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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후기_ 말라르메의 시집을 번역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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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르메의 󰡔시집󰡕을 번역하며

 

황 현 산

 

 

지난 1998년은 말라르메(Mallarmé)의 100 주기(週忌)가 되는 해였다. 프랑스에서는, 시의 역사상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을 통해 문학 언어에 극히 특별한 위의를 부여했던 이 대가를 기리기 위해 많은 사업을 벌였고, 그 결실이 또한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6백 페이지가 넘는 말라르메의 전기가 스타인메츠의 저작으로 출간되었고, 플레이야드판 말라르메 전집의 신판을 기획한 갈리마르 출판사는 마르샬에게 편집을 위촉하여 그 첫째권을 발행했다. 당시 나는 대학원에서 말라르메의 󰡔시집Poésies󰡕을 강독하고, 시전문지 󰡔현대시󰡕에 <말라르메 강의>를 연재하면서, 그의 전집은 아니더라고 그의 󰡔시집󰡕만이라도 번역해야 옳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던 중에,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내게는 재난일 수도 있는 그 생각을 결심으로 굳히게 되었다. 이것이 번역의 어려움과 말라르메의 난해성이라고 하는 두 골짜기 사이에 내가 내몰리게 된 내력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이 거의 “불가능한 임무”의 한 고비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독자들과 함께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문학 번역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공시적으로 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도 다의성을 지닌 텍스트를 대상으로 한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한 작품에 대해 일정한 시대를 기준으로 객관적 가치를 지닌 해석들의 전체가 번역의 편에서 문제로 삼을 수 있는 공시적 다의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친다면, 그것을 그 작품에 대한 의미 정보의 총량으로 여길 수 있으며, 역자의 역량에 따라 이를 다시 역문에서 재현해 내는 일이 반드시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통시적 다의성에는 지적 상태‧사회적 상황의 변화 등에 따른 다양한 해석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 텍스트에 대한 미래적 해석가능성도 포함된다. 그런데 모든 원문은 처음부터 자기 언어 속에서 그 자체로서 성숙하여 지속적으로 의미를 발생시키고 있지만, 그 발생된 의미를 일정 시점에서 수렴하는 역문이 원문과 동일한 미래적 해석가능성을 획득하기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며, 문학 번역의 숙명적 한계가 또한 여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말 같지만, 문학 텍스트의 번역불가능성이 그에 대한 번역의 필요성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다. 한 텍스트를 완전하게 번역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바로 그 지속적 생명성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번역 작업은 원문의 이 지속적‧미래적 성숙성을 다른 언어 풍토에 그대로 옮겨 놓기에 성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생명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될 수는 있다. 외국문학 작품을 소개하려 할 때, 그에 대한 어떤 종류의 해설과 요약은 일정한 정보의 전달에 성공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번안>은 원문의 자기 성숙성을 그와는 벌써 무관한 역문의 그것으로 대체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는 반면, 번역은 그 양면에서 실패를 감수해야 하지만, 이 실패를 통해 원문의 지속적 생명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는다.

또 한편으로, 난해성을 주축으로 삼는 말라르메의 시창작 방법과 태도는 늘상 번역자의 기를 꺾기 마련이지만, 그 자체로서 번역의 한 지침이 되기도 한다.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시인의 임무를 “종족의 언어에 더욱 순수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라고 규정한 적이 있다. 종족의 언어를 그 방언성에서 해방시켜 보편언어적 성격을 되찾게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이 말은 “외국어 속에 마법으로 묶여 있는 저 순수언어를 자기 언어를 통해 풀어내고,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저 순수언어를 작품의 재창조를 통해 해방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번역가의 과제”라는 벤야민의 말과 대응한다. 말라르메가 시인의 임무를 규정하면서 동시에 번역가의 임무를 규정하였다면, 벤야민은 번역자의 임무를 말하면서 시인의 임무를 말한 셈이다.

다음은 “항해하려는 유일한 열망에/Au seul souci de voyager...”로 시작하는 제목 없는 원문과 나의 번역, 그리고 이 번역에 붙이게 될 해설이다.

