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의 소설 『부초』의 도이치어 번역은 우선 그 문체가 자연스럽고 유려할 뿐만 아니라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을 유지하여 독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잡아끄는 매력을 지녔다. 이것은 두 사람의 도이치어 원어민(Doris Sabine Spari, Nina Berger)이 공동으로 번역작업에 참여해서 얻은 성과일 것이다. 그러나 번역은 한 언어(출발언어)의 텍스트를 다른 언어(목표언어)의 텍스트로 옮기는 일이기 때문에 번역문체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 바탕이 되는 원문과의 등가성 여부는 언제나 기본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물론 두 언어의 어휘와 문법구조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고, 그 쓰임새의 문화적 콘텍스트에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원문에 완전히 대응하는 번역문을 만들어 내는 일은 원칙적으로, 그리고 특히 언어의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문학작품일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엄격한 등가원칙을 기준으로 한다면 번역은 원문에 대한 반역일 수밖에 없다. 그런 기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원어민과의 공동번역은 두 언어의 등가성을 검증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부초』의 번역팀의 능력은 문장의 재배치에서 특히 돋보인다. 예컨대 규오와 다툰 석이네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어깨가 흔들릴 뿐,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무는 석이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Sie gab keine Antwort, sondern biß sich auf die Lippen, um das Weinen zu unterdrücken. Ihre Schultern zuckten auf und ab.
‘흔들리는 어깨’와 ‘대답 없음’의 위치가 원문과 번역문에서 뒤바뀌었고, 수식절(“입술을 깨무는”)은 대등절(“sondern ...")로 독립시켰다. 어깨의 흔들림과 참는 울음의 인과관계는 번역문이 더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위 아래로’(”auf und ab“)라는 부사어는 흐느낌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작은 예에 지나지 않지만 두 언어의 특징에 대한 번역팀의 깊은 이해가 잘 나타나있다. 직역을 했을 때 뜻이 통하지 않을 염려가 있을 경우에는 해석을 첨가한 의역이 더 효과적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혜를 겁탈하려다 칼에 찔려 붕대를 감은 규오의 손을 보며 석이네가 한 말이 그 예다.
「아니 무슨 장난을 했길래...... 여름살은 성나면 큰일인데, 언제 그랬어요?」
“Meine Güte, was kann das nur für ein Spiel gewesen sein? Im Sommer ist mit Wunden nicht zu Spaßen, besonders wenn sie sich entzünden. Wann ist das passiert?”
“여름살”을 직역하면 Sommerfleisch 정도가 될텐데, 그렇게 되면 여름에 파는 육류로 오해하기 십상이라 문맥이 통할 리 없다. 번역문에서는 ‘염증을 일으키기 쉬운 여름의 상처가 큰일’이라는 뜻이 표현되어있다. 더 나아가 ‘장난’을 ‘Spiel’과 ‘Spaß’라는 두 낱말로 옮김으로써 ‘놀이’와 ‘농(담)’이라는 함의를 이끌어 낸 데에서도 어휘선택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이 번역의 모든 장점을 다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점은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첫째는 제목에 관한 것이다. 번역에서는 원작의 제목 “부초”를 ‘Ende einer Vorstellung’이라고 고쳤는데 이는 ‘어느 공연의 종말’ 정도의 뜻을 지닌다. 이는 원작의 내용에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서커스단의 해체과정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20세기 초 서구의 문학에서 이와 비슷한 모티프와 비극적 운명이라는 주제에 익숙한 서구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제목이다. 그러나 원작의 제목은 한 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서커스단의 ‘뜬 풀’ 같은 떠돌이 상태를 가리킨다. 속표지 한쪽에 원작의 제목을 밝히면서도 그 음역(Pucho) 만을 표기했을 뿐, 번역 제목처럼 고친 이유에 대한 설명이 빠짐으로써 이와 같은 미묘한 시각차이가 무시된 것은 작지만 매우 아쉬운 일이다. 