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ㅣ김승희_시인. 서강대학교 국문과 교수. 1952년생
시집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등
시작 노트
숨 막히는 자본주의의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만 그런 위대한 일은 나 같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대신 오랜만에 조침령로에 있는 산골 집에 갔다. 『산책과 자본주의』라는 책 속의 “산책이란 상처받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말이 가슴을 울리는데 집 주변에 희게 피어있는 망초 꽃, 노오란 달맞이꽃, 보랏빛 칡꽃, 도라지꽃들 사이를 거닐다가 그런 산야 꽃들에게서 착한 위로를 받기도 하였다. 며칠 후에는 몇 친구들과 함께 곰배령에 올랐다. 곰이 산길을 오르다가 그 지점쯤에 와서 “아이구 참 좋다……”라고 배를 벌렁 드러내고 누워 버렸다는 곳. 나는 그 곰이 분명 여성 - 곰일 것이라고 상상하며 우리도 배를 벌렁 드러내며 “아이구 좋다……” 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하늘이 참 가까웠다. 기억만 바꿀 수 있다면 행복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어느 하루. 우울증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은유적으로 새로움이란 것도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곰배령에 올라왔다 앞도 하늘도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을 지나 미나리아재비, 금강초롱, 금낭화, 홀아비바람꽃을 지나 할머니들도 콩자루를 이고 장보러 넘어 다녔다는 길, 곰이 산을 올라가다가 여기쯤 와서 아이구, 좋다…… 배를 벌렁 드러내놓고 두 손 두 발 다 들고 그만 드러누워 버렸다는 곰배령, 칼이 쓰윽~ 배를 지나가는 느낌이다, 환웅을 만나러 온 여자들인가 환웅을 만나고 가는 여자들인가
여자들은 인디언 이름을 짓기로 하였다 어쩐지 여기서는 그것이 어울릴 것 같았다 여자 1은 불 밟고 지나가라고 말했다 여자 2는 강을 건너지 마오라고 말했다 여자 3은 말로 표현못해 거짓말 하는 자라고 말했다 여자 4는 여물 통을 들고 꿈꾸는 자라고 말했다 여자 5는 냄비 들고 서 있어라고 말했다 여자 6은 도망친 구름 여인이라고 말했다 여자 7은 마늘을 많이 깐 냄새나는 손이라고 말했고 명명식에는 반드시 선물 주기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여자들은 꽃과 잎사귀와 풀들을 꺾어서 엮었다 꽃과 잎사귀와 풀들을 꺾어 엮는 동안 여자들은 우울증을 잊어버리고 선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덕에 서서 앞산과 뒷산과 태양과 구름과 바람에 대고 선물을 던지고, 조공을 바치고, 새로운 이름을 공표하고 100일 동안 아니 100시간 동안 아니 100분 동안, 아니 100분도 못되게 배를 드러낸 채로 흙 속에 누워있었다,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 침묵의 물에 잠긴 불투명한 육체…… 팔 다리 허리 유방 눈 코 입술 자궁 머리카락들이 나무 사이로 둥둥 떠다녔다 이름이란 암호였다 이름에 짐승 털이 보송보송 묻어났다 부수수 돋아나기도 하였다
환웅을 만나러 온 여자인가 환웅을 만나러 가는 여자인가 불 밟고 지나가가 일어서고 또 다른 여자들이 일어서고 늙고 쭈글쭈글한 곰의 껍질은 곰배령에 버려두고 내려왔다 또 절반쯤은 둘레둘레 따라오고 있었다
전위의 사람
전위의 사람들은 대개 총을 맞고 먼저 죽는다 몸속에 수천 마리 나비가 날아다녀서일 것이다 산다는 것이 조금 비굴하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 김수영도 푼돈을 벌려고 번역거리를 해서 잡지사에 가 앉아서 편집자들에게 당신이 일해 오는 것을 보면 무섭다는 둥 그런 모욕, 희롱, 고통의 말을 듣기도 했다지만 전위의 사람들이 총을 맞고 죽으면 멋있지만 배우처럼 등을 바꾸고 살면 비굴이다 배우는 앞으로도 뒤로도 등을 바꿀 수가 있다 전위의 사람들은 몸으로 온몸으로 나비를 해야 한다 비눗방울을 해야 한다 봐라, 나비 날개는 너덜거리고 비눗방울은 선풍기 날개에 부딪쳐 찢어진다 선풍기의 앞과 뒤는 완전히 다르다 폭포수 같은 바람이 돌지 않는 것이다 선풍기는 앞과 뒤를 확연히 끊어놓는다 전위의 사람은 미래를 향해서 선풍기의 회전 속으로 나비와 비눗방울 같은 춤을 추어야 한다 즉 뒤에서 앞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절대로 배우의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일회성이라는 금선 위에 서야 한다 용기에는 유보나 반복이 있어서는 안된다, 선택은 하나의 자살이라고 전위의 사람은 의도하지 않아도 지독하게 냉엄하다 허허롭기 때문이다 서부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전위의 사람은 언제나 바람처럼 떠난다 셰인, 하고 아이가 불러도, 사슴뿔 사이 황야로,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가 하늘과 땅의 한가운데를 살짝 파란 나이프로 긋고 가는 것처럼 전위의 사람은 떠날 때까지 온몸 속에 나비가 가득 살아있는 사람 피의 비눗방울로 앞으로 점점 춤추는 사람
모차르트의 엉~덩이 5
모차르트도 나도 기내식 같은 삶은 어울리지 않지, 기내식 같은 말도 기내식 같은 사랑도, 삶과 밥과 시는 보다 울퉁불퉁하지
21세기에 들어와서 더 기내식 같은 사랑이 기내식 같은 시들이 많아진 것 같아 모차르트도 나도 참 천역이라고, 삶과 밥과 사랑은 더 울퉁불퉁해졌는데……
솔직히 말해 모차르트도 나도 맨밥에 냉수 한 그릇, 콩나물 무침만 먹고 살지는 않지만 귀족과 왕실 가족, 대주교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좀 그렇지
폐·심장·기관지·식도, 이런 것들을 아우르는 말 흉곽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너무 우글우글한 절망의 음란이 살고 있어서…… (우리 시대에 절망은 가장 외설적인 것), 기내식 같이 예쁜 말로는 숨이 막히고 누군지 모를 의뢰인의 레퀴엠을 쓰다가 가게 되었나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