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가득한 큰 정원 하나 있다 정원에는 빌라 한 채도 들어있으니 그것은 커다란 장미 한 송이
한 여자가 그 정원을 홀로 자주 거닐고 보리수 늘어선 한길로 내가 지나갈 때면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친다
그 여자는 메논교도 그녀의 장미나무에도 그녀의 옷에도 단추가 없다 내 저고리에도 단추 두 개가 모자란다 그 부인과 나는 거의 같은 전례를 따른다
황현산 선생님! 그간 안녕하신지요? 지난 5월, 저는 선생님의 강의를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진중하고 멋진 강의로 소문이 자자해 글 쓰는 친구들이 몰래 청강하러 가곤 한다는 그 강의, 꼭 한번 가야지 가야지하면서도 못 갔었는데요. 그날은 선생님의 고별 강의 시간이었지요. 저는 사람들로 꽉 찬 강의실 뒤쪽 창가에 벌 받는 애처럼 서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주에서 마련해간 장미 꽃다발을 안고. 빈 의자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그래야할 것 같았어요. 위의 시는 선생님께서 그 시간에 들려주신 마지막 시입니다. 아폴리네르가 젊었을 때 사랑했던 여인 애니 플래이든을 생각하고 쓴 시라고 하셨지요. 그는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자가 불행한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에 젖어 있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동일한 고통의 전례를 따르게 되겠지요. 이 세계를 사는 시인들도 ‘저고리에도 단추 두 개’가 모자라는 가난한 방랑자이자 고행자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초라하고 메마른 세계에서 ‘고통의 전례’를 따르도록 운명 지어진 우리들이겠지요.
2001년 겨울, 나남출판사 사무실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포에지』가 배출한 제1회 신인들을 축하하는 조촐한 자리였지요. 강남고속터미널에 내려 약도를 보며 찾아간 그곳에서 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선생님과 김혜순 선생님을 번갈아 바라봤습니다. 지상의 존재같지 않게 뿜어 나오던 신비한 기운. 같이 등단한 신영배 시인 옆에 앉아 저는 뭐라고 더듬거렸는지 생각나지 않네요. 이후로 『포에지』가 사라지고 저는 또 부모 잃은 고아처럼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열어주신 문 밖은 빙하같고 뇌우 속 벌판같아 때때로 원망도 했었지요. 다만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고별 강의를 마치고 늦은 시간, 시 쓰는 친구와 비평하는 친구들이 집에 가지 않자 선생님은 저희들을 데리고 작은 술집에 가셨지요. 우리는 이원 시인이 준비해온 나무 판자에 글씨를 썼어요.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한 마디. 매직으로 낙서처럼 한 줄로 비뚤비뚤. 함돈균 평론가는 ‘완전소중 황현산 선생님’이라고 쓴 것 같던데…… 제가 적은 문구는 읽어보셨나요? “김이듬 처음 봤을 때 완전 천방지축이라서, 이 친구가 문단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했었는데……” 선생님은 껄껄 웃으셨지요.
어제는 목욕 갔어요. 때 미는 일을 하는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물에 젖은 침대 같은 데 누웠어요. 민망하고 간지럽고 부끄럽고 미안한 이상한 기분. 팔을 다쳐 깁스를 했었는데 의사 말을 안 듣고 며칠 만에 집에서 멋대로 풀었다가 이만저만 생고생이 아니거든요. 팔이 안 돌아가요. 그 아주머니는 짙은 보라색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은 아주 훤칠하고 예쁜 사람이었어요. 어깨에 큰 흉터가 있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지요. 한때 국가대표 배구선수였대요. 태릉선수촌 이야기, 육영수 여사와 악수했을 때 너무 부드러운 손에 깜짝 놀랐던 이야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죽도록 한 연습과 어깨 부상, 어려웠던 수술 이야기까지. 무덤덤하게 들려주었어요. 저는 발가벗은 채 누워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시도 잘 못쓰고 문단생활이 뭔지 잘 모르고 자기 이야기도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앞으로 누구를 씻겨줄 수 있을지, 거리 청소부가 될지, 배우가 될지, 계속 시를 쓸 수 있을지 막막합니다.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날이 아직 오지 않았고, 영원히 오지 않는다 해도 이상한 슬픔과 함께 배구공처럼, 빨간 때수건처럼 굴러가고 튕기며 닳아갈 거예요. 그러니 선생님은 선생님에 의해 등단한 수많은 문인들―그들을 각각 고유한 존재로 인정하고 사랑하시지만―에게 그러시듯 저를 염려하지 마세요. 여기 시골 모퉁이에서 저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불행한 삶을 살지도 않고 행복에 젖기를 바라지도 않은 채.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퇴임을 다시 한 번 축하, 아니 안타까워하며 이만 줄입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2010년 여름날 김이듬 올림.
추신 : 보내주신 『알코올』 『발터 벤야민 선집 4』 잘 받았습니다. 올해 5월과 6월에 연이어 출간된 책들이네요. 그 바쁜 와중에도 어쩌면…… 앞으로는 시간 여유가 있으실 테니, 선생님의 아름다운 번역과 비평과 수많은 글들이 더욱 왕성하게 쏟아지겠지요. 그로 말미암아 저희는 늘 새롭게 밀고나가며 그 실천에 의해 어떤 깊이를 얻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