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용 시인은 1922년에 태어나서 2001년 타계했다. 이 가상 인터뷰는 시와 문학에 대한 김구용 시인의 생각들을 그의 『일기』 (솔 출판사, 2000)나 산문집 『인연』 (솔 출판사, 2000) 등을 참조로 하여 대화의 형식을 빌려 구성한 것이다. 내 생각으로 모든 걸 덮어버리기보다 될 수 있는 대로 육성을 그대로 전하고 싶어 중요한 부분은 원문 그대로 인용하고 인용한 페이지를 밝혀 놓았다. 가상인터뷰를 통해 가능한 한 그의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보려 시도는 하였으나, 그보다는 워낙 깊고 도저한 그의 문학 세계를 마음껏 오독한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이수명 선생님, ‘존경할 줄 알아야 배우’는 것(『일기』, P.84)이라는 선생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문맥에서는 ‘남에게 글을 배우는 것을 무슨 수치로 알고 있다’(『일기』, P.78)고 하십니다. 배움은 혼자 이루는 걸까요? 배움이 아니라 존경이라는 것, 배움을 통해 존경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존경을 통해 배움에 이른다는 말씀이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김구용 젊었을 때 동학사에서 10년 정도 책에 파묻혀 지냈을 때를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존경은 타자와의 핵심적인 정신의 연계를 가능하게 하는 소로이지요. 배움은 이 연계를 완성하기보다는 지연시킨다고나 할까. 배움은 뭔가를 부지런히 찾는 것이지요. 하지만 ‘찾기에 앞서 잃어야만 할 상황에 묶여 있’(『일기』, P.367)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배워야 한다면 그건 아마 존경의 능력일 겁니다.
이수명 동학사 시절을 말씀하시니까 여쭙겠습니다. 기록을 보면 선생님께서는 젊으셨을 때 읽으셨던 책들을 평생 가까이 하셨음을 알 수 있는데요. 동학사에서 가까이 하셨던 동서양의 정전이나 종교 경전, 특히 불교 경전이 선생님의 문학 세계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 추측해 보곤 합니다. 또 선생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절에 많이 계시기도 했고 가족이나 주변의 친지분들이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선생님의 이런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는 선생님의 문학에 강력한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입니다. 경전이나 선학들에 대한 선생님의 존경에는 뭔가 시적인 이반, 존경으로 도달해 있지만 내부적으로 문학적 함몰의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쪽입니다. ‘시에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일기』, P.546)는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구용 태어나면서부터 절을 들락거리고 어머님이나 고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불교 경전을 품에 넣어 드릴 만큼 불교는 나와 내 가족에 자연스러운 환경이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인생을 제외하고 종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닐’(『일기』, P.731) 겁니다. ‘부처님은 분명 석가라는 사람이었’고 ‘불경은 그가 이룬 예술이며 인생이며 세계였’지요. ‘그 세계에서 궁금했던 것, 미처 몰랐던 것, 상상도 못했던 것을 듣고 보았다’(『일기』, P.85)고 할 수 있어요. 결국 종교란 인생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 되지요. 요컨대 ‘불교가 바로 인생이라 해도 별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어서, ‘불교는 종교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나는 짐작해 왔’(『일기』, P.731)어요. 불교는 인생보다 크지 않으며 인생의 문도 아니고, 길도 아니지요. 또 문이 있고 길이 있다 해도 ‘문에서부터 길은 달아나’(『일기』, P.540)기 마련 아닐까요. ‘시에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마도 시가 거리가 없다는 것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초에 ‘시 정신은 그 전체를 제시할 수 없는 무한에 내포되어 있’(『인연』, P.41)는 것이기에, 이 본능적 구성에 대한 감각적, 이념적 조응으로서 거리나 이반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로 인해, 혹은 ‘거리’를 상상함으로써 시는 자각된다는 것이겠지요.
