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승수_경희대학교 혜정문화연구소 연구교수. 1964년생
저서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거문고 줄 꽂아놓고』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등
중국 역사에서 북경의 위상은 원나라(1271~1368) 시기에 격상했다. 쿠빌라이는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1272년 중도(中都)를 대도(大都)로 고쳤다. 대도는 지금의 북경이다. 1231년과 1232년, 1235년 세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끝내 원나라 지배 질서에 복속하고 말았다. 1264년 원종(元宗)은 북경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났고, 1274년에는 북경에 있던 충렬왕(1236~1308)이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후 고려의 왕들은 원 황실의 부마가 되었고, 원나라에서는 고려 왕들의 자리를 좌우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고려와 원, 개성과 북경 사이에는 문물 교류가 활발해졌다. 13세기 중엽에서 14세기 후반에 이르는 이 100여 년은 중국 사행으로서의 연행(燕行)이 처음 실천되었던 시기이다.
1368년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明)이 새로 건국되었다. 명나라는 요(遼)·금(金)·원(元) 등 북방 민족들이 중시했던 북경이 아니라 남경(南京)에 도읍했다. 명은 개국 후 10개월이 지나 고려에 사신을 파견했고, 고려에서는 명 사신이 도착한 한 달 뒤인 1369년 5월 하등극사(賀登極使)를 파견했다.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상황 변화에 따라 복잡한 외교 관계가 전개되었는데, 이후 20여 년 동안 고려에서 파견한 사행은 50차례나 남경에 닿았다. 고려의 사행은 개성을 출발하여 요양(遼陽) - 여순구(旅順口) - 등주(登州) - 남경(南京)의 노선을 이용했다. 이 노선은 북경까지의 길보다 훨씬 멀 뿐더러, 육로는 물론이고 해로와 수로를 이용하는 복잡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당시 고려의 관료들은 대부분 남경 사행을 기피했다. 행로의 고단함과 위험은 물론이려니와, 신흥 명과 잔존 북원(北元) 사이에서의 외교 업무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고려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함을 넘어 고려가 애써 회복한 철령 지역을 빼앗으려 했고, 이에 반발한 고려는 요동 정벌을 기도하기도 하였으니, 당시의 국제관계는 평화로운 시절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사행이 바닷길에서 사고를 당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고, 명에서는 고려에 공물로 요구한 전마(戰馬)의 부족을 내세워 트집을 잡기가 일쑤였다. 그 와중에 김구용 같은 이는 1384년 사천 지방으로 유배를 가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이 시기 고려에서 고단한 사행 외교를 마다 않으며 동분서주한 대표적 인물이 정몽주(1337~1392)이다. 27세이던 1363년에서 52세이던 1388년에 이르는 25년 동안, 그는 7차례나 사행길에 나섰고(남경 3회, 일본 1회, 요동 3회), 유배 1차례와 종군 3차례를 겪었다. 이 시기 정몽주가 밖에서 보낸 시간을 다 더하면 88개월로 7년이 넘는다. 사회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청장년기의 1/3에 가까운 시간을 야전과 사행로, 아니면 유배지에서 보낸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문인으로서 이렇게 다양한 외직을 체험한 사람은 그 유례가 없다. 그는 순수하고 열정적이었고, 섬세함과 호방함을 겸비했으며, 실무와 학문을 양전했던 희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몽주는 120여 수에 달하는 사행 관련 시를 남겨, 시대를 거슬러 600여 년 전 개인의 심회는 물론 역사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등주에서 요동벌을 바라다보니 登州望遼野 아득하다 하늘의 저편 가로다 邈矣天一涯 바다가 그 사이를 막고 있어서 溟渤限其間 동이와 중화 땅이 나뉘어졌네 地分夷與華 나는 배를 타고 여기 왔으니 我來因舟楫 잘 건넌 것 오히려 자랑스럽다 利涉還可誇 어제는 바다 북쪽 눈이 왔는데 昨日海北雪 오늘 아침 남쪽엔 꽃이 폈으니 今朝海南花 이다지도 날씨가 다른 것인가 夫何氣候異 길이 멂을 겪어서 알 수 있도다 可驗道路 나그네 심사는 쉬이 슬프고 客懷易悽楚 세상일은 좋아라 어그러지니 世事喜蹉 함께 오던 동료 두세 사람이 偕行二三子 풍파에 간 곳을 잃어버렸네 相失迷風波 밤새도록 맘 졸이며 걱정하다가 終夜苦憶念 뜬 눈으로 북 치는 소리 들었네 耿耿聞鼓 새벽에 봉래각에 올라가 보니 晨登蓬萊閣 파도가 산처럼 솟구치더라 浪湧山嵯峨 돌아와 외로운 객관에 들어 歸來就孤館 베개 기대 부질없이 읊조리노라 枕空吟
1386년 3월 19일 산동성 등주의 객관에서 지은 시이다. 정몽주는 하루 전 날 요동반도의 여순을 출발하여 산동반도의 등주에 도착했다. 그 사이의 발해를 중화와 동이의 경계라 하였으니, 요동 일대는 크게 보아 동이의 영역으로 본 것이다.
