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이 버클리대학에서 낭독회를 한 번 가졌고, 여행을 조금 했으며, 애초에 계획에 없었던, 샌프란시스코 체류기(표류기에 더 가깝게 여겨지는) 비슷한 글을 꽤 많이 썼는데, 분량을 조금 더 보태면 책으로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샌프란시스코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지내기에 충분히 괜찮은 곳이고, 그런 곳이야말로 정말 괜찮은 곳이고 어쩌면 특별하기까지 한 곳일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면 이 도시 역시 그렇게까지 특별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나마 이 도시를 괜찮게 만드는 것은 이 도시가 품고 있는 다양성과 자연스러움인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의 도시 가운데서도 가장 열려 있고,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곳 중 하나이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있는 여러 공원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공원으로, 그곳에 가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하는 돌로레스 파크에만 가보아도 이 도시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만드는지를 알 수 있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찾긴 하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이곳은 공원 자체로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게이 커뮤니티가 있는 캐스트로와 멕시코계가 많이 사는 미션 지역 사이의 야트막한 언덕에 잔디와 나무 몇 그루를 심어놓고, 구석에 농구 코트를 만들어 놓은 것이 전부인 이 크지 않은 공원은 이 도시 사람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곳 중 하나이다(이 공원은 동네의 공원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하는데, 공원에 필수적인 것은 풀밭과 몇 그루의 커다란 나무들이고, 거기에 인위적으로 더해지는 구조물들은 최소화할수록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서울에 나무 몇 그루와 풀밭만 있는 공원을 조성하면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수도 있으니 결국 어떤 공원이 어떤 곳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날씨가 좋을 때면 천을 깔아놓고 일광욕을 하고, 책을 보고, 요가를 하고, 친구들과 함께 휴대용 트램펄린을 가져와 설치를 한 후 모르는 사람들과도 뜀뛰기를 하면서 어울리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젊은 친구들과 노인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여기에 가끔 실성한 여자가 혼잣말로 소리를 치고, 가끔 무슨 생각에서인지 알 수 없는 희한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지나다니고, 쇼핑카트에 모든 짐을 실은 거지가 와 달콤한 낮잠을 청하는 장면들이 어색하지 않게 더해진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그 자연스러움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 자연스러운 상태는 사실 아주 간단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다른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가 타인에게 침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타인이 무엇을 해도 그것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으면 된다.
한국에서는 누군가가 조금만 이상하게 굴면 너무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곤 하는데, 그것은 아직도 바람직한 의미에서의 개인주의가 정착되기까지 요원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 사람들이 남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에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두는지는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지는 샌프란시스코의 수많은 축제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본래 성적 소수자를 위한 축제였지만 이제는 이 도시 시민들과 미국 전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샌프란시스코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PRIDE PARADE 축제는 지난 반세기 동안 사회적 금기를 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많은 희생이 따르기도 했다) 한 사회의 포용력의 범위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물론 아직도 이곳의 LGBT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더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잘 보여준다.
실제로 보면 그렇게 놀라울 것 없는 이 축제는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귀엽게 뽐내기도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축제라면 나이나 성별, 성적 취향 등 개인적인 차이를 뛰어넘어 모두가 함께 즐기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한국에서는 나이가 다르면 서로 거의 어울려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래서 따로따로 논다. 함께 하는 문화가 사실상 없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어쩌면 계속 따로 놀며 함께 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서로 꼭 같이 놀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이 축제만 보아도 미국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 다양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다양성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적인 편리함을 거부하고 단순한 삶을 고집하는 아미쉬 공동체와, 자신들만의 독특한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몰몬교도(이들의 세력은 생각 이상으로 큰데 하와이에도 아주 큰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에서부터, 히피의 시대가 끝난 후에도 대안적인 삶을 찾아 미국의 여러 곳으로 흩어져 정착하여 계속해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많은 히피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홈리스로 사는 사람들까지 삶의 방식도 정말 다양하다. 그리고 홈리스와는 다른, 여기저기를 떠돌며 사는 사람을 떠돌이 드리프터(drifter)라고 하는데, 떠돌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만 일을 하는 트램프(tramp), 아예 일을 안 하는 범(bum), 방랑을 하며 일을 하는 호보(hobo) 등으로 세분화된다.