둘째, 고유명사의 처리방식이다. 사람의 이름은 음역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나라의 인명이 대개 뜻글자인 한자어에 기초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작품 내용과 특별한 관련이 없는 한 소리나는 대로 적는 편이 오히려 원작의 이국적 풍미를 살리는 자연스러운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 내용상 의미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명칭은 다르다. 석이네가 동일에게 석이를 보내놓고도 자식에 대한 정을 뗄 수 없는 마음에 철석같은 약속을 어기고 동일을 찾아가 만나는 곳이 “호수” 다방이다. 이 다방 이름은 원작에 딱 한번(사실은 석이네 “눈이 가 멎”었을 때와 전화로 동일에게 그것을 가르쳐 줄 때, 두 번) 나오지만 단순히 음역으로만 처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나온 동일의 달라진 태도를 묘사하는 부분이 호수의 뜻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전연 옛날의 - 단체를 찾아와 마음속에 뜬 수초 사이사이를 쓰다듬어주던 동일이 아니었다”고 하지 않는가. 끝내 이룰 수 없는 사랑인줄 알기에 자식까지도 포기한 석이네에게 그 다방은 예전처럼 동일의 애무를 애타게 그리는 마음의 수초로 가득한 호수와 같은 것이다. 번역에서는 이러한 의미연관을 살리지 못했다. 번역 텍스트를 우리말로 거꾸로 옮기면 동일은 “예전에 서커스를 찾아와 그녀와 근심걱정을 나누던 다감한 남자와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구체적 심상(‘수초’)을 추상적 개념(‘근심걱정’)으로 옮김으로써 표현이 건조해진 것이다.
끝으로 번역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책표지에 실린 줄타기 광대의 사진과 원작의 내용에 큰 거리가 있는 점이 문제다. 하얀 한복과 하얀 버선발, 머리에 두른 하얀 띠와 턱 아래로 동여맨 갓끈, 한 손에 부채를 펼쳐 들고 줄 위에 무릎 꿇은 자세로 걸터앉은 사내의 모습이나 기와지붕과 푸른 숲의 배경에서 한국의 전통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러나 원작이 묘사하는 서커스는 천막 안에 설치된 무대 위에서 “긴 대막대기로 몸의 균형을 유지하며 나란히 줄 위를 걸어나”가는 일곱 명의 여자들이거나 남자들로 이루어진 “공중 그네타기조”의 묘기로서 분명히 서구적인 것이다. 책표지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작품 내용을 암시하는 기호의 기능을 지니는 것일진대 이 사진이 단순히 이국취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배려에서 선택되었다면 그다지 신중한 선택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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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방으로 들어왔을 때 윤재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자세로 잠이 들어 있었다. 어깨를 안아 윤재를 바로 눕혔다. 스팀 위에 빨아온 양말을 널었다. 잠든 윤재를 한 번 더 내려다본 지혜는 방의 불을 껐다. 캄캄한 방 안에는 이따금 스팀의 스익스익 새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다. 얼마 동안을 어둠 속에 서 있던 지혜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왔을 땐, 늦은 밤거리는 오늘따라 텅 비어 보였다. 습기찬 바람을 맞으며 지혜는 길가로 나와 택시를 기다렸다. (『부초』(오늘의작가총서 17), 민음사, pp. 272～273)
Als sie wieder ins Zimmer kam, hatte Yunjae sein Gesicht ins Kissen vergraben und war auf dem Bauch liegend eingeschlafen. Sie umfaßte ihn an den Schultern und legte ihn zurecht. Die nassen Socken hängte sie über den Heizkörper. Chihye schaute noch einmal auf den schlafenden Yunjae, dann löschte sie das Licht. In dem finsteren Raum war nur das Geräusch des Dampfes zu hören, der zichend aus der Heizung entwich. Sie stand noch eine Weile im Dunkeln, dann verließ sie leise das Zimmer.
Draußen schien ihr die Straße in dieser Nacht besonders leer. Als sie auf ein Taxi wartete, blies ihr ein feuchter Wind ins Gesicht. (『Ende einer Vorstellung』 pp. 227～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