 

Au seul souci de voyager

Outre une Inde splendide et trouble

  Ce salut va, le messager

Du temps, cap que ta poupe double

 

Comme sur quelque vergue bas

Plongeante avec la caravelle

Écumait toujours en ébats

Un oiseau d'ivresse nouvelle

 

Qui criait monotonement

Sans que la barre ne varie

Un inutile gisement

Nuit, désespoir et pierrerie

 

Par son chant reflété jusqu'au

Sourire du pâle Vasco.

 

어느 찬란하고 흐린 인도 저 너머로

항해하려는 유일한 열망에

― 이 인사는 마중 나가니, 그대의 船尾가

벗어나는 岬, 이 시대의 전령사라

 

이처럼,쾌속범선과 함께 낮게

키질하는 어느 활대 위에서

한 마리 새로운 도취의 새도

항상 그렇듯 파닥임으로 거품 일우며

 

키잡는 손이야 변함없어도

마냥 지루하게 외쳐대곤 하였지

쓸모없는 땅의 정보를

밤이며 절망이며 보석인

 

그것 새의 노래에 의해

창백한 바스코의 미소에까지 반사되고.

 

 

[해설] 이 제목 없는 소네트는 바스코 다 가마의 향해 400주년 <기념 앨범 Album commémoratif> 편집자들의 청탁에 따라 씌어져, 1898년 4월, 리스본과 파리에서 동시에 발간된 이 <앨범>에 발표되었다. 그로부터 다섯 달 후인 9월에 말라르메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 소네트는 비록 청탁에 의한 작품이지만 말라르메가 완성한 마지막 시로서 더욱 감동적인 힘을 누리게 되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위업을 기리는 이 시에서 말라르메가 포르투갈의 저 유명한 모험가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도를 자기 항해의 목적지로 삼았던 바스코에게 그 “너머로 항해하려는 열망”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기록은 도리어 그 반대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말라르메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는 바스코의 의지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는 후세의 모든 정신적 행해자들에게 유전되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말라르메는 이 시 뿐만 아니라 「인사」에서, 「바다의 미풍」에서, 그리고 필생의 역작인 「한 번의 주사위 던짐...」에서, 자신을 늘 항해사에 비유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이며 항행이다.

이 시는 그 4연, 14행 전체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제1연은 주절이며 나머지 3연은 비교를 나타내는 종속절에 해당한다. 말라르메는 자신의 “인사”, 곧 자신이 쓰고 있는 이 시가 “인도를 넘어서” 더 멀리 항해하려는 바스코의 “열망”을 맞이하려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바스코가 탄 배의 “선미”는 그 항해로부터 4세기가 지난 지금 또 하나의 희망봉인 “이 시대”를 벗어나 미래의 시간을 향해 달리고 있다. 따라서 말라르메의 이 기념시는 바스코의 시간 항해에 파견한 “전령사”로서 옛날 바스코의 배에게 인도에의 접근을 알렸던 “한 마리 새로운 도취의 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바스코에게 이 새가 전달해주는 육지의 정보는 “쓸모 없는” 것이다. 그는 인도보다 더 먼 곳으로 항해하기를 열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400년 전에 새가 도취하여 전하는 소식에 키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라르메가 바치는 시대의 인사에 대해서도 창백한 미소로 답할 뿐이리라. 그러나 이 시간의 항해자는 또한 말라르메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제1연 : 시인은 자신의 “인사”가 바스코의 “향해하려는 열망”을 마중 나가, 자기 시대의 기별을 전하는 “전령사”이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시간/temps”은 “岬/cap”과 동격어. 옛날 희망봉을 넘어섰던 이 항해사의 고물은 지금 세월의 망각을 이겨내고 ‘이 시대’라고 하는 또 하나의 갑을 벗어나고 있다. 이점에서 바스코가 넘어서려고 열망하는 “어느 인도/une Inde”는 ‘이 시대’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시대는 그가 옛날에 도달했던 인도처럼 “찬란”하지만 그가 지향하는 세계의 완전함에 비하면 흐릴 뿐이다. 바스코의 이 열망은 선도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고독한/seul” 열망이며, 다른 세속적 관심이 거기 결부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유일한/seul”한 열망이다.

