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를 정리하다가 졸작 『타오르는 강』의 초고 노트 뭉치를 발견했다. 빗물이 스며들고 쥐 오줌이 번졌는지 여기저기 어룽이 진데다 귀퉁이가 누렇게 뜨고 쿰쿰한 곰팡이 냄새까지 났다. 70년대 말에 쓴 것이니 벌써 30년도 더 지난 셈이다. 두툼한 대학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볼펜을 꼭꼭 눌러 쓴 흔적들이 보였다. 노트 왼쪽 면에 초고를 쓰고 오른쪽 면은 백지 상태로 비워두었다가, 초고를 옮겨가며 다시 추고를 한 흔적도 보였다. 추고를 마치고 나서야 정서를 했다. 초고부터 정서까지 세 번을 쓴 셈이다. 그 무렵 작가들은 대부분 원고지에 바로 쓰지 않고 이렇게 노트에 초고를 쓰고 추고를 한 다음에야 원고지에 옮겨 썼다. 7권짜리 『타오르는 강』(창작과비평) 원고분량이 2백자 원고지로 8천 장 정도이니, 초고에서 정서까지 총 2만 4천 장을 쓴 셈이다. 지금 이것을 그대로 베껴 쓰라고 한다면 나는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래도 내게 그만한 집념과 열정이 있었다는 게 대견스럽기도 하다.
나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모든 원고를 볼펜으로 썼다.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장편 한편을 쓰고 나면 엄지와 검지에 옹이가 박히고 팔이 무지근하게 아파왔다. 이런 내게 아내는 우스갯소리로 “머리가 아프도록 써도 명작이 나올지 말지 모르는데 팔이 아프게 써서야 되겠어요”하고 했고 나는 “머리는 팔보다 더 아프다”고 응수했다. 그 시절 나는 오랫동안 다니던 신문사에서 해직을 당해,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돈이 되는 글이라면 아무거나 마구 써댔다. 나뿐만 아니라 그 시절 대부분의 전업작가들은 팔이 아프도록 글을 써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85년 순천대학에 교수 자리를 얻게 되어서야 나는 수동타자기를 사용했고 다시 전동타자기로 바꿨으며 90년대에 들어 컴퓨터로 글을 썼다. 컴퓨터로 글을 쓰니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많았다. 줄바꾸기, 끼워 넣기, 지우고 다시 쓰기 등이 편리했고 속도도 더할 나위 없이 빨랐다. 그러나 컴퓨터로 쓴 후로 나는 늘 원고지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원고지의 상큼한 잉크냄새를 맡고 원고지 한 칸 한 칸 정성스럽게 메워가면서 문학에 대한 엄숙성과 순결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더욱 나는 문학청년 시절 혼자 소설 공부를 하느라 무턱대고 기성작가들 작품을 원고지에 필사하면서 끈기같은 것을 익혔다. 소설집을 몇 권이고 필사하면서, 작품을 쓴 작자의 열정과 노고와 철학과 작가적 삶의 체취까지도 흡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대학에서 소설창작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기성작가 작품을 필사하는 과제를 내주곤 했다. 중편소설 한편, 단편은 3편을 원고지에 그대로 베껴서 제출하도록 한 것이다. 나는 이 과제를 통해서 원고지 쓰는 법, 작가의 집념과 끈기는 물론 소설에 대한 엄숙성을 스스로 깨닫게 하고 싶었다. 과제에 부담을 느낀 학생들의 불만은 컸다. 그 때마다 나는 『타오르는 강』을 초고에서 추고 정서까지 세 번 쓴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의 노고와 집념을 알아달라고 했다. 수강생들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5년 동안 나는 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은 수강생 미달로 폐강 위기에 놓이자 이 과제를 없앴다.
나는 필사 과제를 없애는 대신 습작을 할 때는 되도록 컴퓨터 대신에 원고지를 사용하라고 당부했다. 원고지를 한 칸 한 칸 메워가면서 글 쓰는 사람의 성실성과 엄숙성을 스스로 터득하도록 했다. 작가가 200자 원고지 앞에 펜을 들고 앉아 있을 때의 마음은 농부가 모를 심기 위해 2백 평 논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아야한다고 했다. 농부는 절대로 대충 모를 심지 않는다. 다섯 손가락으로 적당한 모숨을 잡아 물 위에 뜨지 않도록 알맞은 깊이의 속에 꽂는 농부의 마음은 진지하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작가도 농부의 마음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소설이 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인쇄소에 달려가, 내 이름을 박은 원고지 한 뭉텅이를 찍어서 끙끙대며 들고 왔던 때가 그립다. 그 때 품었던 뜨거운 열정과 그 때 맡았던 상큼한 원고지 잉크냄새는 다 어디로 숨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