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판매원으로 보이는 두 아줌마가 거리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부러 엿들으려 한 게 아니라 목소리가 커서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다. 한 아줌마가 작은 소리로 뭐라고 하자 고참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큰 소리로 말했다. “보험 든 게 벌써 세 개나 있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거야, 영업이라는 거는.”
‘하면 된다’는 신념은 가난한 육칠십 년대에 ‘한강의 기적’을 낳았으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을 무너뜨리면서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래도 ‘하면 된다’는 여전히 우리의 의식을 휘어잡고 팔다리를 움직이게 하여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다. 요즘 경제 사정이 서민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니 우리 사회에서 이 신념의 위력은 앞으로도 상당할 것 같다. 두 사람의 대화가 낯설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걸 보면 나도 그 말에 꽤 길들여져 있나보다.
이런 태도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TV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자들이 말하려는 의욕은 넘치고 듣는 데는 소극적이어서 사회자가 날뛰는 말을 조정하느라 애를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자동차 접촉사고 시비 가리기식 대화를 보는 것 같다. 이런 대화에서 말은 듣는 귀와 관계없이 공격적으로 나가려고만 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자르거나 더 큰 소리로 제압하여 대화의 균형을 맞추려 한다. 귀는 없고 말만 있는 대화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데는 능숙하고 세련되지만 듣는 데는 서투르다는 생각이 든다. 할 말은 많은데 들을 여유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내보내야 할 말은 많고 말이 들어올 공간은 별로 없는 듯하다. 아무리 퍼내도 할 말은 계속 늘어나고 들을 말을 받아들일 공간은 비좁은 모양이다. 그래서 내보내야 할 말의 출구를 찾느라고 바쁘지만 상대방의 말이 들어올 문을 마련하는 데는 소홀하다. 받아들여 소화해야 할 정보는 넘쳐나는데 우리 몸에 그것을 처리할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출판되는 책은 늘었는데 판매되는 책은 오히려 줄었다고 한다. 말하려는 입은 늘어나고 들으려는 귀는 줄어드니 수요공급의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다. 몇 달 전에는 어떻게든 잘 팔리는 책으로 만들기 위해 사재기를 하여 베스트셀러 순위 조작을 했던 출판사들이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에 신고 당하기도 했다.
요즘은 시를 읽는 독자보다 시인이 더 많다고들 한다. 시를 써서 이름을 드러내는 데는 열심이면서 읽고 즐기는 데에는 관심이 적은 세태를 비웃는 우스갯소리이다. 대부분의 문예지는 적자이지만 쓰는 사람이 늘어나니까 그 수요를 채우기 위해 지면을 더 많이 공급해야 한다. 그래서 팔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문예지는 계속 창간된다. 그러니 잉여의 출판물을 내보내려면 야구에서 하는 스퀴즈번트나 밀어내기가 필요할 것이다. 문예지나 시집이 잘 팔리지 않는 이유가 문학과 독자와의 거리가 멀어서 또는 독자들이 갈수록 순수문학을 외면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입은 많고 귀는 적은 수요공급의 불균형이 더 큰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문학 작품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단편소설은 줄고 있고 장편소설은 늘고 있다. 시의 경우에도, 길이는 점점 늘어나고 연과 행의 여백은 줄어들고 압축과 절제의 미덕은 촌스러운 것이 되고 있으며 줄글로 된 산문시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귀가 귀해지니 어떻게든 말을 귀에 넣으려는 마케팅 기술과 귀를 유혹하려는 말의 기술은 더욱 세련되어진다. 책도 내용 못지않게 글자의 크기, 컬러, 표지 디자인 등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존칭의 과잉(웬만하면 ‘선생님’이나 ‘사모님’,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실수를 줄일 수 있다)과 장식의 과잉(필요한 한 마디 말을 하려면 열 마디의 윤활유가 필요하다)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말은 과거 어느 때보다 힘이 세지고 폭력적이 되었다. 신문, 방송, 휴대폰, 인터넷 등 말과 관련 있는 산업은 다른 어느 산업보다 성장이 빠르며, 갈수록 위력을 더해가고 있다. 삶의 양상이 복잡해지다보니 제 속에 말을 담고 있는 것보다 배출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말과 글과 정보가 너무 많아 듣는 일도 노동이 되었다. 그래도, 그래서, 말하기와 듣기의 균형을 이루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