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조혜영_번역가. 1957년생. 역서 『Le Vayage de Monsieur Lee』 『Los Angeles d'un Reveur』 등
『영원한 제국』은 나의 불어 번역 다섯 번째 작품이다. 첫 번역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가 1991년에 나왔으니까 9년 만이다. 프랑스 유학 초기, 스스로 용기를 주기 위해 번역하기 시작한 한 신학생의 일기가 묘하게도 잇따른 번역의 인연이 되었다. 그런데 이 첫 작품을 권위있는 파이야르(Fayard) 출판사에서 선뜻 받아줘서, 나는 프랑스에서 한국 문학 출판이 겪는 어려움은 후에 소설을 번역하면서 알게 됐다.
『영원한 제국』을 번역하게 된 동기는 많다. 중요한 세가지만 들면, 첫째로 이 소설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 소설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한국 관련 서적은 주로 번역 문학작품으로, 한국 역사 더구나 조선시대를 소개하는 역사서는 찾기 힘들다. 그리고 이들 문학서들의 대부분은 20세기 한민족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일제 식민에 대한 큰 치욕과 깊은 상처를 이곳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사(朝鮮史)와 당시 조선인의 삶도 소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영원한 제국』은 조선시대 유교사와 그 사상을 소설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는 아직 한국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을 한국 불교나 유가사상을 알리는 서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인의 깊은 정서에까지 공감하기 위해서는 한국 전통사상을 조금은 이해해야 한다. 특히 우리 현대문학의 주된 주제인 분단의 고통과 미국문화의 급격한 도래로 기존 질서가 파괴되면서 정신문화가 겪은 혼돈의 심도 측정이 가능하려면, 근 5세기 이상 한국인의 윤리관을 지배한 조선시대의 독특한 유가사상이 알려져 있어야 할 것이다. 중국, 일본과 달리 조선은 유교, 그것도 엄격한 주자학을 국가이념으로 채택, 전 백성의 유교화에 큰 역점을 두지 않았는가. 그런데 『영원한 제국』은 인물들간의 관계 즉 정조와 사도세자, 이인몽, 이인몽과 상아 그리고 유치명, 노론의 상하 구조 그리고 왕도(王道) 실현의 꿈을 통한 유교의 바탕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영원한 제국』에서 학문적 가치만을 발견했다면 소설 번역으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셋째 동기는 주지하는 바 이 소설은 또한 추리소설로서 흥미진진하고 극적으로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독자를 사로잡은 이 기법이 번역을 결심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동기들이 번역과 출판에 어려운 요소로 등장했다. 조선시대의 어휘 번역도 고역이었지만, 금등지사에 얽힌 복잡한 사건들을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영원한 제국』은 작가의 치밀하고 방대한 지식이 동원된 소설이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들어본 수많은 인명과 역사적 사건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철저한 정보들이 아무것도 환기시키는 것이 없는 프랑스인들에게는 줄거리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게 할 뿐이다. 초역은 소설에 충실하기 위해 전부를 번역했지만, 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작가가 덧붙인 설명 등은 생략하거나 요약해야 했다. 그리고 인물 색인을 만들어 소설에서는 암시만 되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의 정치적 학문적 역할과 학파 등을 명시하여 소설배경의 이해를 도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국 명칭, 유교 용어 등이 자주 언급되고 사설적 문체가 주를 이루는 이 소설의 번역을 완성하는데 중국사를 대학에서 가르치신 골펜 선생과 동경주재 AFP 통신 기자로 일본에 오래 거주하시고 서예가이며 단가 시인인 알레씨의 아시아 전통에 대한 지식과 감수성의 덕이 컸다.
조선시대 역사와 철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프랑스에서 『영원한 제국』의 번역은 모험이었다. 한 문학세계와의 만남은 먼저 공명(共鳴)을 통해 이루어지고, 깊은 교감은 앎을 필요로 한다. 이제, 프랑스에서의 한(韓) 문화의 위상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근현대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평가를 돕기 위해서, 우리의 오랜 역사와 사상도 문학작품 번역과 병행하여 반드시 소개 되어야만 할 것이다.
