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다 이름이 뭐에요? 쿠바 아바나의 그 유명한 해안도로 말레콩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가 처음엔 카리브해인 줄 알았다. 골포 데 메히코(멕시코만), 어떤 이는 이렇게 대답했고, 또 다른 이는 아틀란티코(대서양)라고 말해주었다. 대서양이면서 좁은 범위로는 멕시코만에 속한 바다였다. 말레콩으로 나가 검푸른 바다를 보며 우리나라는 어디쯤일까 방향을 잡아보곤 했다. 검고 반들반들한 쿠바 소년들은 겁도 없이 다이빙을 하며 신나게 놀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바다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우선 말레콩이란 것이 옛날 해적을 막기 위해 건설된 것인 만큼 바다로 내려가기까지 그리 만만한 높이가 아니었고 거칠고 날카로운 바위들과 오래 되어 부서진 콘크리트 물막이들은 위험천만으로 보였다. 꼭 부딪칠 것만 같은 바위들 사이로 서슴없이 공중돌기까지 해가며 첨벙 첨벙 뛰어드는 쿠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했다. 나도 여자치고는 겁이 많은 편은 아닌데 말레콩의 바다는 늘 바라보기만 했다. 내 몸을 담가보지 못한 바다라서 그랬을까, 그 어떤 바다보다도 막막했다.
내게 익숙해진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 낯선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모험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낯설다는 것은 불리함이면서도 어떤 특권이 된다. 그 특권에 기대어 누릴 수 있는 안락함이 분명히 있다. 사차원의 세계로 한번 빠져봤으면, 무인도에 갇혀봤으면, 하다못해 갑작스런 폭풍우로 어쩔 수 없이 섬에 발이 묶여봤으면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특권을 은근히 기대하기 때문이다. 외부적 조건의 제약이 강해지면 그만큼의 자유가 생긴다. 화장실이 따로 없는 닫힌 공간에서 며칠만 지내다보면 아무 데서나 소변을 눌 수 있는 자유가 생기고, 일주일째 배가 뜨지 않으면 섬에서 마냥 빈둥거릴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여행과 모험이란 그런 제약의 틀 속으로 숨으려는 일종의 도피인지도 모른다. 낯선 세계에선 낯설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조금 있고, 낯설기 때문에 안 해도 되는 일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편하다. 단 외로움만 견딜 수 있다면.
그러나 외롭다는 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 외로움의 끝은 세상 어디서나 비슷했다. 나도 걸핏하면 휘청거리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으니. 그렇지만 모호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생겨난 사랑은 정말 사랑일까?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쩌면 여기 너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해. 너 말고도 다른 선택이 풍부했다면 과연 너를 사랑했을까? 바라볼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빠져든 이 사랑이 정말 사랑일까? 그렇게라도 따져들어야 뭔가 자기합리화가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돌아간다고 해도 비행기 타고 갈 거면서 멕시코만인지 대서양인지 막막하기도 하다면서 가슴앓이를 했다. 본질은 모호하고 제목은 유치해도 아픔은 선명했다.
한동안 아프니 슬슬 오기가 났다. 어차피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 없는 거라면 그 무모함으로 갈 데까지 가보고 싶었다. 적어도 시시한 로맨스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말레콩에 드러누워 맛보는 낭만 섞인 막막함 말고, 정말 완벽하게 차단된 막막함 속에서라면 사랑이란 즉흥이든 정욕이든 곧 삶과 죽음의 문제일 텐데, 날마다 사느냐 죽느냐와 뒤엉키는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까 궁금했다. 그냥 공기 중에서라면 미미한 변화를 일으키다 저절로 사그라질 어떤 것이 특정한 용액 속에 담가졌을 때는 엄청난 화학적 작용에 의해 무시무시하게 변하는 것처럼 뭔가 그런 극적인 게 있을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이라는 용액 속에 사랑을 담그면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무모함이 생겨날 것 같았다. 아주 무모한 꿈이 태어날 것도 같았다. 그 꿈은 널 갖고 싶다는 욕망을 넘어서 행복을 넘어서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꿈 그 자체를 향해 가는 그야말로 무모한 꿈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무모한 꿈을 실험해보고 싶어서 무인도에 한 여자와 남자를 떨어뜨려놓고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내용은 둘째 치고 형식이 너무도 생소해져버렸다. 새롭게 써봐야지 결심한 것은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써졌다. 지나치게 생경해서 희곡 형식과 동떨어져있다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나머지 희곡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언니 메일로 전부 보냈다. 언니와 엄마가 쿠바에 있는 나를 대신해서 출력을 하고 대산문화재단으로 우편발송을 해주었다. 당선이 되고 심사평을 읽어보니 내심 걱정했던 부분이 오히려 칭찬을 받았다. 몹시 기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