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우리는 ‘책을 본다’고 할 때 보통 혼자서 다소곳이 서재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는’ 모습을 연상한다. 그러나 1,000여년 전 중국의 소설은 지금 우리가 아는 소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서사문학이나 중세 유럽의 로망스(romance), 중세 일본의 조루리(じょうるり)처럼, 당시에 인기를 모으던 소설인 ‘설화’는 청중에게 말 그대로 ‘이야기(story)를 들려주는(telling)’ 구술문화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떠들썩한 저잣거리에서 이야기꾼이 화려한 말솜씨와 현란한 몸짓, 과장된 음조로 책 속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자리를 채운 청중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열광하고 환호하였다. 독특한 연행방식과 통속적인 스토리를 무기로 한 이 떠들썩한 소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상업경제가 활성화되고 시민계층이 성장하던 송나라 때부터였다.

송나라에서는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 연극·인형극·서커스·설화 같은 다양한 공연예술이 선보여졌는데, 특히 설화의 경우 당시 수도였던 항주만 해도 100명이 넘는 이야기꾼이 활동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설화’의 청중은 많은 경우 도시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는 소시민들로서, 저잣거리에서 듣는 이야기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거나 도덕적 감화를 기대하는 그런 고상한 소비자들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야기꾼의 입장에서도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악기를 반주하면서 과장된 어조로 관용구·정형구·미사여구를 장황하게 반복하거나, 화자의 목소리로 대사와 노래를 엇섞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스토리를 얼마나 치밀하게 구성할 것인가, 청중에게 어떠한 교훈을 줄 것인가 하는 고민보다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기 위해 얼마나 다양하고 현란한 기법을 구사할 것인가에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 마련이었다. 『경본통속소설』은 바로 이야기꾼들이 공연을 목적으로 비장해 오던 이야기 대본 ― ‘화본(話本)’을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근대의 장서가 무전손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된 『경본통속소설』은 「연옥관음」「보살만」「서산일굴귀」「지성장주관」「요상공」「착참최녕」「풍옥매단원」 등 당시를 배경으로 한 각자 독립된 일곱 편의 기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부 내용에서 위작 시비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송원대에 지어졌으며, 중국에서 구술문화가 문자문화로 이행되는 양상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기존의 문학 전통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전에는 문인들의 영향으로 난해한 문언체로 점철되던 중국 소설의 문체가 이 책의 출현을 계기로 소시민들도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하고 통속적인 구어체(백화)로 전환되었다. 또, 청중의 이목을 끌기 위해 서두에 시가나 짧은 콩트를 배치하는가 하면, 주요한 인물이나 대목에 이르면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노래나 시가를 삽입해 관련 내용을 부연하는 등 청중의 이해를 돕는 다채로운 서사적 장치들을 시도함으로써 후대에 중국 소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끝으로, 왕후장상·영웅호걸·재자가인들만 넘쳐나던 기존의 소설들과는 달리 옥쟁이·점원·장사꾼·선비·서당 훈장·하녀 등,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특징들은 ‘설화’라는 서사예술이 문인이나 사대부 같은 특권층만을 위한 여흥문학이 아니라 애초부터 서민 대중에게 눈높이를 맞춘 오락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야기꾼이 열연을 펼치는 당시의 공연 현장의 열기를 그저 문자로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이 책 속의 서사구조나 어투가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상한 독서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잠시 접어두고, 흥분과 열기가 어우러져 흥청거리는 1,000여 년 전의 이야기 판과 이야기꾼의 모습들을 떠올리면서 이 책을 즐긴다면 책 속 이야기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책을 읽지 말고 느껴보자. 내가 열연을 펼치는 이야기꾼이 된 듯, 내가 열광하는 청중이 된 듯 온 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