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춘천에 와 있다. 춘천은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닌 곳이다. 현재 나의 본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여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을 나는 수시로 찾는다. 그런데도 오늘의 춘천은 어딘가 색다르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아마 그를 만나러 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전상국. 그는 시류에 영합하거나 유행에 동참하지 않고 자신만의 문학적 색깔을 고수하면서도 평단과 독자 모두의 사랑을 받아온 드물고 귀한 작가다. 한편으로는 이태 전 탄생 100주년을 맞았던 소설가 김유정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린 이른바 김유정 전문가로서 춘천의 자랑거리인 김유정문학촌의 촌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만나러 온 내가 이렇듯 설레고 떨리는 것은 꼭 그런 거창한 수식어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실 오래전의 어떤 강렬한 기억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알까. 당신이 저 까마득한 17년 전에 소심하고 매사에 자신감 없던 한 여고생을 작가가 되도록 이끌어주었다는 것을. 어느덧 서른 중반이 된 그 여고생이 오늘 작가로서 당신을 인터뷰하러 왔다는 것을. 올 때는 다시 여고생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들떠서 와놓고, 막상 김유정문학촌 앞에 이르러서는 선생님을 어떻게 뵙나 긴장이 되어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쩔쩔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1993년,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였다. 춘천여고에서 ‘제1회 문학의 밤’ 행사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나는 허먼 멜빌의 『백경』에 대한 독후감을 낭독했다. 열심히 쓴다고 썼지만 신통치 않은 글이었다. 낭독을 하는 동안 내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당시 꿈이 작가가 되는 것이었음에도 글을 쓰면 쓸수록 내게는 재능이 없다는 회의가 들어 늘 괴로웠는데 그날이라고 다를 리 없었던 것이다. 1부 학생들의 작품 낭송이 끝나고 2부 초청 작가의 강연 순서가 되었다. 학생들의 환호를 받으며 강단에 선 작가는 먼저 1부를 지켜본 소감을 털어놓았다. 어떤 시가 아름다웠고 어떤 산문이 흥미로웠는지를 조목조목 이야기하더니 잠시 말을 멈추고 탁자 위에 놓인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백경』 독후감을 낭독한 학생이었습니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그 학생은 글을 전부 외우고 있더군요. 손에 든 원고를 가끔 들여다보긴 했지만 그건 글을 못 외워서가 아니라 자기가 맞게 읽고 있나 한 번씩 확인해보는 거였습니다.” 나는 숨을 죽였다. “그 학생은 글을 일부러 외운 것이 아닙니다. 그게 정말 자기 글이기 때문에, 자꾸 들여다보고 고치고 또 고치면서 혼을 다해 썼기 때문에, 몸이 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나는 더욱 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작가란 원래 저런 존재일까.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을 혼자 눈 밝게 알아보고 내가 네 마음 다 안다고, 괜찮다고, 넌 잘하고 있다고, 그렇듯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는 사람인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실제로 원고를 전부 외우고 있었다. 물론 일부러 외운 것이 아니었다. 글에 자신이 없으니 자꾸 읽고 고치고 다시 읽고 고치기를 반복하다가 저절로 외우게 되었던 것이다. “저는 그런 사람 편입니다. 혼을 다해 쓰는 사람, 자기 글에 정말로 애정을 갖고 거기에 다 쏟아 붓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중에 작가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서 그보다 더 감동적인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나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며 생각했다. 정말로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저토록 근사한 격려를 해준 사람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다고. 황송하게도 스스로 내 편이라고 말해준 저 사람을 실망시키면 안 되는 거라고.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거기 그가 있었다. 소설가 전상국.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문학이에요. 저는 지금도 소설 쓰는 일이 너무나 즐겁기 때문에 소설을 씁니다.”
그때 이미 지천명을 넘겼지만 소설에 대한 순정을 토로하는 그의 모습은 호쾌하고 열정적이면서도 진지하기가 마치 문학에 갓 눈뜬 청년 같았다. 눈이 마주치면 인사해야지. 고맙습니다, 선생님. 제게 해주신 말씀 잊지 않을게요. 그래서 나중에 꼭 훌륭한 작가가 될게요. 이렇게 눈으로 말씀드려야지. 강연을 하는 그를 쳐다보며 요행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리던 그 잠깐의 시간이, 나는 가끔 17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선생을 처음 뵌 그날 그 자리가 그만큼 강렬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남은 까닭일 것이다.