3월 중순에도 요동에는 눈이 내렸지만 산동에는 꽃이 피었다고 했으니, 이것만으로 노정의 멂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당시 사행에는 통역관이 탄 배가 풍랑 때문에 도착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그는 걱정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봉래각에 올라보았지만 여전히 파도는 산처럼 일어나고 있다. 정몽주는 하릴 없이 숙소로 돌아와 소리 낮춰 시를 읊조리며 행역의 고단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나그네 밤 안부를 누가 물으리 客夜人誰問 낮게 읊느라 밤은 깊어만 가네 吟欲二更 시상은 침상에서 엮여 나오고 詩從枕上得 등불은 벽 사이에 밝게 빛나네 燈在壁間明 말없이 지난 일을 떠올려 보고 默默思前事 한참 남은 일정도 셈을 해보네 遙遙計去程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俄然睡一覺 종 녀석 새벽 닭이 울었다 하네 僕報鷄鳴
구서역(丘西驛)의 객사에서 묵으며 지은 시이다. 구서역은 지금의 산동성 안구시(安丘市)에 있었던 역참이다. 이역의 객방이 마냥 낯선데 지난 일 앞 길은 두서없이 떠오르는데,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등이 뒤섞여 잠은 오지를 않고 청하지 않은 시상만 떠오른다. 뒤치럭거리는 사이 동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닭은 울어 갈 길을 재촉한다. 사행의 고단한 여정 속 나그네의 실존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작품이다.
멀고 먼 사행길이 마냥 고달팠던 것만은 아니다. 이 길은 장부의 호기를 키우고 견문을 넓혀주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산사를 찾아 스님과 담소하며 잠깐의 한가로움에서 영원한 안식을 맛보기도 했다. 강소성 진강시(鎭江市) 북고산(北固山)에는 호북성의 황학루(黃鶴樓), 호남성의 악양루(岳陽樓)와 함께 장강의 3대 누각으로 꼽히는 다경루(多景樓)가 있다. 일정의 여가에 정몽주는 다경루에 올라 계담(季潭)에게 아래 시를 지어 주었다.
평생 기상 크고 넓게 키우려고 한다면 欲展平生氣浩然 감로사 다락 앞을 찾아와야 하리라 須來甘露寺樓前 빗긴 석양 속에는 옹성의 화각 소리 甕城角斜陽裏 보슬비 저 끝에는 과포로 오는 배들 瓜浦歸帆細雨邊 옛 솥에는 아직도 양 시절 남아있고 古尙留梁歲月 높은 처마 똑바로 초 산천 누르누나 高軒直壓楚山川 올라와 한나절을 스님 만나 얘기하니 登臨半日逢僧話 고국 가는 8천 리 길 모두 다 잊었노라 忘却東韓路八千
정몽주가 다경루에 오른 시간은 석양 무렵이었다. 빗긴 석양 속으로 저 아래 진강성에서 울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보슬비 속 배들은 포구로 돌아오고 있다. 옛날 솥에는 양(梁) 나라 시절의 연호가 새겨져 있고, 누락의 높은 처마는 중원의 남쪽 초나라 땅을 누르고 있다. 이 아득한 시공간 속에서 스님 만나 한나절 선담(禪談)을 나눴더니, 먼 길의 피로와 고향 향한 그리움이 일순 지워지고 만다. 여행은 그 길 주변에서 일어났던 역사 사연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가는 연행 노정의 대부분이 그렀듯, 요동반도 또한 우리 고대사의 주요 무대였다.
