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글 / 임동확_시인. 평론가.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1960년생
시집 『매장시편』『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운주사 가는 길』『벽을 문으로』『처음 사랑을 느꼈다』『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시화집 『내 애인은 왼손잡이』, 산문집 『들키고 싶은 비밀』,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등

김지하_시인. 1941년생
시집 『황토』『타는 목마름으로』『오적』『애린』『검은 산 하얀 방』『이 가문 날의 비구름』『별밭을 우러르며』『중심의 괴로움』『화개』『못난 시들』, 저서 『밥』『남녘땅 뱃노래』『살림』『생명』『생명과 자치』『사상기행』『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남』『김지하 사상전집(전3권)』『김지하의 화두』『촛불, 횃불, 숯불』 등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시인 김지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에게 우호적이든, 비우호적이든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정도는 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과연 김지하에 대해 무엇을 제대로 아는가 물으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을 만나기 어렵다. 왜일까. 최근에 한꺼번에 간행된 시집 그의『못난 시들』과 『촛불, 횃불, 숯불』 등 네 권의 산문집을 보면서, 나는 우선 그 원인 중의 하나가 원효가 말한 ‘이변비중(離邊非中)’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좌익에선 배신자/우익에선 빨갱이/중간파는 찍어 죽일 놈”(「못난 시 700」)이라는 그에 대한 비판은 좌우 양극단을 버리되 중간도 아닌, 전체적인 차원 변화의 진정한 중도(中道)에 서려는 그의 삶과 사상적인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그야말로 좌파도, 우파도, 중간파도 아닌 그의 독창적인 행보가 그에 대한 반감이나 외면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지하는 그렇듯 좌파냐, 우파냐, 아니면 중간파냐는 조악한 기호론적 게임이나 허구적 신화를 넘어서 있다. 촛불 집회를 전후로 이른바 좌파와 우파, 그리고 중간파에 대한 엄혹한 그의 비판이 그렇다. ‘촛불’을 정치 투쟁의 장으로 몰고 가려는 좌파나 폭력적 진압과 현 정권의 엉터리 독단을 합리화하려는 우파 ‘까쇠(Casseur)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은, 그가 어느 편에도 자유로운 시인임을 웅변한다.

그렇다면 그는 이른바 절충주의자나 중간파인가. 단연 아니다. 그의 창날은 어쩌면 형식화된 환경운동론이나 온생명론, 통섭론에 연루된 이른바 ‘중도 까쇠’ 또는 ‘중도 짝퉁’에 대한 비판이 가장 혹독하다. 좌우 양극단을 벗어나는 척하는 인간중심주의자 또는 다위니즘의 변종인 사회생물학자 등이 포진한 ‘짝퉁 중도’에 대한 비판의 창끝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적이고 문학적인 위상을 어느 일방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의 ‘이변비중’의 태도와 실천을 전혀 모르고 있는 자들이다. 그에 대한 끊임없는 오해와 비난은 ‘이변비중’을 넘어 ‘비중이변(非中離邊)’, 즉 좌우 양 극단과 대결하기 이전에 그가 중도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삼지창(三枝倉)의 긴 창날을 들이대는 이유가 무엇인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왕 ‘삼지창’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내가 볼 때 전생에 자신이 ‘싸울아비’였다는 김지하가 ‘이변비중’과 더불어 세상에 맞서 담론을 펼쳐가는 방법은 당파법(鏜把法) 내지 당파논법(鏜把論法)이다. 전쟁기가 아닌 평화기엔 반드시 늙고 병든 짐승이나 소 잡는 데 한정해서 썼다는, 서로 다른 길이의 날을 가진 삼지창의 논리가 그의 말과 논리 속에 들어 있다. 그가 사회적이고 문화적으로 낡고 병들어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온갖 짝퉁의 이론이나 이념을 공격할 때, 병든 짐승이나 늙어 저승으로 보낼 생명에 한정하여 쓰였다고 하는 당파창의 논법이 사용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상대방을 공격할 때 삼지창 가운데의 긴 창날로 먼저 폐나 심장 같은 핵심을 찌르듯 문제점이나 오류를 가차 없이 비판해 들어간다. 그런 다음 중간 날로는 왼쪽, 가장 짧은 날로는 오른쪽을 차례로 대상 짐승을 천천히 찔러 가능한 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듯 상대편의 논리를 스스로 거두게 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큰 깨달음으로 이어지도록 한다. ‘비슷하되 결코 그렇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마땅한 도리를 찾는 법’(似然非然之間當然之法)인 원효의 당파논법이 그의 논리와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

