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에 들면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런 활발한 번역에 힘입어 이전에는 해외에서 출간된 화제작이나 명작이 주로 번역 대상으로 검토되었지만, 이제는 그 단계를 뛰어넘어 작품이 출간되기 이전에 원고를 읽을 수 있는 기회도 종종 있다. 물론 이것은 해외 에이전시나 유명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런 원고의 대부분이 작품으로 출간되어 독자에게 선보였을 경우, 작품성뿐만 아니라 시장성도 갖춘 작품으로 평가되는 경우는 많이 있다.
멕시코의 여성작가 사비나 베르만(Sabina Berman)의 『자아의 매력적인 우연』은 바로 해외 에이전시가 홍보에 역점을 두고 있는 수작 중의 하나로 금년 12월에 출간될 예정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출간될 예정이다.
사비나 베르만은 라틴아메리카 연극계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극작가 중의 하나이다. 특히 『판초 비야와 벌거벗은 여인 사이에서』(1993)는 멕시코 인들의 집단의식 속에 자리 잡은 사회적·성적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전복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남성성을 폭력, 역동성, 혁명 정책과 동일시하고 여성성을 복종, 수동성, 정치적 무관심으로 여기는 문화적 규범을 점검하며 예리한 비판을 가한다. 또한 1994년에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반발하는 사파티스타운동과 이후 전개되는 정치적 살인을 미리 예고했다는 점에서도 “상상이 현실보다 더 정확한” 예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아의 매력적인 우연』은 여주인공 카렌의 내면 독백으로 시작한다. 작품에서는 ‘나’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사실 이 단어는 작품의 주요 동기이며, 작품의 제목도 거기서 탄생한다.
이런 단음절의 반복적 사용 이후, 화자는 자기의 숙모 이사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콘수엘로’ 참치 회사를 물려받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파산 직전에 있는 공장과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의 집을 인수받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서 멕시코의 마사틀란으로 향한다. 낡은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지하실에 성난 야생동물과 같은 상태의 한 여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카렌이다.
이사벨은 그 여자아이가 자기와 그녀 언니의 눈 색깔과 똑같은 초록색 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자 이사벨은 그 아이가 자기 조카일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사람처럼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나’라는 말이 그 아이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주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카렌이 열다섯 살 때에 처음 배우게 되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 작품의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카렌은 ‘나’라는 말을 배운 후, 사물들의 이름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사벨은 카렌의 기억력이 너무도 뛰어나다는 사실에 놀란다.
세월이 흘러 이사벨은 카렌이 몇몇 분야에서 천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미국대학에서 축산학을 공부시킨다. 카렌은 가장 유명한 헌팅턴 교수의 도살장 디자인에 관한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그녀는 ‘스트레스 없는 고기’라는 이름으로 헌팅턴 교수가 도안한 도살장이 실제로는 소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으며 도축되는 것을 밝혀낸다. 이후 그녀는 ALF(동물자유전선)와 문제를 겪게 되고, 참치 탱크를 확장하여 참치의 천국을 만들면서 참치들이 보다 나은 환경 속에서 살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작품은 참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환경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야만에서 문명의 세계로 들어오는 카렌을 통해 이 작품은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일깨우지만, 그것은 결코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이야기 전개를 통해 호소력 있게 이루어진다. 또한 환경보호단체를 무조건적으로 좋게 그리는 종래의 환경소설과는 달리, 테러와 납치 등을 일삼기도 하는 단체로 등장시킴으로써, 그런 단체의 이중적 가치를 보여주는 것도 이 작품의 장점이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작품을 읽을 때 종종 걸림돌이 되는 사회적·문화적 맥락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보편성을 띤 작품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