이수명 그렇다면 시라는 것은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무한에의 인식 과정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것이 작은 꽃 한 송이, 짧은 한 순간의 빗줄기의 경우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직선을 그을 수 있는 무한’(『일기』, P.203)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현실태로서의 직선을 통해 무한이 가능해지는 것일까요?
김구용 직선을 긋는다는 것은 직선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직선은 그 자체로 개체이며 전체입니다. 직선이 전체일 때 무한 역시 전체가 되겠지요. 존재하는 것들은 직선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무한에서 무한성을 찾을 수는 없’으며, ‘차라리 생, 로, 병, 사에서 무한을 보아야 하’(『일기』, P.105)지요. ‘무한은 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한은 개체, 개별의 회오리를 통해, 망각되지 않고 얼굴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수명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물질적 언어를 가지고 이루어지기에, 무한을 인식으로 표면화시킬 수 없다는 점에 애초에 시의 불가능이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이시켜야 하는 것이 시의 숙명이라 생각도 해 봅니다. 시이기 때문에 이 불가능을 넘어 움직이는 것이겠지요.
김구용 모든 인식이라는 것은 결국 방향이 아닐까 해요. 언제 어디서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방향을 탐지하는 것이지, 최종 목적이라는 것은 설령 있다 해도 부차적이기 마련이지요. 문제는 방향이라는 게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분석의 요설은 방향감각을 잃은 느낌’(『일기』, P.642)의 후발적 문맥화라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방향으로서의 인식은 분석되지 않으며, 인식되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차단을 떠안고 움직이기 마련이에요. 시는 이 역설을 스스로 강화하는 것이지요. 최대의 각도로 벌려진 의식의 자기 부정, 나아가 자기 방목으로 위태로워지는 것, 이것이 시라 할 수 있어요. 시에서 의식은 질주하지만 이것은 끈을 놓치는 데 이르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입니다. 의식이란 알려고 하는 것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아는 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이중성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지요.
이수명 의식의 끈을 놓치는 곳은 어디일까요? 저는 시란 부딪쳐 버린 어떤 것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부딪쳤을 때에야 놓치게 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김구용 우리는 시로 이를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언제든 시로 놓치게 되는 것만 있을 따름입니다. 시는 나를 놓치게 하지요. ‘나는 거의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내가 없’(『일기』, P.254)어요. 우리는 사태를 관장하지 못해요. 우리는 정확해지려 하지만 오히려 ‘정확성은 모두를 염려하’(『일기』, P.86)지요.
이수명 선생님께서 ‘중요한 문제는 막연한 데에 있다’(『일기』, P.559)고 하실 때 저는 대립을 떠올렸습니다. 대립은 정확해지려는 것이지만 실은 막연하게 만들기 때문인데요. 대립을 소비시킴으로 해서 놓치도록 유도되는 것이 가장 기술적인 방식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막연한 본질에 초점을 맞추기란 어려운 일이’(『일기』, P.559)니까요.
김구용 막연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 비교적 정확할 수가 있’(『일기』, P.490)어요. 대립의 패턴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인식론적으로 ‘대립에 염증이 났을 경우에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일기』, P.105) 하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또 염증을 유발하면 다시 대립에 불과하’(『일기』, P.105)지요. 그러므로 대립보다는 모순을 떠올려 봅니다. ‘모순은 생각하게 할 것이며, 고통은 새로운 방법을 찾을 것’ 입니다. 그리고 결국 ‘어떤 방법이건 간에 과오의 씨로서 성장할 것’(『일기』, P.191)임을 알 수 있어요. 애초에, 과오로 출발하는 거지요. 과오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장이겠지요. 이것을 막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오를 진실이라는 확정성으로 돌려놓으려 할수록 존재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니까요. 여기서 잠시 눈을 들어 대립이니 모순이나 하는 것을 비껴서 우리는 아마 본원적으로 미지에 유혹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미지만큼 강력한 것이 없는데, 그 이유는 미지가 명확하기 때문이지요. 시가 매혹적이라면 그것은 ‘미지의 명확성과 엄연한 작용이 제시되어야’(『일기』, P.550)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마도 우리는 이미 미지 그 자체이지요. ‘자신의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 (『일기』, P.541)라고 할 수 있어요.
