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통과하기 시작할 무렵, 압구정동이나 대학로에서 데이트하던 남학생이 있었다. 부암동으로 이사 가기 전의 ‘클럽 에스프레소’ 지하에서 콤팩트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노라면, 『양을 둘러싼 모험』이나 『상실의 시대』를 손에 쥔 그가 문 안쪽으로 쓱 들어왔다.
우리는 당연히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오래지 않아 배가 고파지면 우동, 혹은 카레를 잘 만드는 식당이나 노바다야끼로 자리를 옮겨 하루키의 단편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같은 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언젠가 내가 우리나라 작가 A의 소설을 읽고 슬펐다고 말하자, 그는 그랬다. “그런 소설 구질구질하지 않니? 뭐랄까…… 좀 신파적이잖아.”
그와의 연애가 길지는 않았다. 그런 남자와의 연애가 오래갈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그 후로도 하루키의 소설이 번역될 때마다 놓치지 않고 따라 읽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소설만 읽었나? 수필집도, 기행문도 읽었다. 그때는 그런 날들이었다. 우리는 ‘민족’이나 ‘민주’가 아니라 ‘쿨(Cool)’을 종교로 신봉한 X세대, 바로 90년대가 낳은 아이들이었으니까.
지난해 가을 『1Q84』를 마주하기 전 마지막으로 읽었던 하루키의 책은 『어둠의 저편』이었다. 소설이 그다지 나쁜 건 아니었다. 단지 서른이 넘으면서부터 의식적으로 그를 멀리하려 노력했을 뿐. 한 작가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는 건 권할 만한 일이 아니라 믿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같은 규격의 초록색 하이네켄 캔 같은 ‘브랜드 하루키’에 조금 물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대로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하루키를 읽고 있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첫사랑의 전화를 받고 만나러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 가정주부처럼 뜸을 들이다 『1Q84』의 첫 장을 열었다. 몇 해 전에 옴 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사건을 취재한 하루키의 르포집 『언더그라운드』를 일독하면서, ‘다음 소설엔 혹시 독가스를 내뿜는 사나이가 등장하려나?’ 하는 상상을 한 적도 있으니 실은 출간이 되자마자 읽었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주저한 건 일종의 애증인지 뭔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수도고속도로의 ‘토끼굴’로 빠져 들어간 흥미진진한 이야기, 섬세한 문체, 미스테리한 구성. 아, 역시 하루키상이야. 그는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샤프한 인상에 유혹적인 말발을 날리는 옛 애인 같았다.
덴고와 아오마메를 좇는 중 달이 뜨자 작업실 베란다 창 밖을 한번 내다보았고, 출출한 속을 채우기 위해 냉장고에서 테이블 워터 크래커와 비교적 신선한 오렌지주스를 꺼내 먹었다. 커피콩을 갈아 커피를 내리거나 화이트와인 한 잔 곁들여야 할 것 같다는 강한 압박을 느꼈지만, 포기했다. 코르크마개 딸 시간도 아까울 만큼 재밌었다는 얘기이다.
『1Q84』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건 자정을 훨씬 넘겼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 수화기를 들면 고마쓰 씨가 다짜고짜 “어때? 좋았어?” 하고 물을 것 같은 밤이었다. “고마쓰 씨, 하늘엔 달이 두 개이고 죽은 양의 입에서 리틀피플이 빠져나오는 1Q84의 세계로군요. 그런데 어째서 나는 낯설지 않은 걸까요?”
“뭐야, 입금한 금액이 부족하다는 거야? 내일 아침부턴 속편을 써야할 테니 우선 잠부터 자 두라고.”
고마쓰 씨는 역시 불친절하게 전화를 툭 끊어버리는군. 무슨 까닭에 옛 남자는, 아니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월이 흘러도 이토록 변하지 않는 걸까.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기도 하고, 한편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는 걸까.
하루키의 남자/여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좀처럼 변질되지 않는다. 그들은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여자아이를 잠시 만났다 헤어져버린 뒤, 재회하지 못해 고독한 어른이다. 하지만 고독하다고 해서 특별히 불편한 건 아니다. 그들은 성실한 시민이고 은행에 모아둔 얼마간의 돈도 있다. 그들은 종종 조건 없이 쿨하지만 섹스를 나눌 때만은 다정하고, 잠언을 주고받을 수준이 되는 섹스파트너를 만난다. 지인의 실종과 곧이어 등장하는 양복 입은 협박 덩치도 이쯤 되면 반가워서 손을 흔들어주고 싶다. 그는 면 셔츠와 치노바지 정도의 소박한 옷차림을 하지만, 만나는 사람의 옷에는 극히 예민하다(작가 하루키는 플레어스커트와 H라인스커트쯤 척척 구분하고, 팬티스타킹을 혐오한다). 그들은 식탐이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 질 좋은 신선한 재료로 조리한 가벼운 음식을 먹는다. 담담한 말투로 “죽음은 삶의 대극적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1)”를 지껄이다 가슴 크기, 음모를 입에 올려도 뺨을 맞지는 않을 거다. 맥주 맛도 모르면서 폭탄주나 마시자고 타인에게 엉겨 붙고 TV에 붙어사는 수다스런 푼수들은 다 꺼져! 여긴 이와이 월드보다 더 담백한 하루키의 원더랜드라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 등 그의 세계를 지나온 내게 『1Q84』의 세계는 여전히 아름다우나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1Q84』는 그간 그가 집착해온 고민과 장기를 다 그러모은 일생일대의 야심작으로 보인다. 그래, 좋다. 하루키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이렇게 하드보일드한 관념의 세계를 원더랜드에 펼쳐 보일 것인가? 그가 달라지기를 원하는지 아닌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세계는 한 명의 작가가 아닌 다수의 작가를 필요로 하는지도. 이 여름이 지날 때쯤이면 나는 공백으로 남아있는 1Q84년 10월에서 12월까지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과연 1Q84년의 종말은 어떻게 도래할 것인가. 누구든 하루키를 안다면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페이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공항에 도착한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공중전화를 거는 장면을.
“덴고.” 아오마메는 이미 그의 이름을 불렀고, 이제는 덴고가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두 사람이 재회하기를 너무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왔다.
2009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창비 소설 2 1Q84 1권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소설 3 매일 읽는 긍정의 한 줄 린다 피콘 책이있는풍경 자기계발 4 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푸른숲 비소설 5 4개의 통장 고경호 다산북스 경제경영 6 세상에 너를 소리쳐 빅뱅 쌤앤파커스 비소설 7 해커스 토익 Reading 데이비드 조 해커스어학연구소 어학 8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장영희 샘터사 비소설 9 넛지 리처드 탈러 리더스북 자기계발 10 신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소설 11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자기계발 12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오픈하우스 비소설 13 ENGLISH RESTART BASIC I.A. RICHARDS 뉴런 어학 14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헤르메스미디어 비소설 15 해커스 토익스타트 Reading 데이비드 조 해커스어학연구소 어학 16 해커스 뉴토익 보카 데이비드 조 해커스어학연구소 어학 17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문선명 김영사 비소설 18 도가니 공지영 창비 소설 19 해커스 토익 Listening 데이비드 조 해커스어학연구소 어학 20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레 소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