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글|구순모_서산 구본웅의 삼남. 1945년생
구본웅_서양화가. 1906~1953년
호 서산(西山). 서울 출생. 1929년 니혼대학 미술과, 1934년 다이헤이요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주로 도쿄에서 열린 이과전(二科展)과 독립전(獨立展) 등 전위적인 전람회에 출품하고, 귀국 후에는 서화협회(書畵協會) 전람회에 출품하였다. 1938년 미술지 ≪청색지≫를 발간하는 한편 정판사(精版社)를 경영하였고, 1952년 서울신문 촉탁으로 언론계에도 종사하였다.

편집자 주_ 이상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화가 구본웅이다. 구본웅은 세 살 때 사고로 불구가 되어 몸이 쇠약했기 때문에 소학교에 늦게 들어가 함께 입학한 연하의 이상과 친구가 되었다. 경신보고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그림에 입문한 구본웅은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이상과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이상이 연이은 사업 실패로 힘든 시절엔 아버지가 경영하던 출판사 창문사에 취직을 시켜주었고, 1936년에는 이상이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도쿄에 갈 수 있게 도왔으며, 이상이 운영하던 '제비' 다방이 파산하여 봉쇄되기 직전 '선전(鮮展)'에서 입선한 이상의 십 호짜리 「자화상」을 떼어내 자기 화실로 옮겨 보관한 이도 구본웅이었다. 올해 이상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구본웅의 삼남으로부터 구본웅과 이상에 대한 기억을 들어본다.

▲ 구순모 © 운영자

이번에도 나의 아버지 구본웅과 시인 이상의 관계에 대한 원고를 청탁 받았다. 아마도 시인 이상의 생애 100주년을 기념하려는 의도였으리라 짐작한다.

나의 아버지 구본웅은 시인 이상과 친교의 관계를 가졌던 예술가이면서 경제적 지원자였지만 동시에 불구의 부잣집 외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니 구본웅이라는 화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것은 화가 구본웅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아니라 시인 이상의 기인적 요소를 극화하는 데 나름 보탬이 될 만하다는 기대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그동안 우리 일가가 이런 청탁에 응하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한 예술가를 올곧게 바라보지 않고 필요한 대로 극화시켜 가며 꾸미고 보태어 이른바 해석이라는 말로 조악한 재구성을 시도할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왜곡될 것을 우려만 한 채 지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전하기는 전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마침 한국 근대문학을 전공한 학자인 일가 한 분이 이번 청탁을 전해 오셨다. 부담이기도 했지만 꼭 한 번은 있어야 할 기회이기도 했다. 사실에 대한 정리와 전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어쩌면 이미 적절한 시점은 지났다. 오히려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시점이 늦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시절을 실제로 살면서 기억하는 분이 더 이상 계시지 않기 때문이고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건 그분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내가 아니면 그나마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실 나는 아버지 구본웅에 대해 사진을 보듯 명백한 사실을 전할 형편이 아니다. 내가 직접 본 것을 말할 수 있기에는 함께 했던 시간이 결코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버지와 시인 이상의 관계에 대해서 말할 만한 것은 더더욱 없다. 다만 내 아버지 구본웅에 대해서 그리고 아버지와 시인 이상의 관계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분들은 그 시절 그 모습에 대해 늘 말씀해 주셨다. 그렇지만 그 분들도 이제는 모두 돌아가셨다. 그나마 그분들을 잘 알고 그분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 사람이 나 뿐이니 지금이라도 내가 들은 바를 정리하는 것이 사실에 가장 가까운 내용이 될 듯하다. 아무튼 지금 이 글에 임하는 나의 입장과 마음은 이러하다. 내 기억과 들은 바를 가급적 소상히 말하되 사실이 확인된 내용을 중심으로 말할 것이다. 그리고 잘 알지 못하는 시인 이상에 대해서보다는 내 아버지 구본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 구본웅 화가가 그린 이상, 「친구의 초상」(60X50cm, 1935)

아버지 구본웅의 자취에 대해 그리고 아버지와 시인 이상의 관계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 주신 분들을 먼저 밝히는 편이 낫겠다. 이 글의 사실성 문제도 그렇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도 한결 보탬이 될 듯하다.

우선 할아버지가 계시다.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인쇄소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을 인쇄한 바 있던 창문사(創文社)를 한동안 운영하셨고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을 지내신 분이시다. 자신의 외동아들이었던 내 아버지에 대해 가장 잘 아시고 아끼셨던 분이지만 언제나 정도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않으시고 분명하고 정갈하게 생활하셨던 분이다.

