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심위원들에게 심사 자료로 제공된 시집은 무려 1,200여 권이나 되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매달 100권 정도가 출간된 셈인데, 이는 어느 문화 선진국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수량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수량의 확보가 곧장 질적인 수월성의 제고에 기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시가 매우 역동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 많은 시집들 가운데 10권 내외를 선정한다는 것은 수많은 번민과 용단을 요구하는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심위원들이 처음 모인 것은 6월 18일이었고, 예심을 마친 것이 8월 17일이었으니, 예심은 두 달에 걸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모두 세 차례의 심사를 했는데, 첫 모임에서는 그동안 출간된 시집들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시집들을 선정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는 다음 모임까지 선정된 시집을 읽어오기로 했다. 7월 28일의 두 번째 모임에서는 예심 대상을 17권의 시집으로 대폭 압축했고, 그 시집들을 다음 모임까지 다시 정독해 오기로 했다. 마지막 모임에서 예심위원들은 시집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그 장단점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예심을 통과한 시집을 10권으로 한정하자는 데에는 쉽게 합의했으나, 그 10권을 어느 것으로 선정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는 분분했다.
오랜 시간의 토론에도 완전한 합의에는 이를 수가 없어서 결국 투표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다. 2차 모임에서 정한 17권을 대상으로 각자 10권에 한해 한 표씩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5권의 시집이 3표를, 4권의 시집이 2표를, 7권의 시집이 1표를, 1권의 시집이 0표를 각각 받았다. 그래서 2표 이상을 얻은 9권의 시집은 무난히 선정되었고, 나머지 1권은 1표를 얻은 시집들 가운데 지루하고 오랜 토론을 거친 후에 어렵게 선정되었다.
예심위원들이 심사과정에서 각별히 염두에 둔 것은, 시집에 실린 작품들이 균질적 수월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이전의 시집(들)과 변별되는 시적 진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고 있는지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일부 작품은 우수하나 그렇지 못한 작품들이 다수 섞여 있는 시집이나, 새로운 시 세계를 개진하지 못하고 이전의 시적 성과를 반복하는 듯한 시집들은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것은 문단 권력의 자장에서 비껴서 있으면서도 묵묵히 정진하는 시인들, 안정감은 다소 부족하지만 치열하게 색다른 서정을 개척해 가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시집들을 더 많이 포함시키지 못한 점이다.
올해의 시단은 새로운 세기의 첫 10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이라서 그런지 도발적인 실험정신보다는 정통 서정에 기대면서 차분하게 내실을 기하는 작품들이 우세한 듯하다. 소위 미래파로 불리었던 시인들이나 그들의 시적 경향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시인들의 시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는 이제 미래파 이후의 또 다른 새로움을 암중모색하고 있는 분위기가 감지되어 일말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분명하게 이 시인이다, 혹은 이 작품이다, 라고 할 만한 다크호스가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아쉬움도 적지 않다. 후일을 기다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