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12일 새벽, 어둠 속에서 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광석이 형이 돌아가셨다.” 김진경 시인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화들짝 잠이 깬 나는 충격을 안고 세브란스로 곧장 달려갔다. 오후가 되자, 병원 영안실에는 전국에서 그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장례식장에는 오열과 분노, 비통한 절규가 한데 뒤엉켜 터질 듯했다. 모두의 얼굴에는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황지우 시인에 의해 ‘민중적 민족문학의 독전관(督戰官)’으로 불리던 채광석은 1983년 2월 후배 김정환의 장편 연작시 『황색 예수전』 제1권에 해설을 썼고, 3월에는 창비에서 발행한 『한국문학의 현단계 2』에 “모든 문학 행위는 민족사적 요구와의 접맥을 추구해야 한다”는 취지의 문학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를 신인작품으로 발표하여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첫 발을 내딛었다. 5월에는 조태일 시인이 발행하던 시 전문 무크 ≪시인≫ 제1집 ‘움직이는 시’에 시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서른다섯 살의 늦깎이 시인으로 혜성같이 등장했다.
채광석은 서울대 사대 재학 시절 이미 학생운동가로 이름을 떨쳐 사법 당국에 ‘요주의 인물’로 찍혔고, 그러한 이유로 강제징집당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1975년에는 김상진 열사의 ‘추도식 시위’인 이른바 ‘오둘둘 사건’의 주동자로 당국에 체포되어 2년 반 동안 옥방에 갇히는 고난을 당했다. 그는 김상진 열사가 할복하기 전에 외친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양심선언문의 한 구절을 내내 머리에 담고 살았던 의기의 남아이기도 했다.
대학 시절 신동엽, 김수영 시인의 시에 흠뻑 취해 있던 채광석은 깨알 같은 글씨로 노트에 엄청난 양의 습작시를 적어놓던 문학청년이었다. 이러한 열정을 바탕으로 1978년 ≪창비≫ 여름호 독자 투고란에 실은 그의 글은 탁월한 식견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80년대는 야만과 광기의 시대였다. 신군부는 평화로운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모든 정치 세력을 잠재운 가운데, 문화예술계에도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유신정권의 폭정에 항거하여 결성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도 전두환 정권 들어 활동을 정지당했다. 막힌 공간을 뚫지 않고서는 질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채광석은 후배 시인 홍일선, 김정환, 김사인, 박승옥 등을 자주 만나 발전적인 방안을 거듭 궁구했다.
이 같은 일련의 논의 과정 속에서 1981년 ‘시와 경제’ 동인이 탄생했다. 작품 발표는 직접 하지 않았지만, 채광석은 이때 김용택과 함께 참여하여 1980년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동인지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는 이듬해에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편들을 ≪시와경제≫ 동인지에 실어 문단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채광석은 결코 문학만을 외치는 책상물림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가나 노동 현장을 가리지 않고 싸움의 현장이면 어디든 달려가 문학 강연을 했고, 독재와 싸워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곤 했다. 시인으로서, 평론가로서, 문화운동가로서 채광석은 지칠 줄 모르고 앞으로 전진하는 기관차와 같았다.
그는 1983년 김근태 등과 함께 민청련 창립을 주도했으며 1984년 3월 김종철, 김학민 등과 함께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를 창립해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채광석은 오늘날 민예총의 전신인 민문협의 핵심으로서 재야 민주 세력들을 폭넓게 연대하고 규합하는 중심에 서 있었다.
그 무렵 채광석이 가장 깊이 사유하고 고민했던 것은 문학을 통한 변혁운동에 대한 투신이었다. 1984년, 채광석은 자실 활동 혹은 문화운동을 통해 독재와 싸워야 함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당시 신용협동조합의 고위 간부였음에도 분연히 사표를 낸 뒤 맹렬히 움직였다. 그는 고은, 백낙청, 박태순, 천승세 등 초창기 자실 창립을 이끌었던 어른들을 설득해 냈고 김정환 등 후배 문인들을 규합하여 자실 재창립을 주도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작가회의로 발전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우리 문학인은 지난 수년간의 고립 분산과 태만을 깊이 반성하면서 그간의 축적된 역량과 새롭게 성장한 역량들을 한 데 엮어 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우리의 모든 문학적 사회적 실천을 쏟아나갈 것임을 안팎에 엄숙히 다짐하는 바이다.”
1984년 12월 19일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84회의>에서 채광석은 ‘84 문학인 선언’을 낭독함으로써 엄혹했던 1980년대를 문학운동을 통해 환히 밝히겠다는 의지를 문단 안팎에 천명했다. 이 자리에서 총무간사로 임명된 채광석은 자실의 실질적인 사령탑을 맡았다. 비로소, 동면 상태에 있던 자실을 흔들어 깨워 ‘문학의 운동화’라는 슬로건으로 뭉치게 한 엔진이 기운차게 가동되었다. 오늘의 한국문학에 새 힘을 불러일으킨 가장 역동적인 장면이다.
채광석은 금기의 영역 속에 있던 김지하 시인을 대중 앞에 불러 세웠고 김남주 시인 석방운동을 열정적으로 벌였으며, 신동엽 시인에게 ‘민족시인’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그의 주변으로 후배들이 속속 모여들어 이른바 ‘채광석 사단’이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그는 밤새 술을 마시며 끝없는 토론을 벌였고, 대안 제시를 위해 골몰했다. 문학적 태도가 느슨하거나 원칙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선후배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비판하거나 육두문자 욕설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유머와 정이 넘쳤다.