할머니도 마찬가지셨다. 아버지의 생모는 아니셨지만 우리들에게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단아한 모습과 기품을 놓지 않으신 분이시다. 손주들에게는 하염없이 애정을 쏟아 부으시면서도 언제나 말씀을 가려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이상과 결혼했던 친동생 변동림 할머니를 이상과 결혼 전, 그리고 이상과 사별 후 독신기간에도 집에 데리고 있었으나 그들 부부에 관해서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큰 살림을 도맡아 하시면서 바깥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대하여 별로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 아버지를 많이 기억하고 있던 분은 아버지의 사촌누님이신 구숙자 여사이다. 우리는 늘 그 분을 맹교장댁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부군께서 오랫동안 교장 직을 수행하셨던 까닭이다.

이분들과는 달리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던 분은 큰 형님이다. 남자 형제 셋 중 첫째인 장형은 수년 전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와 아버지의 지근에 있던 시인 이상에 대해서 많은 기억을 말씀 하셨다. 기자 출신인지라 매사에 빠짐없이 이야기하는 성품이었다. 그리고 어릴 때 아버지와 지내던 중구 다동, 종로1가동과 소공동 등지의 자취를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해주곤 하였다. 그 시절의 골목길을 함께 다니며 어린 시절의 잔흔과 애틋함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지난 이야기였지만 그 숨은 의미조차 정확하게 마무리해 주었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이분들 외에도 우리 형제들과 아버지를 잘 아시는 인척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지근의 여러분으로부터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서로 맞물리고 얽히면서 커다란 지도처럼 내 앞에 펼쳐지곤 했다.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정리하기로 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아버지의 유년시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태어날 당시 우리 집은 몰락한 양반가로 살림조차 어려워 서울의 살림을 접고 능성 구씨 집성촌인 황해도 연백군 벽란도로 들어갔다고 한다. 예성강을 경계로 개성과 마주하고 있던 그곳에서 인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1년여를 살았다.

이때 아버지를 낳으신 할머니께서 이미 돌아가셨던 터라 세 살이었던 아버지는 새로 들어오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때문에 아버지는 모유 대신 미음을 먹기도 하고 주변의 일가들로부터 젖을 얻어먹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아버지를 치료하며 보살피기에 그곳은 여러 가지로 미흡했다. 치료를 위해 다시 서울로 돌아 와야 했다.

서울에 돌아와 살면서 생활은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은 고칠 수가 없었다. 외아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던 할아버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면서도 할아버지는 꼽추가 된 아들의 희망대로 그림 그리기를 허용하셨다. 할아버지는 4형제 중에서 셋째이시다. 큰할아버지께서는 군수로 계셨으며, 둘째 할아버지는 대한제국 최초의 관비 유학생으로, 셋째이신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자비로 각각 일본 유학을 하셨으며, 넷째께서는 미국에서 유학을 하셨고 YMCA 총무로 일하셨다. 아버지가 그림 공부를 시작한 것도 넷째 할아버지가 YMCA에 계실 때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아버지의 말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 자식인 내가 아버지에 대하여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이 남들에게는 이상한 일이겠지만 실제로 나는 아버지와 한 번도 함께 살아보지 못하였다. 나는 1945년에 태어났으며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아버지는 서모 댁에서 지내셨다. 1944년 초까지 서울 다동 72번지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1944년 이후 수원으로 소개(공습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주민을 분산시킴)를 가서 살았다. 이 때 아버지는 용인군 기흥읍 구갈리로 소개를 가셨다. 그리고 내가 철이 들 때쯤인 1953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6·25 전쟁 직전에 수원 집에서 목수를 시켜 그림 액자를 짜시던 모습뿐이다. 1950년 4월 중순쯤 선명한 옥색 명주한복을 입고 계셨던 그 장면만이 내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던 처지라 그 무렵에도 아버지라고 살갑게 불러 보지 못했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그렇게 늘 여기저기 흩어져 지냈다. 나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는 제사를 지내는 수원 본가에 있었고, 형들은 학교를 다니느라 할아버지께서 서울에 다니실 때 쓰시는 서울 누하동 집에서 지냈다. 아버지는 그 무렵 따로 용산구 신창동에서 지내셨다. 그러다가 6·25 직후에 중구 인현동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인현동에 계시던 아버지는 급성 폐렴으로 돌아가시기 직전에 누하동으로 옮기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작은형이 지켜보는 데서 돌아가셨다. 이때는 서울 수복 전이라 큰형과 어머니도 임종을 보지 못하였다. 임종을 지낸 후 큰형만이 군복으로 위장한 채 집안 아저씨의 군용 지프로 미군 헌병을 속여 가며 겨우 장례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장형도 이후 수원으로 내려오지 않고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니 나로서는 아버지에 대해 살가운 기억도 임종에 대한 기억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릴 적 친구들이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나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자랐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손자들을 앉혀 놓고 자상하게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그래서 가끔 할아버지에게 아버지에 대해서 여쭙곤 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께서는 별다른 말없이 묵직한 손으로 품어 주시곤 했다.