“그럼 그때 거기에 김미월 작가가 있었단 말인가?” 그의 눈이 커다래진다. 그 옛날 당신이 여고생이었던 내게 그런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는 것을 선생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딱 한 번 갔던 춘천여고 강연 바로 그 자리에 내가 학생으로 앉아 있었다는 인연을 놀라워한다. 그래,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때 선생은 나에게 작가가 될 거라 했고 나는 작가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고 나서도 내가 선생을 제대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 적이 없는 것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선생님 덕분에 작가가 될 수 있었어요, 하기에는 내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작가여서였다.
그 놀라운 인연 덕분에 어쨌거나 지금 나는 다시 선생과 마주하고 있다. 이곳은 김유정의 생가. 육이오 전쟁 때 폭격으로 형체도 없이 파괴되어 배추밭에 그 터를 알리는 팻말만 남아 있던 것을 2002년에 현 상태로 복원했다고 한다. 선생과 나와 그 자리에 동행한 기자는 대청에 앉아 시원한 메밀차를 마신다. 열어놓은 장지문 너머 바람이 연초록 나무 이파리들을 흔들고 지나간다.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기자가 탁자에 슬그머니 녹음기를 올려놓는다. 사방에서 매미가 운다. 아마 가장 크고 또렷하게 녹음되는 소리는 매미 울음소리일 것이다. “모두가 나를 김유정에 미친 사람이라고 해요.”
당신이 생각해도 그런 것 같다며 선생은 허허 웃는다. 김유정을 자꾸 읽으니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와 매력과 그의 남다른 감성이며 예술혼 등을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알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것을 남들에게 전파하고 싶어지고, 또 그러다 보니 김유정에 더욱더 빠져들게 되더라는 것이다. 선생은 김유정 소설의 해학과 향토색, 능청스러우면서도 역동적인 문장들, 가난한 시골 따라지들의 이야기를 철저히 그들의 어휘로 써내려간 그의 언어 감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과서에 실린 소설 「봄·봄」의 제목에 점이 안 찍혀 있기에 문교부에 항의해서 바로잡은 일화, 국내에서 유일하게 사람 이름을 역명으로 삼은 기차역인 김유정역에 그 이름을 걸기까지의 과정, 김유정문학촌을 홍보하고 김유정문학상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발로 뛰었던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소설가 전상국을 인터뷰하러 와서 소설가 김유정을 인터뷰하는 듯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선생의 달변에 홀려 나는 연방 고개만 끄덕인다.
“사람들이 나더러 왜 자꾸 김유정의 그늘 속에 들어가 있냐고 해요. 김유정에 몰입할수록 소설가로서의 전상국은 점점 작아지는 것 아니냐는 거지요.” 그런 면이 영 없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라고 선생은 말한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김유정의 글 쓰는 신명을 알게 되니까 결국 당신에게도 그 신명이 오더라며,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신명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소설가 전상국은 소설가다. 이 의도적인 동어 반복은 그가 김유정 문학촌의 촌장으로서 김유정에 미쳐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것과 관련된 일들에 열의를 보이고 그만큼의 성과를 거두고 또 그만큼의 보람도 얻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정체성의 핵은 역시 소설가라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당장은 김유정의 그늘 운운하는 사람들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소설가 전상국은 김유정의 그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김유정에게 그늘을 만들어준 사람이다. 우리 모두가 김유정 문학의 그늘에서 쉴 수 있도록 스스로 해를 가리고 서준 사람이다. 겸허하게 그리고 의연하게.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는 소설가 전상국. 문학촌을 나서며 나는 그와의 진짜 인터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한다. 춘천 시내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 입구에는 나무 현판이 걸려 있다. 거기 새겨진 문구가 눈길을 끈다.
