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준 군청 직원의 말이다. 사실 군위군은 삼국유사에 운명을 걸고 있다. 문화회관의 이름도 삼국유사문화회관이고, 새로 만든 도서관도 삼국유사군위도서관이다. 도서관 안에는 삼국유사자료실을 따로 두었다. 아직은 조성 중이라 규모는 초라하지만.
물론 이런 삼국유사 열풍은 이 책의 지은이인 일연 국사가 여기서 세상을 마쳤기 때문이다. 나는 자꾸 추기경과 국사가 오버랩 되었다.
군청에서 생가까지는 3킬로미터 남짓 한데, 나중 추기경이 된 소년은 이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고, 장날이면 물건을 파는 장사꾼 앞에 한없이 서 있곤 했다. 소년은 그가 부러웠다.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돈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위 사람들이 몽마르트 언덕이라 부르는, 군청 맞은 편 야트막한 언덕 위의 성당에서 어느 날 벌어진 사제서품식이 소년의 생애를 결정했다면 결정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가 이 광경을 보며, 아들들을 반드시 신부로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안 합니까.”
복원한 생가에 걸린 사진을 찍던 때라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KBS 열린음악회의 청중석에 앉아 있던 추기경이 사회자의 권유에 못 이긴 척하고 불렀던 노래다. 김수희의 ‘애모’였다. 순간 청중석의 곳곳에서 터져 나오던 놀라움의 탄성. 아마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추기경의 종교적인 깊이나 사상을 잘 모른다. 1968년에 대주교가 되었고 이듬해 추기경이 되는데, 그것이 마흔 일곱 살의 최연소, 아시아에서 세 번째라는 세속적인 기록에만 관심이 더 갈 뿐이다. 그러나 추기경은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의식 속에 고스란히 잡혀 있다. 대주교가 되던 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70~80년대 학생 시절,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마다 추기경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내 의식 속에 들어와 지남(指南)이 되었다. 비록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말이다.
얼마나 더운지 사진 한 장 찍기조차 버거웠다. 그저 빨리 에어컨 나오는 실내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
추기경이 살던 언덕 위의 작은 집을 내려오는데 노래가 다시 생각나 흥얼거려 보았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김수희의 「애모」 첫 소절. 추기경에게 ‘그대’는 누구였을까? 물론 하느님이겠지. 하느님처럼 섬기는 교회와 신자일 수도 있고. 그런데 마침 그 무렵 이 생가를 다녀간 다음이었다면, 일찍 남편을 잃고 여덟 남매를 홀로 키운 당신의 어머니가 그대 아니었을까 싶었다. 추기경은 5남 3녀 가운데 막내였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나만, 추기경에게 어머니는 특별했다.
얼마만인지 모르게, 쓰러져 가는 생가에 다시 들른 추기경은 한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적어도 사진 속의 모습은 거짓 없이 그렇게 다가온다. 마당에 찍힌 어머니의 발자국이라도 떠올리는 것일까.
음력 7월 7일, 그러니까 칠석을 보낸 다음날 아침 일연 국사는 열반에 들었다. 만 83세, 군위군 고로면의 인각사에서였다.
올해 추모제는 지난 8월 17일에 열렸다. 말복을 지나고도 열흘쯤 뒤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흔히 삼복 한 가운데 들어간 적이 많았다. 국사가 열반에 들던 해의 음력 7월 8일도 양력으로 8월 2일이었다. 중복에서 말복 사이이다.
더위는 타고 난 모양이었다. 국사의 생일이 음력 6월 11일인데, 그해는 양력으로 7월 25일이었다. 초복에서 중복 사이이다. 삼복더위 속에 태어나 삼복더위 속에 돌아갔다.
인각사가 소중한 것은 삼국유사의 완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78세에 인각사에 와서 83세까지 5년간, 우리는 이 사이 언제쯤 탈고했으리라 보고 있다. 더러는 점잖은 국사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국사로 친다면 무협지를 썼다고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국사의 삼국유사 저술은 입방아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이제 삼국유사는 이 모든 논의의 저 위에서 의연히 자기 자리를 잡고 말았다. 삼국유사는 모든 책 위의 책이다.
나는 국사의 삼국유사 저술이 당신 평생에 걸쳐 닦은 감각의 소산이라 보고 있다.
감각이라면 타고 나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닦아지기도 한다. 그 가운데 현장 감각은 특히 그렇다.
삼국유사는 국사의 현장 감각에 8할은 빚지고 있다. 자기의 발로 걸어가 듣고 보고 느낀 것이 고스란히 적혀, 비록 다른 이의 기록이 있어 비교해 본다한들, 현장감에서 결코 따라가지 못할 우뚝한 경지에 서 있다.
오늘날의 책으로 현장 감각을 비견한다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정도가 있을까. 88고속도로 한 휴게소의 무감각한 건축미, 비문(非文)에 무정한 문장의 문화재 설명 표지판…… 이런 것들에 대한 작지만 날카로운 발견과 코멘트는 현장에 가 보았더라도 누구나 쓸 수 없지만, 감은사 탑 앞에서는 그저 ‘아, 감은사’ 만 연발하고 싶다는 넉넉함까지 갖추었다. 삼국유사 이후 이만큼 현장감 넘치는 책도 없어 보인다.
이성과 기지의 필치로도 유홍준의 답사기가 빠트린 한 부분이라면 눈물이다. 그의 답사기에는 눈물이 없다.
눈물이라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같은 것이다.
이 소설이 연재될 때, ‘너는……’ 이라 시작하는 문장 앞에 당혹했던 기억이 있다. 혹 ‘나’의 오자(誤字)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사상 초유의 2인칭 화자 주인공의 소설 기법을 개발해 낸 신경숙의 감각이었다. 이 하나로도 주목할 만 했지만, 한국 소설의 전통 속에 면면한 눈물의 서사는 이 소설에 와서 어떤 완성을 본 느낌이었다. 팔린 책을 쌓아놓은 높이만큼 눈물도 큰 강처럼 흘렀으리라.
눈물은 값진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저 깊은 속에는 눈물이 자리한다. 첫 페이지의 단군신화에 너무 깊숙이 매료되어, 세상에서는 삼국유사를 민족 신화와 역사의 현장이라 서둘러 단정하지만, 사실 더 많기로는 이 땅에서 살아온 유명 무명의 사람들이 남긴 눈물 같은 이야기들이다. 삼국유사에는 눈물이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일정 부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합해진 책이라 한다면 어떨까.
인각사가 있는 고로면은 군청에서 남쪽으로 30킬로미터 쯤 내려간다. 해발 800미터의 화산이 길게 늘어서 영천시와 경계를 이룬다. 절은 이 산 아래 있어 화산 인각사라 부른다. 맞은 편 야트막한 산 중턱에는 주인이 일연의 어머니라 알려진 묘도 있다. 절 앞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난 지방도로의 끝에 면사무소와 초등학교가 있었다. 이제 거기에는 댐이 만들어져 지난봄부터 물이 차기 시작했다. 벌써 면사무소 일대는 물에 잠기고 보이지 않는다.
20여 년 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 점심을 사먹던 식육식당도 물에 잠겼다. 이 고장에서 한 사람은 태어났고 한 사람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