* * *
채 날이 밝지 않은 새벽. 잿빛의 몽롱한 여명이었다.
북한산을 차고 내려온 북풍은 와룡동 언덕배기에 부딪혀 으르릉거리며 칼날처럼 매섭게 휘몰아쳤다. 언덕배기를 따라 촘촘히 들어선 누각과 침전 사이, 새벽의 캄캄한 어둠 속으로 나뭇잎들이 쓸려갔다. 멀리 돈화문까지 흩어진 나뭇잎들은 서릿발이 끼쳐 은종이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여기는 창덕궁 후원에 있는 규장각 직원.
당년 스물 아홉 살의 규장각 대교 이인몽은 혼곤한 잠 속에서 누눈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뒤에서, 인몽의 시선이 닿지 않는 뒤에서, 바로 등뒤가 아니라 아주 머나먼 저편에서 들렸다. 시간의 먼지가 뿜어내는 불가사의한 어둠 뒤에서, 섬광처럼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가는 어떤 목소리가.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끄는 듯이 인몽은 그 목소리를 향해 돌아섰다.
인몽은 그 순간 번뜩 눈을 떴다. 눈을 뜬 인몽은 곧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책장에 오래된 책들이 빽빽이 들어찬,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역하게 풍기는 방이다. 인몽은 그대로 이불 속에 누워 천장의 희끄무레한 벽지를 쳐다본다. 꿈이었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 나리!
그때 인몽의 귀에 현실감을 가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리, 세숫물 대령했습니다요.
인몽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머리밭의 자리끼를 한 모금 들이켠다. 한밤내 윙윙거렸을 바람 소리가 그제서야 다시 문풍지를 울리며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 승헌인가?
- 예, 나리. 묘시전에 깨우라고 하셨기에......
인몽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방문을 연다.
찬 바람이 왈칵 들어오면서 인몽의 얼굴과 목에 가루 같은 서리가 날아들었다. 밖에는 규장각 이속인 현승헌이 툇마루 위에 세숫불과 무명수건, 작은 한지에 싼 백분을 올려놓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밖은 아직 캄캄한 새벽이었다. (『영원한 제국』 pp.
C'est l'aube, le jour ne s'est pas encore levé ; à peine une lueur couleur de cendre.
Tel le tranchant d'une lame, le vent du nord qui descend du mont Pukhan frappe la colline de Waryong-dong et souffle à grand bruit. Dans la pénombre du petit jour, les feuilles s'envolent entre les pavillons serrés les uns contre les autres au pied de la colline et de la résidence de Sa Majesté tandis que d'autres, brillantes comme du papier d'argent, sont dispersées au loin, jusqu'à la porte Tonhwa.
L'Académie royale se trouve dans le jardin derrière le palais Changdk.
Yi In-mong, le bibliothécaire, dort encore profondément quand, dans son sommeil, il entend une voix. Venant d'un lointain invisible, comme jaillie de la poussière du temps, elle traverse son corps et le fait se retourner.
Il ouvre les yeux. Couché sous la couverture, il contemple le papier blanchâtre du plafond. Serait-il en train de rêver? Tout devient flou.
- Maître, votre toilette.
La voix, soudain, le rappela à la réalité : il rejeta la couverture, se leva et but une gorgée de l'eau qui était à son chevet. Le bruit du vent qui avait soufflé toute la nuit faisait vibrer le papier chinois de la cloison.
- C'est Sung-hon ?
- Oui, Maître, vous m'avez demandé de vous réveiller à cinq heures...
In-mong se traîna jusqu'à la porte et quand il l'ouvrit un vent glacial entra tout d'un coup dans la chambre. Il sentit sur son visage et sur son cou comme un givre impalpable. Hyon Sung-hon, petit fonctionnaire de l'Académie était là, hésitant, avec une cuvette d'eau, une serviette de coton, et de la poudre de savon enveloppée dans du papier. Il faisait encore sombre. (『L'Eternel Empire』 pp. 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