세 번째로는 아버지 구본웅과 시인 이상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그 두 분의 관계에 대해 보거나 경험한 것이 없다. 다만 그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르신들의 말 속에서 분명한 몇 가지를 확인할 수는 있었다.
시인 이상의 부인인 변동림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의 친동생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이모이기도 했고 동시에 나이 어린 친구의 처가 되는 셈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할머니께 시인 이상에 대해 여쭈어 볼 때면 대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시다가 거듭 묻고 청하면 그제서야 “아, 해경이(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하고 말씀하시고는 이내 더 이상의 말씀은 삼키고 마셨다. 할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시인 이상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 내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는 6·25 이후부터 돌아가신 1958년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손자들에게 지나온 이야기를 자세히 이야기 하셨으며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 중에는 아버지의 다른 친구 몇 분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손주들 앞에서 이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 처제의 남편이고 아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이상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없었다는 것은 일편 크게 말할 만한 관계가 아니었거나 아니면 그의 생활이나 처제 변동림의 행동 모두가 못 마땅하셨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다른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에 비해 나이는 어렸지만 두 분은 신명보통학교 동기동창이었고 가까이 지낸 것은 틀림없다고 한다.

내 6촌 형인 중앙대학교 구광모 교수가 조사한 바를 전하면, 아버지와 이상 두 분이 같은 해에 신명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와 신명보통학교 시절부터 각별한 친구이며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으시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매년 할아버지 산소를 찾으시던 이상호 선생을 찾아가 여쭈어 보았다. 몸이 불편하여 누워계시던 중에도 이상을 기억한다면서 몸을 일으키시며, 이상과 같은 반이었는데 그 친구는 변사 흉내를 아주 잘 했다며 다시 그 흉내를 내기도 하셨다.

두 분 모두 여러 예술가와 시대를 앞서가는 청년들과 함께 많은 교류와 만남을 가졌었으나, 그런 중에 두 분의 사이가 조금 더 각별했던 정도로 이해함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아버지가 근무하던 창문사에 이상을 취업시킨 것이나, 이모인 변동림 할머니를 소개시켜 준 것이나, 1935년 경에 우고당 2층에서 그리신 것으로 전하여 지는 「우인상(友人像)」을 그리신 것으로 봐도 그러하다.

특히 아버지가 이상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1934년 안팎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옵셋인쇄소인 ‘정판사’와 골동미술품상인 ‘우고당’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1935년에는 ‘창문인쇄주식회사(창문사)’의 지배인으로 계셨다.

창문사는 이상재 선생이 미국에서 돌아올 때 교포들이 거두어 준 돈 오만원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다량의 양서 보급을 통해 백성을 깨우쳐야 된다고 생각하여 ‘기독교창문사’라는 상호로 1921년에 출발하였다고 한다. 창문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성경책을 인쇄하였고 후에는 불경도 이곳에서 인쇄할 만큼 대표적인 인쇄소였다. 하지만 이상재 선생이 사업에 생소한 분인데다 문화산업의 특성상 이익의 환수가 적어 경영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자 당시 독립신문사 사장이셨던 윤치호 선생의 권유로 1925년경에 할아버지께서 경영권을 인수하였으나 사장은 이상재 선생이 계속하셨다. 다음에는 윤치호 선생이 다음에는 해방 후 초대 적십자사 총재를 지내신 양주삼 목사가 사장을 지내셨고, 그 뒤인 1934년부터 회사가 화재로 없어진 1941년까지 할아버지께서 사장을 지내셨다. 하지만 이후로도 이 회사는 계속 문화산업으로써의 역할을 하면서 적자를 이어 갔고 그 때마다 할아버지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투자를 하여 자본금이 30만원 규모를 유지했다고 한다. 바로 이 무렵 이상이 창문사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니 할아버지께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바 없을 것이나 아무튼 이상이거나 김해경이거나 간에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손주들 앞에서 거론한 적은 없다.

아버지와 이상은 예술을 하는 동료로서 우고당에서 자주 함께 하였다. 그리고 이상도 다동에 기거했던 탓에 나의 장형은 그를 아저씨라 부르며 그의 집에까지 종종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장형은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몸이 불편한 외아들에 이어 집안을 건사할 큰 손주였기에 하염없이 소중한 존재였고 아버지에게도 너무도 소중하고 자랑스런 아들이었기에 짬이 날 때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장형의 손을 잡고 외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장형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 줄 기세였었다고 한다. 덕분에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가까운 친구들의 일까지도 장형은 다 보고 기억할 수 있었다.

