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피의 언어』(The Language of Blood: A Memoir, 2003; 『피의 언어』 송재평 역, 와이겔리 2005)와 『덧없는 환영들』(Fugitive Visions: An Adoptee's Return to Korea, 2009)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반만년 역사의 ‘우리 단일민족’이다. 이 신화에 관한 한 ‘우리’라는 관용어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그 허구성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닐까. 단적으로 월드컵 당시 방방곡곡에서 목청 높이 대한민국을 외쳐댄 ‘우리’의 의식에 북녘의 동포들이 얼마나 들어와 있었을까. 현재 120만으로 추산되는 국내 외국인 거주민마저 떠올려보면 한국인의 범주에 누가 포함되고 배제되는가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21개 조에 걸쳐 한국인의 국적 요건을 명시한 국적법(전문개정 2008.3. 14)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가령 남성의 경우만 해도 이중국적자는 무조건 국내 병역을 필해야 하고 필한 후에는 하나의 나라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면, 그건 법이라기보다는 ― 법무부는 2010년 5월 4일자로 복수국적 허용범위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국적법 개정안을 공포했지만 그마나 강남 특권층을 위한 개정이라는 시비가 일고 있는 형편이다 ― 시민의 자유를 국민의 의무로 조련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라고 해야 맞다. 한국의 국적법이 생김새와 피부색의 차이를 다양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감수성의 함양에 ‘법적 효력’을 발휘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제인 정 트렌카(Jane Jeong Trenka, 1972-)의 자전적 소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국적법까지 들먹인 것은 바로 그 같은 감수성의 함양과 그의 작품이 무관하지 않아서다. 입양의 경험이 증폭시킨 온갖 차이에 대한 고통스럽도록 예민한 감각이야말로 『피의 언어』와 『덧없는 환영들』의 정조(情調)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동인이다.
2.하지만 차이 자체도 지구화시대에 보편주의 이데올로기의 동력으로 흡수되기 일면이 있으려니와, 모든 단일한 정체성을 향한 의문이 단순히 차이에 대한 긍정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피의 언어』가 거듭 확인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친애하는 제인, 너는 날 살아있게 하는, 용감한 처녀야. 난 기생하는 존재 같은 거지. 난 오직 네가 살아있기 때문에 존재해. 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난 죽었을 거야. 우리가 하나의 심장과 얼굴과 마음과 몸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날 보지 못해. 너만이 보이는 존재로 살 수 있는 복을 얻었어. 나―나는 네 뒤에 숨어야만 해. 날 보살펴줘. 이 몸을 아껴줘. 왜냐하면 이건 정말 내 거잖아. 네가 보는 저 얼굴―나의 것. 네가 먹고 일하는 데 쓰는 손―그것도 나의 것이지. 넌 빌린 삶을 사는 거야. 잊지 말아줘.
경아
이 인용문은 1972년 1월 24일(음력)에 한국인으로 ‘태어난’ 정경아가 입양되어 1972년 9월 26일에 미국인으로 ‘만들어진’ 제인 매리 부라우어(Jane Marie Brauer)에게 부친 상상의 편지 전문이다(『피의 언어』 원문 139면). 호사가들에게 정신분석의 욕구를 불러일으킬 법한 이 사신에서도 아릿한 것은 한국인의 표식이 육체에 각인된 경아와 미국인의 징표가 정신에 새겨진 제인 사이의 거리다. “기생하는 존재”로서의 경아와 “빌린 삶을 사는” 제인의 거리는 샴쌍둥이처럼 측량불가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경아를 발견한 제인과 미국에서 제인이 찾아낸 경아 가운데 누가 진짜인가는 물음은 부질없다. 경아의 제인되기나 제인의 경아되기란 무엇인가는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자기의 뜻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경아와 제인을 오락가락하는 ‘내가’ 그 둘 사이에서 말하자면 영육쌍전(靈肉雙全)으로서의 상보성(相補性)을 발견하기까지 얼마나 진저리나는 속병을 앓았을까, 독자로서 짐작해볼 뿐이다(그 둘 사이의 거리에 대해 성찰한다 치면 식민지역사와 분단의 멍에를 짊어진 한반도와 그 남쪽인 한국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해온 미국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순서일지 모른다).
