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알았다. 실내수영장의 수영 강습에서는 비키니를 입을 수 없다는 사실을. 비키니 입을 나이도 몸매도 아니면서 달랑 비키니를 들고 간 나는 애꿎은 카운터 직원에게 초보 등록회원에겐 미리 좀 알려주시지, 서운함을 내비쳤는데 나중에보니 그건 암벽 초보자에게 굳이 하이힐 신고 오지 말라는 주의를 주지 않는 것과 같은 기초 상식인 듯했다. 그런 기초상식도 전혀 없었을만큼 나는 수영과 거리가 멀었다. 평생 절대 하고프지도, 할 수도 없을 거라고 믿었던 운동이었다. 깊은 물에의 병적인 공포증 때문에 부모님께서 계셨던 영종도까지의 15분거리 배타기도 쩔쩔맸었으니까. 그런 공포를 극복하면서 산 비키니인데 처음부터 난관인 거다. 더욱이 인터넷까지 소문난 기존 아줌마회원들의 텃세 역시 대단했다. 초보인 내가 행여 머리도 안감고 수영장으로 갈까 여차하면 달려들어 직접 머리를 감겨줄 기세이더니 비키니밖에 없다고 하자 당장 서슬들이 퍼랬다.
할 수 없이 원피스 수영복을 사 입고 뭔지 위태로운 기분으로 강습에 참가했다. 그러나 계속 수영장 모서리를 구명보트처럼 붙든 채 상반신에 온 힘을 다 주고 있다가 겨우 어깨 힘을 다 놨다 싶은 순간이었다. 계속 세로로 가라앉던 몸이 그 무섭고 무겁던 물위로 스르르 떠올랐다. 아아 힘을 거둔 힘이 갖는 위력이라니. 무거움을 일순에 제압하는 가벼움의 힘이라니. 이러면 곧 공중부양도 가능치 않겠는가. 나는 가벼움의 위대함에 완전히 취해버렸다.
그 수영말고도 지난 여름, 깨버린 평생의 철칙이 하나 더 있었다. 라디오 방송원고는 누구나 무심결에 들어도 즉시 이해할 수 있는 중3 수준의 구어적 내용과 결론이어야 한다. 그나마 진행자의 목소리에 실려 방송될 때는 덜하지만 원고 상태로 보면, 특히 문인의 기준으로 보면 유치하고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글이다. 그래서 문인들한테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책으로도 절대 펴내지 않으리라, 이십여 년이 넘게 한결같은 철칙으로 지키며 일해왔었다. 그런데 그 철칙도 깨버렸다.
그러기 위해 나 자신에게 날마다 새로운 변명과 논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서너개 출판사가 계약금부터 내민다는 아주 빈약한 과시거리도 있었고, 심지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제공한 날도 있었다. ‘우리가 저녁을 먹게 되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빵가게 주인이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와 같은 구절을 ‘방송원고 덕분에 오랫동안 경제적인 이익을 얻었으니 그 원고들에게 출판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느닷없는 논리로 바꾸는 식으로. 그러면서 어쨌든 출판사에 보내기 위해 열달치 원고를 하나의 파일에 모았다.
그러나 파일을 보내다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출판사가 아닌 가까운 시인 H의 이메일로 잘못 발송해버린 것이다. 하필 열달치나 되는 총정리 원고를 그것도 시인에게 잘못 보내다니. 너무나 창피해 한달음에 달려가 직접 해당 메일과 첨부파일을 삭제해버리고팠다. 그리고 정신도 번쩍 들었다. 이렇게 창피해하는 원고를 책으로 내려했다니. 당장 계약금을 되돌려주고 출판을 취소하겠다는 다급함으로 출판사 대표의 메일주소를 열었다.
하지만 메일은 결국 쓰지 않았다. 처음 만나던 날 그분께 의례적인 인사 삼아 요즘 출판사들이 어렵다고 야단들인데 괜찮으시냐고 물었었다. 그러자 그분은 뜻밖에도 괜찮다면서 조용히 덧붙였다.
“열심히 만들면 좋은 책이 나오더라구요.” 책의 좋고 나쁨을 자신의 열심에 책임을 두는 분께 느닷없는 변덕의 가벼움을 보일 수는 없었다.
메일함을 그냥 닫는데 그제서야 제일 중요한 논리인 듯 가벼운 방송원고의 출판 결정이 혹시 ‘어려운 시’, ‘어려운 시 쓰기’에의 오랜 피로누적 탓은 아닌지, 너무 무겁거나 과하게 내 자신에게 요구해온 예술성에의 권태와 허무는 아닌지 싶어졌다.
가을엔 제주도에서의 특강이 예정되어 있다. 수영장이 딸린 좋은 숙소를 제공해준다는데 서울서 못 입은 비키니와 너무 쉬워 얕잡힐까 두려운 신간을 들고 가 두가지 종류의 가벼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