아베의 가족. 그것은 선생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중편소설의 제목이다. 육이오 전쟁이 빚은 어느 가족의 비극을 다룬 그 작품은 지금도 분단 문학의 수작으로 꼽힌다. 아, 아, 아베…… 책장을 덮고 난 후에도 독자의 귓가를 씁쓸하게 맴도는 그 음절들을 무심히 입속으로 되뇌어보다가 나는 문득 선생의 작품들에 독특한 의성어 의태어가 많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특히 그의 등단작이기도 한 단편소설 「동행」에서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표현되었던 웃음소리는 얼마나 낯설고 신선했던가. 그러면서 그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ㅎㅎ, ㅎㅎㅎ 눈 덮인 산속, 아직 눈 조용히 비껴 내리고 있는 밤이었다.
위 작품이 거의 반세기 전인 1963년에 발표되었음을 감안한다면 당시 그런 식의 표기는 참신하다 못해 파격적인 시도였다고 하겠다. 웃음소리만이 아니다. 선생은 풀피리 부는 소리를 ‘ㅍㅍㅍ’ 하고 쓴다든가 뻐꾸기 울음소리를 ‘워꾹 워 워꾹’ 같은 식으로 쓰는 등 작품 속에서 숱한 의성어들을 변주하고 창조해왔다. 의태어도 마찬가지다. 부사에 대해, 우리말에 대해, 더 크게는 언어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사실은 내가 어휘력이 부족하거든. 그걸 감추려고 하다 보니까 괜찮은 낱말들, 새로운 낱말들을 자꾸 찾아 쓰게 되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선생은 허허 웃는다. 나도 따라 웃어본다. 하하하. 아니, ㅎㅎㅎ.
“작품에서 메시지는 작가의 철학이 들어 있는 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 자체는 시대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잖아요. 나는 가끔은 메시지보다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언어에 더 관심이 가요. 우리말은 부사나 형용사가 참 풍부해요. 특히 의성어나 의태어는 작가가 얼마든지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낼 수 있지요. 나는 사전에서 찾든 내가 직접 만들든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어휘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것이 바로 글 쓰는 즐거움이라고 선생은 덧붙인다. 그런 자세가 그의 소설을 젊게 만드는 것일까. 인터뷰를 하러 춘천으로 내려오기 전 일주일 동안 선생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새삼 문장 곳곳에 밴 젊은 감성과 박력, 은근한 유머 감각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나만의 새로운 뭔가가 있어야 신명이 나요. 그건 어휘일 수도 있고 문체일 수도 있고 서술 방식일 수도 있지요. 예를 들면 어떤 소설에는 속담이나 격언을 많이 인용해본다든가, 또 어떤 소설에는 장자의 말투로 장자의 철학을 담아본다든가, 작품마다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시도할 때 작가로서 신명이 나는 거예요.”
과연 작중인물들의 입담이 일품인 「한주당, 유권자 성향 분석 사례」, 어린이의 관점에서 묘사되는 만큼 간결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로 일관되는 「술래 눈뜨다」, 추리 기법을 동원한 「동행」, 이중의 의도를 품고 있는 복합 구조가 돋보이는 「하늘 아래 그 자리」 등 작품마다 그 나름대로의 색깔이 있고 장치가 있고 문체가 있으니 선생의 소설 쓰는 신명을 나도 감히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자주 입에 담은 말이 ‘신명’이다. “글은 알면 알수록 절망이지만 글 쓰는 일 자체는 언제나 신명이지요. 문학은 놀이이지 게임이 아니에요. 즐거워서 하는 것이지 승부를 가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1963년에 등단한 후 1964년에 귀향하여 1974년 서울에서 다시 작품을 발표하기까지 문학을 등지고 살았던 10년의 세월을 회상한다. 그때 그는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를 했다. 교사 생활은 적성에 맞았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즐거운 가운데에서도 어딘가 허전했다. 그것이 등 뒤에 버려둔 문학 때문임을 알면서도 그는 모르는 체했다. 문학이 외면한다고 외면되는 것이 아님을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게임이 아니라 놀이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문학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꼬박 10년이 걸린 셈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이 헛되다든가 문학 이외의 것은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선생은 당신 삶을 지탱해온 큰 축으로 글쓰기 외에도 가르치는 일, 그리고 자연과의 교유를 꼽는다. 그것들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교직을 떠났어도 그는 의도와 무관하게 작품으로 삶으로 동시대의 많은 후배 작가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이곳 춘천에서 농사를 짓고 산에 오르고 꽃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 친화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듯 글쓰기와 가르치기와 자연, 이 세 꼭짓점 사이를 오가며 무게 중심을 잘 잡았기에 그의 작품이 발표된 지 수십 년이 흐른 오늘에도 많이 읽히고 크게 사랑받는 저력을 지닐 수 있었으리라. 어린 시절에 목도한 전쟁의 참상이나 오랜 교직 생활의 경험 등을 바탕으로 외부의 폭력에 의해 일그러진 세계의 인간들에 천착해온 선생을 가리켜 문학평론가 유준은 「소설은 어떻게 감동의 축제가 되는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전상국의 소설은) 주로 전기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지 소재적인 차원에 그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미학적 형상화와 구체적 보편화에도 성공하고 있으며, 현상의 너머를 응시하려는 시선의 정열과 에너지 역시 두드러진다. 때문에 그의 소설은 감응력이 높다. 오늘 우리가 전상국 소설을 읽는 일이 여전히 의미 있는 것은 그의 소설이 서사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두루 좋은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감응력이 높다는 것, 작품으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작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신명’이 아닐까.