이수명 그 미지의 숲 속에서 가장 개인적인 의미로 시는 어떤 것일까요. 힘겨운 겨루기를 할 때의 선생님 모습을 잠깐 스케치해 주실 수 있으세요? 김구용 문학에는 대답이 없어요. 단지 대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문학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나는 ‘문학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기보다는 주저하는 편이었’(『일기』, P.761)다고나 할까. 문학이 직정적 노력에 의해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어떤 정체불명을 향한 모험의 과오를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어요. 따라서 ‘내게 있어 시는 권태며 피로며 변덕이며 분열’(『인연』, P.423)이라 할 수 있어요. 나는 이것들을 이겨내려 하지 않아요. 이것들과 공모한다고나 할까. 크게 보아 ‘나의 시작 방법은 도달이 아니고 비록 그것이 지지(遲遲)할지라도 항상 진행할 수 있는 불만과 여백에 있다’(『인연』, P.426)고 할 수 있겠네요. 피로나 불만 같은 것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문학의 대축척 지도를 이루게 되지요.
이수명 개인적인 주저와 불만을 통해 시가 타락할 수도 있을까요?
김구용 ‘예술의 힘은 거짓에 있’(『일기』, P.487)어요. 그것은 진실의 회로를 통해 작동되지 않지요. 하지만 거짓으로 포괄되는 온갖 개인적인 비상사태들이 들끓음에도, ‘시는 타락할 길마저 없다’(『일기』, P.673)는 것이 시의 묘미라 할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시가 개인의 타락 위에 서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며 한마디로 그 타락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냥 함께 존재할 뿐입니다. 예술은 불을 끄려 하지 않아요. ‘예술의 힘은 불에 얼음을 박아 넣는 지극한 경지’(『일기』, P.678)라 할 수 있는데, 이때 얼음은 불을 끄지도, 자신이 불 속에서 녹지도 않지요. 불과 얼음 중에 어떤 것이 거짓이고 어떤 것이 진실일까요. 어떤 것이 타락이고 어떤 것이 구원일까요. 예술에게로 오면 타락조차 스스로 선명해지고 빛나게 되어 더 이상의 가치론을 무력화시키지요.
이수명 선생님, 이제 이야기를 선생님 작품에 대한 것으로 잠깐 돌려볼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무능한 공격적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선생님 작품에 대한 소위 난해성, 난삽성 운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현대문학의 난해성과 관련지어 말씀해 주세요. 김구용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보다 난해한 것은 없다는 정신적 체험을 안다면 독자는 현대문학에서 많은 흥미를 느낄 것’(『인연』, P.396)이라 생각해요. 난해하다는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사실은 사람들이 이미 현실의 난해함에 익숙하기 때문이지요. 표현을 좀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가시(可視)의 세계와 가사(可思)의 세계는 항상 그 극한을 전개’(『인연』, P.397)하는 것이라고. 현대 문학이 난해하다는 것은 불가능하게도 그 극한의 전개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극한이라는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은 아니지만요. 극한은 극지가 아니라 극도이겠지요. 이 극한을 표현하는 데 현대문학이 낡은 수사를 동원할 수는 없겠지요. 사실 ‘문장은 친절할수록 생각과 빗나가’(『일기』, P.506)게 마련이니까요.
이수명 현대문학의 어려움이라는 것을 말할 때 문학 내부적으로 더 정치한 접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현대시는 읽기 어려운 것이며, 또 쓰기 어려울까요.