장형이 아저씨 이상에 대하여 기억하는 것은 이상의 나이 26세인 1935년부터 28세로 세상을 등진 1937년까지의 3년여 간이다. 장형이 1930년생이시니 이 무렵 장형은 6세부터 8세인 셈이다. 그러니 많이 보고 다니면서 여러분을 만나기는 했어도 성숙한 어른의 시각이 아니라 어린이의 눈과 판단일 뿐이다.

그런 장형의 기억에 따르면 이상은 유곽처럼 생긴 다동 33-1번지(현재 다동33 예금보험공사)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고 가끔씩이나마 그 집에 들르면 동전을 주곤 했다고 한다. 신혼을 지내고 있을 때 장형이 그 집에 들렀던 것은 덕수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변동림 할머니가 장형의 가정교사를 하였던 인연 때문이다.

다만 장형의 기억에 따르면 이상이 마지막으로 지내던 집의 모습이 소설 「날개」에서 33번지로 일컬어지고 있는 가옥의 구조와 무척 흡사하다고 한다. 후에도 여러 번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누차에 걸쳐 확인했지만 장형이 말하는 이상의 기거지는 ‘다동 33-1번지’인 것으로 기억된다 하였다. 당시에 장형은 다동 72번지에 살았기 때문에 직선거리로는 불과 5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실제로 그 동네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장형은 그 집에 가서 이상으로부터 동전을 받아가지고 화신백화점에 가서 목마를 타던 이야기를 하였고, 이상의 집에 다녀 온 것을 할머니가 아시면 굉장히 야단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자주하였다.

그리고 장형은 아버지의 사무실 겸 작업실이기도 했던 우고당에 가길 좋아했단다. 그곳에는 제기 만들기에 딱 좋은 엽전들이 많았고 그 중에 몇 개쯤 들고 와서는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재미가 나름 작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우고당(조선호텔 정문 건너편에 있었음)에 들르거나 아버지께서 갈아입으실 옷을 가지고 매일 아침 그곳에 가는 행랑아범을 따라 가보면 거기에 가끔 해경 아저씨도 와 있었으며 두 분은 종종 2층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를 따라 몇 차례 같은 다방에 간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 바로 여기라고 손으로 가리키며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비록 그 찻집의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이상이 다동으로 이사하기 전에 운영하던 곳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그래서 형과 함께 그곳의 지번을 확인해 본 결과 그 곳의 주소가 ‘종로1가 33번지’였다.

▲구본웅의 그림, 「여인」(47X35cm, 1930년대)

그 후 내가 만난 신덕현 씨의 말에 따르면 이상으로부터 본인이 제비다방을 인수했다고 한다. 나는 1972년 현대 미술관에서 <근대미술 60년전>을 할 때 아버지의 그림 「인형 있는 정물」을 출품하기 위하여 소장자인 신덕현 씨를 찾아가 출품을 부탁한 적이 있다. 그때 그분에게 그림을 소장하게 된 경위를 물어보았는데 충무로에 있던 제비다방을 이상에게서 매입하면서 다방에 있던 그림을 함께 인수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아버지가 여러 번 찾아와서 저 그림은 내 그림이고 가격은 얼마라도 주겠으니 팔라고 졸랐으나 나는 제비다방에 관심이 있던 것이 아니고 그림을 갖고 싶어서 다방을 샀노라 하면서 돌려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나는 「인형 있는 정물」을 신덕현 씨에게서 매입하여 소장하다가 호암미술관에 이관하였다. 서둘러 그림을 챙기지 못하여 그림이 많이 훼손된 것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버지의 작품은 1940년대 이후에 불교적이고 동양화적인 경향을 보인다. 「연옥도(煉獄圖)」 등 많은 대작이 있었으나, 6·25전쟁 중에 수원집이 폭격으로 불타면서 고미술품과 함께 소실되었다. 1972년 <근대미술 60년전> 후 태고사(현재 조계사) 주지였던 분을 만나서 아버지의 작품 이야기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6·25전쟁 전에 아버지에게 유화로 불상을 주문하였는데 너무 파격적으로 그려서 작품을 창고에 두었으나, 전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지금에 와서나마 이렇게 아버지의 시절과 흔적을 더듬어 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좀 더 서둘러 그 시절을 복기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지켰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라도 정리할 수 있음을 감사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