그 고통에 대한 증언인 『피의 언어』는 두 자아가 동거하는 하나의 정신세계에 대한 곡진한 해체인 동시에 그런 해체를 감행하는 ‘나’ 자신의 통합가능성을 탐색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기는 해도 전체적인 인상은 해체보다는 ‘나’ 자신의 통합 가능성에 무게중심이 가 있는 것 같다. 독자에 따라서는 ‘피의 언어’라는 비유 자체가 시종 순혈과 기원에의 완강한 동경과 욕망을, 입양이라는 것 자체의 불가능성과 불순함을 암시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피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회귀서사의 전통적인 내용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가령 모국에서의 삶을 통해 다시 더듬어보는 자아의 내면풍경이 그러하고 양부모가 표상하는 백인세계와 겉도는 성장과정이나 그런 세계에서 인종적 타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심리적 계기, 타자의 세계를 떠나 피의 가계(家系)를 재발견하는 여정 모두가 회귀서사의 일부다.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피의 언어』는 한국계 미국문학의 어떤 패턴을 공유·반복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회귀서사적 요소의 반복으로 인해 작품 자체가 진부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그런 위험이 없지 않고 생모와의 만남을 그린 어떤 대목에서는 감상(感傷)으로서의 화해와 낭만화가 독자의 집중을 흐트러뜨리기도 하지만 발화의 실험도 긴간이 이어지는 작품은 ‘기원’으로의 투항을 끝내 거부한다. 오히려 닫힘과 열림 사이에 벌어지는 어떤 존재론적 떨림을 이산자(離散者)의 의식으로 혼신을 다해 기록한다.
이 기록에는 한국의 근대 현실에서 유달리 폭압적이었던 가부장제의 원죄를 비롯해 생모 한 개인으로만 좁힐 수 없는 근대 한국여성의 수난사와 양모의 어쩔 수 없는 백인 의식, 그런 생모와 양모에 대한 ‘나’의 폭발적 애증, ‘나의 스토커’가 암시하는 미국 문명의 피폐함 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피의 언어』가 회귀서사라 하더라도 죽음과 생식으로 마무리되는 연어의 귀환 같은 것에 손쉽게 빗댈 수 없다. 가족과 민족과 조국이라는 모든 집단적 표지에 대한 강렬한 동경과 귀속본능에도 불구하고 ‘자기’ 외에는 돌아갈 곳이 없음을 생모와 양모라는 두 화해불가의 세계에서 뼈저리게 깨달아버린, 이방인의 자기인식으로서의 서사, 그것이 바로 『피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3. ‘한 입양인의 한국 귀환’이라는 부제가 붙은 『덧없는 환영들』은 그런 이방인이 한국에 생활인으로서 뿌리내리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책 제목은 20세기 러시아 혁명 현실의 모순을 악보에 첨예하게 드러내고 감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의 피아노 곡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곡가의 음악에 대한 해석과 논평만으로도 충분히 격조 있는 성찰이라 할 만하다. 마치 저자 자신이 「덧없는 환영」의 악보를 지면(紙面) 위에서 연주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이 한국 정착기는 형식에서도 예의 음악의 언어를 빌려 한결 자유로워졌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인용한, “러시아에서는 유럽인이고 유럽에서는 러시아인”인 프로코피에프의 잠언―“파리에 산다고 해서 파리 시민(파리지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함축하는 바를 전작보다 더 유연하게 펼쳐 보인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주제음은 ‘입양아’로서의 성장사와 서울에서 만난 한국인 아닌 한국인들과의 간단치 않은 유대를 통해 증폭된다. 이제는 ‘과거의 현재’가 되어버린 두 엄마 및 끔찍했던 ‘나의 스토커’를 비롯한 전편의 인물들과 사건은 유사한 배경에서 변주되고, 한국과 미국의 문화 사이에서 동요하는 자아의 내면적 고뇌 역시 전편의 자장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편과 확실하게 차별되는 지점도 있다. 즉, 나의 입양아 의식은 이제 중심과 기원의 신화에서 확실하게 탈피한, 이를테면 자아의 실존적 상황을 그 자체의 맥락에서 되돌아보는 성찰적 성격이 더 강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제인 정 트렌카는 원망과 회한으로 채워진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물학적·법률적 기원을 지워버린 입양의 시간에서 놓여난, 자유로운 일상의 동선(動線)에 어떤 미적 형식을 부여하는 여유마저 얻은 듯하다. 