물론 그가 모든 경우에 이런 당파논법을 적용하는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이번에 나온 네 권 산문집에 “오자(誤字)가 많더라”는 얘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쏟아낸 말들이 그 좋은 예이다. 대담 장소인 인근의 식당으로 가는 동안, 대뜸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대학원생이 ‘종로’를 한문으로 못 쓰는 사태는, 박정희 정권 때 추진된 ‘한글 전용’에 찬성하고 나선 ‘창비’의 백낙청 교수나 ‘문학과지성사’의 김병익 선생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한다. 민족문화의 소중한 유산인 판소리를 금지시킨 김일성이나 어설픈 민족주의의 일환으로 ‘한글 전용’을 막무가내 밀어붙인 박정희는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한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은 그걸 반대하거나 심사숙고했어야 마땅했다는 쓴 소리다.

그러나 그의 창끝은 단지 ‘한글 전용’에 대한 문제점 지적에 그치지 않는다. 우선 한문(漢文)이 중국민족 고유의 산문이 아니라 동북방 지역의 10여개 토착 부족, 샤머니즘 문화권의 공동창작임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반증으로 화하족(華夏族)의 사초에 나오는 동북아 지역의 신화나 고대 홍산․용산 문화의 흔적들을 제시한다. 또 결승문자나 한자의 훈(訓)이 아닌 음(音) 중심으로 봐야 그 뜻이 제대로 밝혀지는 한자 등으로 미뤄보아 한자가 중국인들의 문자일 수만은 없다고 주장한다. 한자는 화하족과 더불어 동이족 등이 협력한 슬기로운 공동창작이며, 한자는 중국문자라는 주장은 일종의 콤플렉스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국이 한민족의 기원을 ‘기자동래성(箕子東來說)’에 두거나 ‘동북 공정’을 ‘요하(遼河)문명’이나 ‘홍산(紅山)문화’의 독점으로까지 소급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망상적 제국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달러 대신 ‘위안화’를 세계 기축 통화를 삼겠다는 야욕도 마찬가지다. 단지 국력이 단지 돈만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 군사력과 사회적 성숙도 등 복합적인 것이라면 경제만으로 세계를 꿈꾸는 것은 헛꿈에 불과하다. 오늘의 세계가 “저마다의 자유와 개성을 바탕으로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 대세인데 중국이 획일을 의미하는 세계 통일 운운은 21세기적인 망상에 불과하다”는 캐나다 ‘토론토 타임지’의 충고를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가 볼 때 중국은 주권 존중이나 민주주의 등 초보적인 보편 교육조차 실시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과학시대의 성과를 무시하고 ‘주역’으로 세계의 모든 변화를 해석하겠다는 것은 자기중독 내지 자기망상에 불과하다. 달라이라마에 대한 박해나 중국 내 소수민족들에 취하는 정책들을 보면 대국의 자격이 없다. 특히 지구상의 ‘대혼돈’과 국제금융 위기, 생태계 이상과 극단적인 광기와 분열이 예술이 판치는 현상들에 대해 주역적인 세계관이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중국은 물론 어느 나라든 언필칭 ‘문명’ 대국의 자격이 없다고 덧붙인다.