이 가운데서도, 아직도 미국 전역에 2만 명 가까이 있는 호보들은 1900년부터 전국 호보컨벤션을 열어오고 있으며, 자신의 삶은 스스로 결정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료 호보와 자신들이 찾은 곳의 주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등의, 나름의 윤리 지침을 갖고 있고, 이들의 문화는 미국문학에서 비중 있는 소재로 다뤄졌다. 또한 잭 케루악과 잭 런던, 유진 오닐과 존 스타인벡 등을 포함한 많은 작가들이 호보로 살았고 호보에 관한 이야기를 썼으며, 파썸벨리(possum belly, 주머니쥐의 배를 뜻하는 말로, 무임승차한, 달리는 기차의 객차 지붕 위에서 바람에 날려 날아가지 않게 배를 바짝 붙이고 있는 것을 의미)와 같은 많은 재미있는 신조어들을 만들어냈다. 샌프란시스코는 호보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으로 시내에서 종종 이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에게 호보로 살아가는 것은 자유를 시험하는 삶의 선택의 문제이다.
한국에서 지내는 것이 정신적으로 너무나 억압적으로 여겨져 미국에 왔고, 그래서 한국에 대해서는 가급적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생각할수록 너무도 이상하게 여겨지는 그 나라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어느 날 밤에는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 접속 했는데, 그 나라가 늘 그 모양이라는 것을 새삼스러울 것이 없게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한국이 월드컵 8강 진출을 위한 시합을 앞두었다는 이유로 사이트의 거의 전부가 월드컵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음에 소름이 돋았다. 월드컵이 벌어질 때면 한국은 하나가 되고, 한국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야말로 무서운 일이다. 한 나라의 국민이 그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다양한 생각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거의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히틀러의 나치가 국민에게 요구한 것과 같은 국가주의적인 것이다. 어느 나라건 어느 시기에건 그냥 자신의 조국이 싫거나, 그 나라가 하는 모든 것에 사사건건 마음이 상하거나,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어야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거대자본들이 이익을 내기 위해 벌이는 잔치인 월드컵에 다수의 국민은 아무런 관심이 없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사실 별로 자랑스러워할 것도 없고, 그래서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좋을, 자랑스러워하지 말면 좋을, 자랑스러워하지 말아야 할 너무도 많은 것들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한국인인 것에, 한국인으로 하나가 되는 것에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보며 너무도 민망했다.
그래도 미국이 그나마 괜찮은 나라라는 것은 문학 상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모든 부문에 있어 상업주의가 다양성을 질식시키고 있고 미국 역시 예외가 아니며,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많이 팔리는 만큼 (어떤 작품은 문학적 가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팔리는) 몇 명의 작가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상업주의에 맞서 문학의 고유한 가치와 다양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끈질기게, 그리고 필사적으로 (필사적이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어지고 있고, 그것을 지원하는 수많은 재단과 뜻 있는 개인들이 있다.
소규모이긴 하지만, 상업성은 고려하지 않고 의미 있는 작품들을 고집스럽게 출간하는 Dalkey Archive Press, Grove Press, New Directions, Archipelago 같은 출판사들이 있다는 것에 미국인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한국의 문학 상황을 미국과 비교하기는 정말 싫지만 차마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게 너무도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미국인들은 다양성이 보장되고 조장되지 않으면 한 나라의 문학이 어떤 한심한, 구제 불능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를, 태평양의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인 한국이라는 나라의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도 알고 있고, 그러한 끔찍한 상황은 피하고자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