그런 생활과 여유의 발견으로 인해 비로소 작가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과 그 일상에 내재한 비범한 의미를 발견하는―그 스스로 “a commonography of souls"(166면)라고 명명한―작업을 더 활달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덧없는 환영들』이 포착한 풍경들은 이처럼 본질적으로 찰라 속에서 영원을 사는 사람들의 생명력을 담는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런 풍경들을 무조건 수용하거나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약 16만의 아동을 미국을 포함한 서구로 수출한 한국의 일그러진 근대 현실은 말할 것도 없이 백인으로서의 미국인이라는 범주 자체에 고착된 미국의 내면화된 인종주의, 영어(英語)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의 뒤틀린 교육제도, 세계화 시대를 따라갈 수 없는 기러기아빠와 펭귄아빠들의 비애, 정찰가가 통하지 않는 재래식 시장의 동양적 논리들, 납득하기 어려운 북한 체제와 헐벗고 굶주린 북한 사람들 등, 자질구레한 일상부터 거대한 사회문제까지 작가는 손가는 대로 예의 ‘덧없는 환영들’의 선율에 따라 건드린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작가의 내면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도 ‘있는 그대로’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다. 마치 순수한 소설작품처럼. 고백하건대 나는 이런 『덧없는 환영들』을 사람들이 ‘입양문학’이라고 정의하고 그 프레임에 맞춰 해석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다(뿌리와 회귀라는 서사적 관행으로 입양문학을 정의하는 비평의 눈으로 가령 입양아의 의식이 표면에 전혀 드러나 있지 않은 쉰네 순 뢰에스의 장편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를 어떻게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입양문학의 이질성조차 당연한 듯이 ‘한국문학’의 일부로 설정하면서 한국독자의 애정을 요구하는 비평적 태도가 못마땅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덧없는 환영들』에서 경아와 제인의 이름으로 회귀하는 자아들은 민족·인종의 수식어가 필요치 않은 존재다. 결국 보편의 지평으로 개방된 국지적 현실에서만 진정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존재야말로 『피의 언어』와 『덧없는 환영들』이 천착하는 것인 바, 그 존재는 작가의 책을 통해 연대(連帶)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랑의 부질없음,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 자유의 책임은 내가 도미니끄의 삶을 보면서 배운 세 가지다. 그는 우리 모두가 우리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비록 사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도미니끄가 그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기를, 그래서 그의 망가진 존재를 어떤 의미에서는 온전하게, 즉 자기의 싸움에 값하는 것으로 그가 그 삶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는 그가 그의 삶에서 뭔가 의미 있는 것을―그것이 그에게 뭘 의미하든―만들어내기를 희망한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178면)
이 ‘나쁜’ 도미니끄라는 애칭의 인물을 모든 입양아와 소수자들, 더 나아가 분단된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 전체를 가리키는 일종의 환유(換喩)로 해석한다면 무리일까. 만약 이 해석을 오독이라고 한다면 작가가 『덧없는 환영들』의 마지막 장에서 불러일으키는 거의 휘트먼적 비전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그런 비전을 미국 백인의 것만으로 치부할 수 없듯이 ‘나쁜’ 도미니끄’에 대한 ‘나’의 바람 역시 입양아를 향한 것으로만 제한할 수 없을 것이다. 분열되고 찢겨지고 갈라진 입양인들이 자신의 삶에서 뭔가 온전하고 의미있는 것을 창조해내려는 싸움은 온갖 종류의 ‘분단’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제인 정 트렌카의 작품을 ‘입양문학’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런 문학의 범주에만 가둘 수 없도록 하는 성찰의 힘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