근래에 김지하 선생이 거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혹시나 하여 전화한 결과, 뜻밖에 흔쾌히 성사된 대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자꾸 들어도 나에겐 낯설기만 한 경제 이야기들이다. 그는 권력과 자본의 중심이 서에서 동으로,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옮겨오고 있는 이른바 ‘동로테르담 시대, 아메리카를 팔아서 아시아를 사라’는 미국 월가의 농담처럼 이른바 아시아태평양 신문명은 거대한 자본의 이동과 함께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세계에서 가장 돈 냄새를 잘 맡는다고 해서 별명이 ‘오카네(現金)’인 일본인들을 중앙아시아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그만큼 경제적 투자가치가 크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자본주의 역사와 특성을 설파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사적 경제의 흐름 속에서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이른바 일확천금을 노리는 카지노 자본주의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장 등을 ‘모두가 부자가 되겠다고’ 날뛰는 과대망상의 속성 자본주의나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화시키는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 시장이 아니다.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아시아 시장은 약육강식의 경제체제가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호혜시장의 경제체제이다. ‘신성한 백두산’ 위의 물가에서 열렸다는, 수 천 수 만 리 저쪽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고 마음을 엇섞던 ‘신시’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지하가 일부의 질시어린 시선을 감수하면서까지 고대 아시아를 지배했다는 ‘신시(神市)’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대규모 자본 유입과 투자로 인한 새로운 아시아 시장은 ‘슈퍼 버블’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호혜와 교환, 획기적 재분배’를 기반으로 한 ‘신시’의 현대적 전개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가 동아시아와 한국 고대사의 사상적 전통에 지대한 관심과 애정 속에서 시도하는 과감하고 새로운 해석학적 모험은, 다름 아닌 세계사적 추세로서 대규모의 경제적 변화와 그에 따른 새로운 동아시아 문명의 윤리와 비전을 제시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는 그 해법과 전망을 동양, 그것도 동아시아와 한국 전통 사상에서 찾는가? 서양은 그런 문제점들에 대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 않는 것인가? 그에 대해 그는 서구의 경우 예감과 영적 인식 차원에서도 오직 ‘종말론’만 있을 뿐, 앞으로 밀어 닥칠 파천황의 새 우주 및 지구 질서에 대한 예언의 역사와 신화가 없다고 본다. 예컨대 ‘가이아의 복수설’을 밀고 나온 제임스 러브록이나 ‘백년 내에 끝장 날 지구로부터의 행성탈출’을 주장하는 스티븐 호킹의 경고와 예언이 인류 미래에 그 나름대로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의 철학과 신화엔 우주 전체의 변동과 그에 따른 인류의 새로운 삶의 원형이 부재하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을 계기로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제자인 안드레아스 목사와 함께 유명한 독일 녹색당원인 미카엘 데비스를 라인 강변에서 만났던 얘기를 들려준다. 평소 독일의 생태운동이나 녹색당 활동에 호의적이었던 김지하의 기대와 달리, 그날 미카엘 데비스는 “독일 녹색당은 너무나 많은 타협과 분파로 거의 파산 직전이다. 외면의 사회생태학과 내면의 간디즘이나 인디언 영성 등을 결합하자고 했던 루돌프 바로의 영향력도 극히 미미하다. 결정적으로 유럽의 생태학엔 마음이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기대지 말고 너희들이 새로운 생명담론을 제시해라. 우린 그 바람을 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서양의 종말론이나 신화로는 현재의 사회적으로 우주적인 차원의 위기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주장인 것이다.