황금전 자리 위에 긴 옷을 드리우고 黃金殿上坐垂衣 백전의 영웅 마음 간직하지 못했노라 百戰雄心不自持 그 옛날 당태종이 친히 전쟁 나설 제 想見太宗親駕日 수레에서 내리던 풍보와 같았으리 宛如馮婦下車時
1386년 귀로에 지은 「안시성회고」이다. 풍보(馮婦)는 범을 때려잡을 정도로 용력이 과인하였으나 그 힘을 절제치 못하여 뜻있는 선비들의 웃음거리가 된 인물로 『맹자』에 나온다. 당태종은 수많은 전투를 거쳐 중원을 통일하였지만 영웅의 도량을 간직하지 못하고 또 남는 힘을 자랑하러 요동 정벌에 나섰다. 풍보 또한 수레 위에 앉아 있다가 호랑이 사냥에 곤란을 겪고 있던 사람들의 요청을 받고 어깨를 우쭐하며 수레에서 내렸다. 하지만 주위 선비들은 힘을 절제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비웃었다. 당태종과 풍부 두 사람을 등치하기만 하였지만, 그 이면에 쓸데없이 힘 자랑하려고 군사를 내어 전쟁을 일으킨 당태종에 대한 조롱의 시선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시성은 요동반도의 개주(蓋州)와 해성(海城) 일대에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아직도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발해에 관한 시도 있다.
먼 옛날 발해가 세워졌던 곳 渤海昔爲國 아직도 그 자취가 남아있구나 於焉遺址存 당에선 왕위 계승 허용했는데 唐家許相襲 요나라가 함부로 병탄하였지 遼氏肆幷呑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이 되니 附我全臣庶 아직껏 그 자손들 이어져오네 于今有子孫 남은 백성 이 사실 어찌 알리오 遺民那解此 탄식하며 수레를 멈춰보노라 嘆息住歸軒
제목은 「발해고성(渤海古城)」이다. 정몽주가 어떤 성을 발해의 옛 성이라고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3~6구에서는, 당나라와는 성공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요나라에 병탄되었고, 나라가 망한 뒤에는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에 귀순한 사실을 말했다.
8구에서 말한 ‘유민’은 발해 고성(古城) 근방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모두 발해의 유민으로 발해의 옛 터에서 살고 있지만 먼 옛날의 역사는 물론 자신들의 내력을 알지 못한다. 정몽주는 이런 사실에 문득 비감을 이기지 못해 가던 수레를 멈춰 세우고 탄식하였다. 정몽주는 발해와 고려의 역사적 연속성을 환기하는 한편, 유적과 유민들 사이에서 그 스스로 발해와의 동일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서 특별히 주목할 단어는 ‘유민(遺民)’이다. 우리 역사에 있어 요동반도를 포함한 요동 지역은 먼 옛날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민(流民) 또는 유민(遺民)의 공간이었다. 1389년 권근은 요양에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대부분이 고려의 유민이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했다. 1488년 최부(崔溥)는 요동 지역의 백성들 반 가까이가 조선 사람들이며 이들은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고국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이후로도 1592년 임진왜란에서 1636년 병자호란에 이르는 여러 차례의 전란을 겪으며 조선의 수많은 백성들은 유민(流民)이 되어 요동 지역에 흘러들어갔다. 19세기 말 혼란기를 거쳐 국권상실기에 이르러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해졌으니, 오늘날 재중동포의 대부분은 당시 유민(流民)의 후손들로 일종의 유민(遺民)인 셈이다. 정몽주가 발해를 염두에 두고 말한 ‘유민(遺民)’은 연속성과 반복성의 차원에서 요동 지역의 역사적 의의를 새삼 환기시켜주며 반성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이방원의 회유에 맞서 「단심가」를 부르고 선죽교에서 피살된 절의의 정몽주는 알고 있지만, 그가 위난의 시대 남북 만 리를 종횡했던 대경륜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지금도 봉래각에는 파도치던 바다를 바라보던 정몽주의 시름이, 구서역에는 그날 밤 다 채우지 못한 시구가, 그리고 다경루 앞에는 스님과 한가로이 나누던 대화의 한 토막이, 요동반도에는 고구려와 발해를 회고하던 역사적 통찰이 남아있을 것이다. 모두 우리 역사의 공간이고 사연이며, 나그네를 손짓하는 흔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