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여전히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황석영의 장편소설 『강남몽』과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꼽을 수 있다. 사실, 두 소설은 인터넷상에서 연재될 당시부터 베스트셀러를 예고했던 작품이었다. 이미 숱한 독자들의 안목을 거쳤을 것이므로 이 두 소설에 대해선 더 자세한 언급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지난 7월 하순 출간된 김영하의 신작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부터 시작해보자. 단편소설집으론 2004년 『오빠가 돌아왔다』 이후 6년 만에 출간한 이 소설집에서 김영하는 대부분 문예지에 실리지 않은 신작들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소설집의 제목은 수록작 「밀회」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옛사랑을 우연히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국 음식점에서 만난 주인공 남자가 1년에 한 차례씩 여자와의 만남을 이어나가는 줄거리를 하고 있는 소설은 곁가지로 여자의 남편 이야기를 들려준다. 독일로 이민을 떠나기 전 안양의 한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남편은 취미로 시작한 레슬링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를 더 좋아했다. 어느 날 제자와 스파링을 하다 남편은 학생의 기술에 걸려 허공으로 붕 떴다 매트 밖으로 떨어졌다.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며칠이 지나자 남편은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김영하는 “「밀회」에 나오는 이 문구가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라고 생각했다”며 “정보 유통이 급속도로 이뤄지는 첨단 정보사회에서 정작 연인 간에도, 부부 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오늘날 사회, 즉 ‘정보와 이해의 격차’를 상징한다”고 밝혔다. 소설집에 실린 수록작들은 이같은 ‘이해의 불가능성’을 여러 형태로 보여준다.
로봇과 ‘원 나잇 스탠드’를 하는 여자,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가수, 휘발유 냄새가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은 부부의 이야기 등 현실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작가는 태연히 펼쳐 보인다. 특히 김영하 특유의 현대적 감수성과 속도감이 돋보인다. 소설집에 실린 13편의 단편들은 형식에서도 매우 자유롭다. 두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중편에 가까운 분량의 작품도 있다. 1년 7개월간 외국에 머물다 지난해 말 귀국한 김영하는 9월쯤 『빛의 제국』 미국 출간에 맞춰 다시 뉴욕으로 건너가 1∼2년간 머물 예정이다.
김별아의 신작 장편 『가미가제 독고다이』도 주목할 만하다. 해학으로 한국 근대사의 비극을 버무려낸 소설은 일제하의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인물들을 결코 강건하거나 비장하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희극적 존재들로 하여금 비극을 증명케 한다.
소설은 3대에 걸친 이야기다. 구한말 백정의 집안에서 태어난 ‘쇠날이’는 신분에 걸맞잖게 ‘피를 보지 못하는’ 섬약한 총각이다. 그런 그가 백정마을의 ‘퀸카’라 할 수 있는 ‘올미’를 배필로 맞는다.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올미가 쇠날이를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양반 자제들이 저지른 처참한 능욕 사건이 관련돼 있다. 작가는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과정을 ‘필연’으로 펼쳐 보인다.
그러면서 묻는다. “당신은 운명을 믿는가? 나는 믿는다. 우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의 어처구니없고 생뚱맞고 기막힌 필연을 믿는다”고.
이 물음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화두다. 사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역사가 한 개인의 삶을 우롱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우연의 힘’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개개인의 삶이 좌지우지되는 마당에 운명을 믿지 않고서 버텨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우연적 필연’으로 맺어진 쇠날-올미 부부는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후대 혹은 후손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시’라는 이름의 아들은 ‘아비와 꼭 닮은 아들’이라는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로 전혀 아비 쇠날이를 닮지 않은 용모와 성격이었다. 이 아들이 벌이는 한바탕 인생 역정은 일제강점기를 부나방처럼 살았던 친일파들의 궤적을 잘 보여준다.
이밖에도 하성란의 장편 『A』, 주원규의 장편 『망루』, 하재영의 장편 『스캔들』, 최진영의 장편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유형수의 소설집 『스윙바이』, 황정은의 장편 『百의 그림자』, 조용호의 장편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이시백의 소설집 『갈보콩』, 우영창의 장편 『성자 셰익스피어』, 하아무의 소설집 『마우스 브리더』, 이명랑의 소설집 『어느 휴양지』 등도 지난 여름의 폭염을 무색케 한 작품들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8월 10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이탈리아 식당에선 문학동네 주최의 ‘제1회 젊은작가상’ 시상식이 열렸다. 이날 수상자는 대상에 김중혁을 비롯, 편혜영·이장욱·배명훈·김미월·정소현·김성중 등 7명. 단편 「1F/B1」로 대상을 수상한 김중혁은 “불혹의 나이에 ‘젊은작가상’을 타려니 쑥스럽다”며 “10년차에 쓴 작품으로 수상하니 마치 ‘젊은 작가’ 졸업장을 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역시 지난 2000년 등단한 편혜영도 “등단 10년째 소설로 수상하니 다시 시작하는 듯하다”며 “등단 12년차 선배가 자신은 자격이 안 된다며 부러워하더라”고 밝히기도 했다. 편혜영의 수상작은 「저녁의 구애」. 그의 예전 작품과는 사뭇 다른 색깔을 지닌 이 작품은 “읽고 난 후의 여운을 당분간 잊기 힘들 것”(신경숙)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사실 ‘젊은 작가들’의 눈부신 활약상은 지난 여름을 달군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배명훈은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안녕, 인공존재!」를 표제작으로 하는 소설집을 출간, 주목받았다. 표제작뿐 아니라 「누군가를 만났어」, 「크레인 크레인」 등 수록작들은 한결같이 존재와 본질의 문제를 파고드는 수작이었다.
8월 19일 오후 교보생명빌딩에서 열린 <낭독공감>을 통해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르타 뮐러와 일반 독자들이 만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교보문고와 대산문화재단이 문학동네와 함께 개최한 낭독공감에선 뮐러 자신이 작품의 일부를 원어로 직접 낭독하고 이어 독자와 일문일답을 주고받았다. 칩거 생활과 신문·방송과 인터뷰를 꺼리기로 유명한 뮐러와의 만남이라 특히 의미가 깊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