샤머니즘에 대한 그의 관심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 오늘의 세계는 불교와 더불어 여성적 샤머니즘의 신화에 대한 목마름이 크다. 그리고 이것은 샤머니즘 속에 녹아있는 심오한 생태학적 이해와 인류가 물질 위주의 삶을 초월해갈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위기가 다가올수록 제가 떠나온 곳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특히 그런 점에서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스의 저서에 빠져 있는 일본과 한반도, 사할린과 바이칼, 그리고 한반도와 북만주를 포괄하는 동북방 지역의 샤머니즘은 미래세대를 위해 비워놨다고 할 만큼 여러 가지 면에서 폭발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

예컨대 생명의 주인을 영(靈)으로 보는, 정신과 삶을 연결시켜 보는 동북방 샤머니즘은 어쩌면 ‘신의 장난’이라고 할 만큼 담대한 해석의 여하에 따라 신문명 창조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천고의 신령함을 지닌 아시아 대륙의 드넓은 여백 또는 시베리아의 과소지대(過疎地帶)는 인간과 자연, 이웃 간의 조화와 평화의 샤머니즘이 살아있는 곳이자,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온난화와 기상이변으로 인한 인구 대이동의 거점이 될 수 있다.

김지하가 동아시아의 고대 문화와 동학을 비롯한 한국의 전통사상에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그런 서양의 요구에 대한 동아시아 지식인의 책무나 비교우위론 때문만은 아니다. 이른바 ‘입고출신(入古出新)’을 통한 삶의 개벽과 문화혁명의 근거를 거기서 찾고자 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속에 생명의 네 가지 특성인 관계성과 다양성, 순환성과 영성이 살아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고대로의 복귀를 통한 동아시아의 문예부흥과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 속엔 동학의 개벽원리나 화엄 사상 속에 새로운 생명과 평화운동의 가능성과 잠재력이 풍부하게 담지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김지하가 지난 2008년 대규모 촛불시위에 주목하면서 큰 비중을 두고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정한 조직도 지도자도 없이 그때그때의 토론과 합의에 따라 움직였던 촛불시위는, 우선 그가 꿈꾸는 고대 아시아 ‘신시(神市)’의 현대적 부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그것은 ‘지도자는 함이 없는데 군중이 알아서 모든 것을 아니함이 없는’ 고대의 무위정치의 부활을 의미한다. 한 인물이 아니라 집단지성을 통한 영성적이고 감성적인 합의와 실천은, 대의민주주의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와 생명평화의 문화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동서양의 역사에서 그동안 한낱 보호 대상 또는 훈육 대상이었던 20대 미만의 어린이와 청소년, 여성들과 오갈 데 없는 쓸쓸한 외톨이 등 주변부로 떠돌던 이들이 촛불시위에서 내세운 아젠다인, 천대 받던 먹을거리와 대운하, 의료보험과 입시 교육, 물과 가스 문제 등은 이전의 정치 혁명운동의 슬로건과 다른 일상적 생활 자체로서 세계 역사 초유의 일이라는 평가다. 더욱이 폭력적인 저항방식 대신 보여준 춤과 노래 등 문화적 행동양식은 그야말로 비폭력적인 평화 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사건이다. 이제껏 천대받은 자들이 켜는 ‘촛불’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닌, 하나의 영적 사건이자 오늘의 삶과 문명의 대전환을 의미하는 후천개벽의 길을 비치는 별빛인 셈이다.

그 중에서도 ‘유모차 부대’ 등 촛불 시위에 나선 젊은 여성들은 우주적 변화의 기미를 받아들이고 그걸 생활 속에 실천하는 ‘모심’의 주요한 주체다. 수천 년 동안 부엌데기,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던 아낙들이 평화적 문화운동의 중심에 나선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예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양사의 경우 이성과 질서를 앞세운 가부장적 주신(主神) 제우스에 의해 살해당한 성가족(聖家族) 에로스와 카오스, 가이아의 부활을 연상시킨다. 여성성과 혼돈성이 중심이 되는, 강증산이 말하는 여성 중심의 ‘음개벽’의 현실화를 뜻한다.