제2연은 비교의 종속절을 나타내는 “이처럼/comme”으로 시작한다. 이 시대에 시인의 “인사”가 바스코의 열망을 맞이하듯이 4백년 전에는 “한 마리 새로운 도취의 새/Un oiseau d'ivresse nouvelle”가 그의 배를 마중나가 인도 대륙이 멀지 않았음을 알렸다. “쾌속범선”은 새가 그 활대 위에서 날고 있는 순간 높은 파도에 들렸다가 그 경사면을 따라 쳐박히듯 낮은 골짜기로 내려가고 있다. 이 두 줄의 묘사는 극히 간결하지만 항해의 험난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새는 매우 날렵하고 부산스럽게 날개를 파닥여 그 몸 전체가 “거품”처럼 보인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toujours”라는 표현은 바스코가 이 들떠 있는, 또는 선원들을 들뜨게 만드는 새의 소식을 별로 새롭거나 대수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한다. 이런 새는 늘 배를 찾아왔으며 그때마다 항해자들을 새롭게 도취시키고 새로운 유혹으로 “어느 찬란하고 흐린 인도 저 너머로” 나아가려는 열망을 흔들곤 했던 것이다.

제3연 이하는 원문에서 “한 마리 새로운 도취의 새”를 주격 선행사로 삼는 관계절이다. 새는 “마냥 지루하게/monotonement” 육지의 소식을 외쳐댔지만, 인도 대륙으로 뱃머리를 돌리지 않는, “키의 손잡이/barre”에 변화를 주지 않고 또 하나의 세계를 행해 나가아는 바스코에게 그 정보는 “쓸모없는” 것이다. 역문에서 “땅의 정보”라고 옮긴 불어 “gisement”은 1) 해양용어로 배의 방위각, 해안의 위치 등을 뜻하지만, 2) 광산용어로 지하의 매장자원, 광맥, 광상 등을 뜻하며 3) 비유적으로 寶庫을 뜻한다. 말라르메는 이 낱말 속에, 1)를 겉뜻으로 2)를 속뜻으로 삼아, 두 의미를 겹쳐 놓고, 이를 다시 3)의 의미로 전환한다. “밤이며 절망이며 보석/Nuit, désespoir et pierrerie”이라는 세 개의 동격어가 각기 그 의미들과 관련된다. 육지는 거기에 뱃머리를 멈추지 않는 항해자의 고독감을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밤”의 시간이며, 거기 기항하는 자에게는 암초처럼 향해를 영원히 중단시킨다는 점에서 “절망”이지만, 별빛처럼 항해의 이정표가 된다는 점에서 “보석”이다.

