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적으로 책과 인간은 하나였다. 나무의 질감이 전해져 오는 따스한 지면은 우리의 매만짐을 기다리며, 그 위에 올올이 새겨진 글자들은 길지 않은 우리 인생의 시간을 흡수한다.
책은 언제나 사랑과 죽음에 눈을 돌리며, 우리의 인생 옆에 나란히 자신의 몸을 누인다. “뜰로 난 창문처럼 사랑에 대한 나의 맹렬한 집착은 죽음으로 향해 있네”라는 조르주 바타유의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현대 동유럽 최고의 작가인 다닐로 키슈(1935~1989)의 최후의 역작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는 책과 인간의 운명에 관한 진지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탐구이다.
이보 안드리치 이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이른 죽음 때문에 수상하지는 못했던 그는 다양한 민족·종교가 혼재하는 발칸반도, 그 중에서도 민족적·문화적 뒤섞임이 가장 활발한 세르비아 북부 주(州)인 보이보디나에서 헝가리 유대인인 천재 아버지와 세르비아 미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럽 내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경험했고, 이런 유년기의 숨 가쁜 이주 경험은 훗날 서유럽에서의 망명생활과 어우러져 그의 문학을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국제적’스타일로 이끌게 된다.
유고 국영철도의 감독관이었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2차 대전 중에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의 비극은 치유불가능한 외상처럼 그의 창작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재였으며, 보르헤스처럼 명민하고 브루노 슐츠처럼 치밀한 이 작품의 서사에서도 구성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근 10년에 걸쳐 씌어졌고 9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구성된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는 ‘백과전서’라는 낱말에서 암시되듯이 아홉 명의 인생으로 환유되는 전 인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탐구이다.
키슈의 다른 글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허구와 사실, 서정성과 서사성이 팽팽한 길항을 이루며 서사에 탄력을 부여한다. 역사의 영원 속으로 떠나간 다채로운 이력의 인생(마술사, 창녀, 철학자, 평범한 시민, 시인, 혁명가, 지식인)을 파노라마처럼 묘사하고 있는 이 독특한 ‘백과전서’는, 문학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미미하고 연약한 보통 사람들을 추모하는 ‘세노타프(위령탑)’라고 정의해 온 키슈의 예술철학이 안착하게 된 새로운 문학 형식이다(키슈는 어느 하나의 삶도 ‘평범한’ 삶은 없다고 늘 강조했다).
우연히 한 밤중에 스웨덴 왕립도서관을 방문하여, 공식적인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범인(凡人)들의 전 생애가 빠짐없이 적혀있는 신기한 백과전서를 발견하고, 그 색인 속에서 고인인 아버지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을 가득 채운 다양한 디테일이 대여섯 쪽에 걸쳐 빼곡히 적혀 있는 대목을 동이 트는 줄도 모른 채 눈물어린 시선으로 읽어 내려가는 여주인공의 환상적 이야기인 표제작은 키슈가 의도하는 이 작품집 전체의 주제 ‘죽음에 대한 문학적 저항과 역사적 진실의 발굴’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이 고심어린 역작을 통하여 키슈는 안드리치 상을 비롯해 국내외 굴지의 문학상과 프랑스의 ‘예술과 문학 기사작위’를 받게 되지만, 표제작 여주인공 아버지의 운명과 비슷하게, 이 작품집을 쓰고 있을 당시 진전되고 있던 폐암으로 몇 년 뒤 사망하게 된다.
키슈는 러시아·동유럽 작가들의 한계로서 문학의 과도하고 성급한 정치화를 지적하면서 작가의 ‘호모 폴리티쿠스’화를 경계했다. 근현대 유럽의 화두였던 민족주의, 파시즘, 스탈린 테러, 반유대주의, 강제수용소 등의 정치적 사건을 다루면서도 그는 진부한 리얼리즘적 기술방식을 배척하고 참신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역사가 밝혀내지 못했던 새로운 이면을 독자가 깨닫도록 했고, 이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철저한 ‘호모 포에티쿠스’라고 일컬었다. 나아가 키슈는 문학을 어떤 정치적 레테르나 특정한 이즘에 귀속시키는 것을 야만적 행위라고 비판했으며 문인의 게으름과 문학형식의 타성과 진부성이 예술적인 결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 전체주의, 인종청소 등 실제적인 비극을 싹틔우는 기반이 된다고 경고했다.
이 작품집의 후반부에서 핵심적인 단편인 「왕들과 바보들의 이야기」는 이런 작가의 논설에 대한 명쾌한 예증으로 읽힌다. 이 작품에서는 1903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로 간행된 ‘한 권의 책’(『적그리스도』)이 36년 후 ‘아마추어 화가’(히틀러)와 ‘그루지야의 신학생’(스탈린)의 손에 들리면서 6백만 명의 기억이자 6백만 권의 ‘책’인 유대인을 얼마나 참담하게 멸절시켰는지를 세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현대 유럽에서 포그롬(유대인 학살)과 반유대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돼온 『시온 의정서』는 예술적 재능이 떨어지고 남서광(濫書狂)적인 자기과시욕이 유별난 하급 번역가들의 ‘자학적인 헌신적 노력’에 의해 새로운 책 『적그리스도』로 탈바꿈한 채 여러 서유럽 언어로 번역되어 30개 이상의 판본과 10만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올리게 된다.
급기야 히틀러의 『나의 투쟁』 속에 집중적으로 인용되어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 대원들이 이 책을 부적처럼 품은 채 양심의 가책 없이 학살을 일삼게 하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묘사하면서 키슈는 반유대주의 담론, 나아가 온갖 전체주의의 이면에 숨어있는 진짜 원인이면서 일상적인 시선으로는 잘 포착되지 않는 예술적 악의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다.
키슈에 의하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무엇을 쓰고 번역할 것이며, 예술가의 책임과 절제는 왜 필요한가를 의식하지 못했던 하급 문인들의 ‘과실치사’와 책과 출판이 본원적으로 갖게 되는 권력 및 신화 생성 능력의 합작품이었다는 것이다. 키슈는 6백만 명 각각의 입을 통해 서술되는 6백만 권의 ‘가족로망스’가 인류라는 ‘백과전서’에서 사라져 버린 것을 실감할 때 비로소 반유대주의의 악몽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다름 아닌 나와 내 아버지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