선생이 갑자기 오늘 도로 상경해야 하는 기자에게 기차 시간을 묻는다. 오전에 춘천까지 입석으로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얼른 상행선의 좌석표를 예매해주었던 선생은 행여나 인터뷰가 늦게 끝나 기자가 기차를 놓치면 어쩌나 염려스러운 것이다. 정확하면서도 섬세한 선생의 문장처럼 알맞은 때 알맞은 자리에서 꼭 필요한 배려를 잊지 않는 그에게 나는 내가 기차를 탈 것도 아니면서 괜히 감동한다.
이삼십 점짜리 질문들에도 선생의 대답은 늘 백 점짜리다. 내가 미처 묻지 못한 것 혹은 차마 물을 수 없었던 것까지 길고 소상히 답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인터뷰는 대답만 따져 백 점 만점에 백 점이다. 아니다. 문학에 대한 선생의 곡진한 마음 자세, 날렵한 언어 감각, 소년의 순수함과 노년의 관대함이 어우러진 인품을 어찌 점수로 매길 수 있겠는가. 나는 끝으로 다음 작품에 대해 묻는다.
“죽음의 문제를 다룬 소설을 구상 중이에요. 일본에는 사람들이 자살하러 가는 산이 있다고 해요. 죽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사람의 이야기,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그 숲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써보고 싶어요. 시대적인 문제보다 존재론적인 문제를 파고드는 작품이 될 텐데, 이번에는 신명이 날 만한 어떤 요소를 집어넣을까 고민하고 있지요.” 그의 얼굴에 아연 활기가 돈다. 하기야 원래 진짜 작가는 이미 쓴 작품보다 아직 쓰지 않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 활기찬 얼굴을 하는 법이다. 기자가 녹음기의 전원을 끈다. 작업실 안의 공기가 한층 가벼워진다. 언제 챙겨두었던 것인지 선생이 나와 기자에게 옥수수를 한 보따리씩 안겨준다. 오늘 낮에 수확한 거라서 저녁에 바로 삶아 먹으면 맛이 기가 막힐 거라는 그의 말이 너무나 정겹고 소탈해서 나는 녹음기가 꺼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옥수수 두 보따리와 사람 세 명을 태운 승용차가 김유정역으로 향한다. 오늘의 인터뷰는 김유정에서 시작하여 김유정으로 끝나는구나 싶다. 의미 있는 일이다. 김유정이야말로 춘천의 특산품이고 소설가 전상국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은 선생이 기자에게 묻는다. “춘천 참 아름답지요?” “예, 선생님. 정말 아름답네요.” 그러나 기자는 춘천에 와본 적은 있어도 정작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들은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추천해줄 만한 명소들을 속으로 하나씩 헤아려본다. 그러다가 생각한다. 춘천이 아름다운 까닭은 이곳에 소설가 김유정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또한 소설가 전상국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하지만 그쯤은 기자도 알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이렇게만 말한다. “맞아요. 춘천은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