마지막 연에서, 이 새의 기별이 바스코에게서 얻게 되는 것은 미소뿐이다. 그리고 이 미소 역시 두 가지 의미를 띠게 될 것이다. 하나는 바스코 자신의 원대한 희망에 대한 중간 이정표의 확인이며, 다른 하나는 이 작은 성취에 대한 무시이다. 자신이 써 놓은 시에 대한 말라르메의 태도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이 번역은 여러 가지 결함을 지니고 있다. 우선 원시의 낱말들에 대응하는 우리말 낱말들에 문제가 있다. 제1연에서 불어의 “cap”을 “岬”으로 번역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와 관련하여 “cap”을 말할 때, 그것은 곧 “희망봉/Cap de Bonne-Espérence”를 연상시키게 마련이지만, 우리말의 “岬”이나 “곶”이 같은 연상력을 지니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이 시의 환경에서 “희망봉”의 “봉”을 따로 떼어내어 쓰기는 더욱 어렵다. 제2연에서 불어의 “plonger” 동사를 “키질하다”로 옮겼는데, 배가 앞뒤로 까분다는 뜻의 이 역어는 불어 동사에 함의된 <물에 잠긴다>는 뜻까지를 감당하기 힘들다. 또한 “caravelle”을 옮긴 “쾌속범선”이 콜롬보스나 마젤란이 몰던 것과 같은 그런 중세의 서양 범선을 떠올리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제3연의 “monotonement”은 “단조롭게, 지루하게”의 뜻을 지닌말, 다시 말해서 <항상 똑같아서 결과적으로 지루하게>라는 뜻을 함의하는 말인데, 역어의 “지루하게”는 결과만을 표현할 뿐 과정을 나타내지 못한다. 또한 해설에서 말한 것처럼, 3가지 뜻을 아우르는 “gisement”에 응수하여, 어렵게 꾸려낸 “땅의 정보”라는 역어의 오지랖이 그만큼 넓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시 전체의 통사법에 있다. 해설에서 말한 것처럼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원문의 시에서, 주절인 제1연은 제2연 이하를 비교의 종속절로 거느리고 있으며, 이 종속절은 또 그 나름으로 제3연 이하를 관계절로 거느리고 있으며, 이 관계절이 또한 제4연을 수식어구로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원시에서는 14행 전체가 제1연의 “이 인사는... 항해하려는 유일한 열망을 마중나간다”는 주문장을 그 핵심에 모시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의 번역은 종속절도 관계절도 수식어구도 우리말로 원시 그대로 꾸려내지 못하고 그 전체를 중문으로 병렬 처리한 나머지 종속관계를 평면화하여 그 핵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해설을 통해 이 결함을 어느 정도 보충해 보려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번역은 번역이고 해설은 해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실패들을 앞에 놓고 말라르메 자신도 스스로의 시쓰기가 늘 실패에 이르고 말았다고 한탄하였던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는 시쓰기의 숙명적인 실패를 이렇게 고백하였다.

 

복수이며, 최상의 언어가 없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언어들 : 생각한다는 것은 부수적인 도구들도 속삭거림도 없이 쓴다는 것이기에, 그러나 불후의 언어가 아직도 침묵하고 있기에, 지상에서 慣用의 다양함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단 한 번의 발음에 의해 물질적으로 진리 그 자체로 될 낱말들을 아무도 말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시인은 “진리 그 자체로 될 낱말들”을 발음하려 하지만, 한 역사적 집단의 주관성에서도, 자기 시대의 주관성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언어의 慣用에 붙잡혀 있기에, 그 시도에 성공할 수 없다. 번역자 역시 그 나름대로 역사적‧시대적 주관성의 총체인 자기 모국어의 방언성에 방해를 받아, 한 언어체계에서 생성된 시를 다른 언어로 옮겨 놓는 일에 실패한다. 시인이 “화자로서의 시인의 소멸(la disparition élocutoire du poète)”을 기하여 “정신적인 우주가 스스로를 보고 스스로를 전개해 가게 하기 위한 하나의 대응능력”으로만 남으려는 노력은, 자기 언어의 모든 상투적 성격을 누르고 한 시에 대한 대응능력만을 남기려는 번역가의 작업에서 그 변형된 형식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단 말라르메의 시뿐만 아니라, 시대를 넘어서서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 모든 시들은 늘 그것이 기대고 있는 언어의 뿌리를 흔들어, 보편적 언어의 전망에서 일상적 의식의 전도를 시도한다. 하나의 언어가 다른 언어의 시를 드러내는 말이 되기 위해서도 그 언어에 내장된 보편적 표현력을 한계에 이르기까지 동원해야 한다. 이점에서 번역가의 일은 벌써 시인의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번역이 비록 한 편의 시를 흠집 없이 옮겨놓는 일에는 실패해도, 바로 그 흠집을 통해서 적어도 그 시의 언어 의식을 인상 깊게 체험하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구체화하려는 노력으로 보편적인 “시”의 길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에 모든 문학번역의 의의가 있다. 그래서 나는 한 세기의 “희망봉”을 벗어나는 말라르메의 배를 이 요령부득의 번역으로 마중나가며, 그가 외면하는 가운데서도 차거운 미소마저 인색하지는 않으리라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