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 황순원 단편선』을 발간한 지 3일째 되던 날, 후배 한 명이 이메일을 보내 왔다. “언니, 이번 번역 작품 너무 좋더라!” 마침 심심한 토요일이었으니 그 문장부터 해석해봤다. 책의 내용이 좋다는 건지 내가 번역을 잘 했다는 건지 궁금하다. ‘이번’이란 말도 마음에 걸리네요. 그러면 이번 번역만 좋고 전에 번역했던 작품들은 좋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이렇게 의문을 품으면서도 일단 기분은 좋았다. 무엇보다 읽고 알아준 독자가 있어 보람을 느꼈다.
누군가 ‘작가는 자기가 쓴 작품을 자식처럼 사랑한다’고 했다. 비록 작가는 아니지만 나 역시 내 번역 작품을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적지 않은 노력과 애정을 준 자식들이지만 분명 어딘가에 부족한 부분과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편소설 각 편에 담겨있는 내용이라든지 예술적인 가치는 제대로 전달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알다시피 황순원의 창작 열정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전 생애에 걸친 작품 활동을 보면 그의 성실함과 열정을 알 수 있다. 1931년 시 「나의 꿈」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한 이래 시, 소설 양대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발표한 황순원은 12권짜리 방대한 분량의 『황순원 전집』을 내기도 했다.
권영민은 “소설가 황순원을 말한다는 것은 해방 이후 한국 소설가의 전부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용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험해왔고, 소설적 형상화가 가능한 모든 주제를 다루어왔다. 작가 황순원의 작품 세계를 하나의 특징을 들어 설명하기란 곤란하다”(『황순원과 산문문체의 미학』 권영민. 서강대학교출판부. 1997. P.132)고 평했다. 위의 말은 양적·질적으로 성과가 뛰어난 황순원의 문학을 한 두가지 특징으로 규정하기는 어렵고 보다 다각적으로 분석해야한다는 뜻이다. 이를 반증하듯 황순원 문학은 비평과 연구, 석박사 학위논문 등을 통해 비교적 다양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화 물결 속에 살았던 황순원이라는 작가와 그가 당면했던 현실은 그의 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부르주아 지식인으로서 체험하고 겪었던 일제시대, 해방, 한국전쟁 등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은 그의 문학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황순원의 문학을 한국문학과 요원한 베트남 독자들에게 소개할 욕심이 나기 시작한 것은 「소나기」, 「학」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였다. 비록 전집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의 단편소설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어린 시절 순수한 기억 속 ‘학’이 평화롭지만 전쟁의 흔적이 잠재하는 벌판 위를 날아가는 장면은 잊을 수가 없었다. 경계선에서 넘나들 수 없는 분단 상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학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작품 속에 그려지고 있는 우울함, 당황 그리고 침묵의 순간만으로도 「학」은 베트남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바로 황순원 문학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양의 작품들 중에 『학-황순원 단편선』에 포함될 작품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작품을 번역해야 황순원의 문학 특징과 작품의 가치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고 특히 베트남 일반 독자부터 까다로운 독자까지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야했다. 황순원 문학 작품 세계를 보면 순수하고 단순하면서도 깊다. 이러한 고민 끝에 선별한 작품들은 다행히 황순원의 아드님이신 황동규 시인에게 칭찬을 받았고 베트남 독자들 역시 잘 받아들였다.
『학-황순원 단편선』에 드러난 황순원의 작품세계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정(情)’이다. 소박하면서도 깊은 정은 황순원 작품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쟁에 대한 묘사이다. 전쟁은 황순원의 붓 아래에서 사납거나 격렬하진 않지만 글자 하나, 인물의 운명 하나, 각 작품 속 장면 하나에 스며들어 있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남북분단 등 역사적 사건들은 황순원의 작품 속에서 그만의 필체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황순원 단편선을 번역하기 이전에 역시 대산문화재단 지원을 받아 방현석의 『랍스터를 먹는 시간』 을 나의 첫 한국 문학번역 작품으로 출간했었다. 그 당시의 설레임과는 다르게 이번 『학-황순원 단편선』은 출간했을 때 스스로 많이 성숙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번역은 어려운 일이라 말하고 싶다.
문학의 언어는 독특하고 일상생활 문제부터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심리, 성어, 속담 등까지 표현해야 하는데 이는 바로 문학의 매력이면서 번역자의 고통이기도 하다. 문학은 언어예술이기에 한국어를 한다고 해서 한국문학을 번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문학작품을 번역할 때 괴로운 적이 많았다. 어려운 단어, 문장을 소화해내지 못하거나 적절한 베트남어를 생각해내지 못 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번역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작업이 끝나자 뭔가를 이루었다는 상쾌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산의 정상을 밟은 사람처럼 또 다른 작품에 대한 도전의식이 생겼다. 『학-황순원 단편선』, 내가 정복한 산꼭대기이며 나의 선택이었다.
감사의 말씀을 대신하여 이 노력을 늘 내 곁에 있어준 분들, 내가 선택한 길을 걷게 격려해주고 계신 분들에게 바치고 싶다.
※ 베트남어역 『학 - 황순원 단편선』은 재단의 해외 한국문학 연구지원을 받아 베트남문인협회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