김구용 짐작하겠지만 ‘예술은 예술을 반역하는 것’(『인연』, P.398)입니다. 극한이라는 것은 이러한 양상으로 나타나기가 다반사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반역을 제대로 완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예술가들은 ‘급히 서둘렀으나 실패하’고 또 ‘정지하였으나 실패’(『인연』, P.398)하지 않겠습니까? 반역은 대개가 실패로 돌아가기 마련이고, 따라서 예술은 실패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이 불가항력의 운명이 예술을 점점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반역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뜨거운 접점이 예술에는 있어요. 이 때문에 예술은 결국 아무 것도 넘어설 수 없으며, 뒤틀리게 되지요. 예술은 진화할 수 없어요. 더 지혜로워지지도 않으며, 더 모순에 가득 차게 되지요. 예술은 이해할 수 없는 자기 분열의 현시입니다. 일례로 현대문학이 침몰해 가는 배와 같다고 생각했을 때, 하지만 ‘만일 배도 엎어지기 전에 수중으로 뛰어드는 격’(『인연』, P.380)이 된다면 우리는 이 분열증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까요? 예술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다양한 준동을 몇 가지의 자세로 설명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수명 현대시가 이러한 어려움들을 가지고 어떻게 진전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현대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쓰기도 어렵고 읽기도 어려운데, 어떤 사람들에게 시는 지속적으로 의미가 있는 걸까요. 대형 서점에서 시 코너가 사라져 가는 형국을 보면 시의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비가시화되어 가는 분위기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눈앞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의 자리가 없더라도 시는 인간의 위상의 유의미한 지표일 수 있을까요?
김구용 ‘시는 자유일 수 있는 정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인연』, P.439)입니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고자 한다면 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의 자리가 위축되고 시가 상실되는 것 같은 최근의 상황을 시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상실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과는 다르’며 ‘이제야 정신은 자유를 돌아보는 것’(『인연』, P.440)이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오히려 ‘시가 없다는 현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시적 밑천을 확보하고 있는 듯’(『인연』, P.369)합니다. ‘시는 다수의 이목을 끌지는 못하나 그만큼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인연』, P.369)할 수 있어요. 이목 여부와 관계없이, 혹은 이목을 받지 못하기에 시는 자력을 키워 나가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자유가 강력한 만큼 강력해지지요. ‘시는 어둠에서도 빛나고 있’(『인연』, P.369)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수명 선생님께서는 동학사에서의 청년 시절에서부터 이후 평생을, 한학이나 종교에의 애정과 더불어 학문과 창작의 길로서 오직 문학에 정진해 오셨는데요. 그 오랜 시간 선생님의 문학을 살아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요? 마지막으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시 정신의 최전선에 존재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궁금합니다.
김구용 ‘시는 독자를 위한 생산품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자아에의 집중이며 극복인 것’(『인연』, P.429)입니다. 여기서 집중과 극복의 대상으로서 자아란 무엇일까요. 내가 어딘가에 메모한 것을 인용하지요. ‘시간은 과거가 없었다. 시간은 미래가 없었다. 시간은 진리라든가 1초, 1초의 변화가 바로 영원 그것이라든가 이런 주장은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온 과거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앞날은 아직 시간이 아니었다. 언제나 내 자신이 시간이었다.’(『일기』, P.568) 내 자신이 시간이라는 말은 내 자신이 항상 그 자체로 현존한다는 것이지요. 과거나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자아는 지금, 바로 여기서의 시간으로 존재합니다. 자아가 있기에 시간이 있고, 텅 빈 시간이 움직이겠지요. 또한 바로 그 시간을 찢고, 시간의 틈을 만드는 것도 자아이겠지요. 이 세계의 상처난 시간이 바로 자아인 것이며, 자아는 빠져나갈 수 없는 현재이지요.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 문학이고 시입니다. 자아는 살아 있기에 부유(浮游)합니다. 분별과 가치가 덧씌워지기 이전의 것이지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구조화되지 않는, 표류하는 현재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부동(浮動)하는 자기 위치의 설정, 즉 극난(極難)한 시 정신의 탐구에서 (이제 문학의) 방법론은 자연발생적으로 동시에 요청된다’(『인연』, 429)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 탐색은 바로 문학의 방법론적인 탐색으로 불가피하게 전개되어 나가겠지요. 아마도 이 과정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