 도미해서 미들버리대학과 존스홉킨스대, 아이오와대에서 수학했다. 메사추세츠대 영문학 교수, 서울대 교환교수 등을 역임한 그는 작년 대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열린 ‘한국전 - 한국과 미국과의 대화’에 패널로 참석하는 등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