채광석의 주도로 서울에서는 정기적인 <민족문학의 밤>이 열렸다. <민족문학교실>도 상시적으로 운영했다. 채광석은 ‘모든 지역은 고유한 중심성을 갖고 있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그의 주장에 호응한 지역 곳곳마다 ‘지역문학대회’가 열렸다. ‘중앙 문단의 권위’에 가려져 있던 지역 문인들이 열린 논의의 장에 가세하면서 문학의 꽃들이 갖가지 향과 빛깔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채광석은 후배들과 함께 부산, 광주, 대전, 전주, 대구 등을 다니며 ‘지역문학대회’에 참여했다. 그의 말은 폭넓은 공감대 속에서 뿌리를 내렸다. 멀지 않아 얼어붙은 문학계에 새 바람이 불어왔다.
1985년 자실의 중심축인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채광석은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문화예술분과위원장에 선임됨으로써 재야 운동판은 물론 문화 운동판의 실질적인 리더로 부상했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이 ‘4·13 호헌조치’ 발표하자 채광석은 재야의 모든 조직 가운데서 최초로 이를 반대하는 서명을 자실 이름으로 주도, ‘4·13 호헌조치 반대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슬로건은 마침내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당시 백낙청에 의해 주도되던 ‘시민 문학론’에 대한 반론과 대안으로써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주창했다. 노동자 계급이 사회 변혁의 주체로서 역사의 전면에 바로 서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뜨거운 문학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6월항쟁 기간 동안 이영진 사무국장, 현준만 재정간사와 더불어 자실 총무를 맡아 하던 필자는 최루탄 가스 속으로 문학인들을 호명하여 함께 시위 현장을 누볐다. 바뀐 사무국 체제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풀빛출판사 주간으로 되돌아가 있던 채광석은 이때도 자신의 역할을 멈추지 않았다. 문인들의 대오를 흐트러짐 없이 편성하고 시위 현장의 선두에 서게 함으로써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문인 집단의 선명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5공 세력은 결국 ‘6·29 항복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국민들 앞에 무릎 꿇었다.
그 무렵 시와 평론을 줄기차게 발표하던 채광석은 1987년 7월 11일 여성단체연합 주최 민요한마당의 공연이 있고 나서 후배들과 밤새워 토론을 벌였다. 이튿날인 12일 새벽, 귀가 길에 나선 그는 애오개의 아현초등학교 부근 차도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승을 뜨고 말았다. 문단에 나온 지 만 4년간 질풍처럼 내달려온 만 39세의 청년 문학인이 자신의 생일을 맞은 지 하루 만에 삶을 마감한, 비극적인 날이었다.
14일 오전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중문화운동연합, 민주통일국민운동연합의 공동 주관으로 <민족시인 고(故) 채광석 민주문화인 장(葬)>이 열렸다. 장례준비위원장인 백기완 시인이 식을 진행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문인 및 각계에서 찾아온 조객들의 묵념과 애도 속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채광석과 벗으로 지냈던 이시영 시인이 “너 오늘 겨레의 국토에 묻히는 것 영원히 묻히는 것 아니듯 / 너 오늘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묻히는 것 아니다 / 해마다 칠월이 오면 너는 여름 산처럼 푸르게 산맥 일어서고 / 참다운 해방의 날 민족의 날이 오면 / 우리의 가슴 속에 살결 속에 해일처럼 푸르게 넘쳐 일어설 것이다”라는 조시(弔詩)를 낭송했다.
소설가 황석영은 조사(弔辭)에서 “사실 차갑고, 냉정하고, 적당히 예복 입고 써야 할 평론을 자네는 일개 병사처럼 단독무장을 한 채로 이리저리 부딪치고 안으로 피를 흘리곤 했었다네”라고 채광석을 추억했다.
‘불타는 사랑의 죽음으로 사랑이여 / 우리는 묻히자’라고 노래한 자신의 시처럼 그는 가파른 팔당 공원묘지에 묻혔다. 동료 선후배 문학인들은 1주기에 맞춰 『채광석전집 1권-시』와 2권(산문)을 출간하여 그를 기렸고, 2주기에 이르러 3권(편지), 4권(평론1), 5권(평론2)을 잇따라 펴내 다섯 권의 전집을 완간했다. 채광석을 기리는 문학 행사는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졌고, 13주기인 2000년 7월에는 <시인 채광석 시비(詩碑) 제막식 및 채광석 문학의 밤>이 안면읍 충청남도 휴양림과 태안군청에서 개최돼 그의 문학적 얼을 이 땅에 영원히 세워 두었다.
2007년 20주기 때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주최하여 서울 대한출판문화협회 강당에서 <그 사람 채광석, 20년>이란 제목의 추모 행사가 열렸으며, 그날 오후에는 안면도 자연휴양림에 위치한 ‘채광석 시비 광장’에서 한국문학평화포럼 주최로 <제2회 안면도 채광석 문학축전>이 개최되었다. 이시영 시인의 시처럼 “해마다 칠월이 오면” 채광석은 “여름 산처럼 푸르게” 일어서고, 그를 기리는 사람들은 마음속 안면도로 발길을 옮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