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유경환_시인, 아동문학가, 추계예대 교수. 1936년생. 동화집 『다섯 개의 창이 있는 집』『별 은 추운 밤에만 큰다』『한그루 꿈나무를 위하여』 등
오늘을 함께 살고 있는 두 시인에게 나는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 지면을 통해 이런 실토를 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것은 나의 뒤늦은 고백이 아니라, 그들의 인내와 인고에 대한 찬양이다.
이제는 역사의 저쪽 골목 끝으로 멀어진 ‘언제였던가’의 일이다. 이른바 ‘한일 굴욕외교’ 반대시위가 한창 거리의 최루가스 속을 휘젓고다닐 때의 일이다. 나는 그때 월간 『사상계』 잡지의 편집부장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한일 국교정상화’ 시도가, 어째서 굴욕인가를, 사상계 편집진은 남보다 소상히 간파하고 있었다.
국제정치 역학관계상 당시의 미국은 한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동북아의 세력균형과 긴장완화에 이롭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Foreign Affairs』誌 주장). 뒷날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국무부 기록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지불할 액수를 ‘유상 무상 합쳐 5억달러’ 선으로 정하고 이를 종용, 일본 외상과 JP 사이에 오고간 메모로 흥정이 된 것인양 외신들은 보도하였다.
그때 돈 5억달러.
이것만 받고 국교정상화가 되면 더 이상 일체 논의하지 않는다는 그 ‘족쇄’ 때문에 굴욕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 족쇄 때문에, 북해도 등 탄광에서 배고픔에 겨워하다 시들은 한국 노무자들, 남양군도 전선 동굴 속에 탄약을 지고 나르다 기진한 한국인 군속들, 또 일본 각지의 군수공장에 동원된 한국 근로자들, 특히 위안부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과 배상을 한푼도 못받고 있는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는 체결하되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도록 우리는 반대를 천명했으며, 이를 알리기 위해 시민과 학생의 반대동조자를 구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한일 굴욕외교 반대 문인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즈음 적잖은 수의 서명자 가운데 시인 박성룡(朴成龍)과 시인 마종기(馬鍾基) 씨가 들어 있다. 이들에게 전화연락은 내가 했고, 전화는 사상계 편집실 전화였으므로, 당국의 감청장치에 의해 당연히 녹음되었다. 그러므로 부인할 길이 없는 증거가 되었다.
박 시인은 내가 사상계사에 입사한 1959년에 이미 사상계사 문학담당 사원이었다. 뒷날 문학당담 편집진이 짜여지자 박남수 시인의 퇴사에 이어 박성룡 시인도 서울신문사로 전직했다. 그동안 한 직장에서 가까이 사귄 인연으로 박성룡 시인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고 서명을 받아내게 되었다.
마 시인은 나의 은사인 혜산 박두진 시인에게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추천을 받은 문단동서인 셈이다. 마 시인의 선친인 마해송 선생의 원고를 받으러 드나들 때도 그랬거니와, 예전 『학원』이라는 학생잡지 문예란에 이름이 함께 오르내린 그런 사이였다. 마 시인은 그때 군의관으로 공군 현역장교였다.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주저없이 동의해주어 서명자에 끼었다. 그러나 이 ‘서명’이 문제가 되어 구두끈이 풀리고 허리띠가 없는 군작업복 차림으로 영창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루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것은 서명 이후부터 시작된다. 박성룡 시인은 서울신문사에서 쫓겨나서 그 기나긴 유랑생활을 해야 했고, 마종기 시인은 결국 군복을 벗고 해외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박성룡 시인은 그 뒤 오늘날에 이르도록, 나로 말미암아 비롯된 그 엄청난 고통에 대해, 단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다. 만나면 그냥 눈웃음을 지을 뿐이니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사상계』를 떠나 한동안 밖에 나가 있는 동안 겨울방학에 오하이오주 토리도시에 있는 마 시인에게 가본 적이 있다. 내가 빌미가 되어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놀라울만큼 한식을 차려주어 고맙게 여겼던 추억이 남아 있다.
세월이 흘렀고 시대가 바뀌고 세상도 달라졌다. 며칠 전 조병화 선생이 운영하는 편운문학상 운영위원회가 발간한 『편운문학 10년』이라는 책자를 보니(나도 그 운영위원회의 한 사람이어서 보게 되었음), 수상자의 한 사람인 마 시인이 왜 고국을 떠나게 되었느냐를 밝힌 내용에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다(p. 271).
“선배 문인이 내 이름을 생각없이 넣어주어서, 나는 재경문인 한일회담 반대선언에 서명한 시인이 되었고, 이것이 군인사법에 걸려서 치도곤을 맞고 연창 구류생활을 …… 했다.”
이 구절의 ‘생각없는 선배’는 바로 이 글을 쓴 나다. 두 시인에게 30여년이나 고통을 안기게 한 사실에 대해 갚을 수 없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이 두 시인에게 바른 판단과 옳은 행위를 하였다는 추인을 내려줄 것으로 믿는다. 두 시인에게 하느님의 복이 두배로 내리기를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