김지하는 그렇다고 무조건 여성성을 옹호하지 않는다. 예컨대 펀드장사나 주식투자, 부동산투기나 이자놀이, 희귀상품 매입 등으로 큰 이득을 취하는 데 익숙한 강남아줌마들. 이른바 유한층의 부르주아 여성들을 뜻하는 ‘파스쿠치(pascucci)’는 ‘모심’의 반대편에 서 있는 부정적 모성을 대표한다. 국제적으로 ‘미시즈 버블(Mrs. Bubble)’들로서 시끄러운 예수 숭배그룹이기도 한 이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박성이나 비인간성을 생활화하고 타락한 문화와 유행을 파급시키는 첨병에 불과하다.

문제는 자신의 아이들을 입시 경쟁과 출세 지상주의로 내몰고 있는, 무섭고 이기적인 어머니와 컴컴한 혼돈 일변도의 여성성이 문명 전환기를 지배할 때이다. 김지하는 여성들이 위대한 살림과 모심의 모성을 포기할 때, 남성들은 아이들과 손을 잡고 상고 시절과 똑같은 가부장적 지배와 폭력이 다시 한 번 반복될 거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최근의 유럽 문화와 중국 사상계의 흐름을 제시한다. 남성과 이성, 균형과 질서 중심의 칸트·헤겔 류의 낡은 객관적 관념론과 통치술 차원의 공자철학의 부활이나 주역체계의 복귀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남성주의의 복귀는 그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 페미니즘의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다. 젠더(gender) 투쟁으로 변한 여성주의가 남자들을 원수로 만들었고, 결국 유럽 남성들의 극심한 거부감을 불러오고 있다. 거기엔 물론 금융위기에 따른 유럽의 열패감이나 질서보다 혼돈을 앞세우는 들뢰즈 등에 대한 혐오감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지나친 여성의 남성화의 이면에 서구의 변증법이 자리 잡고 있다. 서구 페미니즘 실패는 근본적으로 투쟁과 갈등을 본질로 하는 서구 사상사의 필연적 결과인 셈이다.

그러나 북한의 경락학자 김봉한의 생체 연구와 그에 촉발된 일본 경락학회의 해석학 등에 의하면 18세기 근대에 들어오면서 인간 몸 안에서 당나라 초기의 명의(名醫) 손사막이 우연히 발견한 ‘아시혈(阿是穴)’과 ‘천응혈(天凝穴)’과 그 이후에 별로 보이지 않던 ‘혼돈혈(混沌穴)’ 등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원시 샤머니즘의 여신(女神) 시대나 모권제 중심의 우주관이 붕괴된 후 그리 높이 평가되지 않던 여성들의 회음혈(會陰穴)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주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회음혈이나 월경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 여성 중심의 문명 전환을 알리는 회음혈을 단지 섹스와 배설의 자리로 인식하기 일쑤다. 하지만 하늘을 모시는 원단전(原丹田)이며, 마음을 몸 아래쪽으로까지 낮추어 성(性)이 성(聖)이 되고, 신(身)이 신(神)이 되는 참다운 신령이 ‘내리는’의 영역인 회음혈의 재출현은, 새로운 모성과 모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징표다.

그래서일까. 김지하는 바하오펜의 『모권론(On Matriarchy, 1861)』을 통해, 그는 왜 여성이나 어머니가 저주받은 존재로 전락한 것인가, 수천 년 전에 존재했던 그것은 어떻게 남성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되고 폐지되었는가를 묻고 있다. 그러면서 가부장제 이전의 모권제 근원에 있는 여성성으로 모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야말로 무섭고 어두운 모성 이전의 여신 창조의 신화적 지평 속에서 모계직계혈통 중심의 새로운 문화운동을 통한 남녀 간의 평화와 상생의 길을 모색한다.

더나아가, 그는 바하오펜의 논의를 진전시킨 에리히 노이만의 『대모론(the Great Mother)』을 통해서 여성성의 억압이 결국 인류 문명의 불구성의 근원이며, 위대한 어머니의 연구를 통해 여성성의 원형을 복원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되살리고자 한다. 결국 우리는 위대한 어머니의 원형이 우리 자신의 내면적 발달을 이해하는 열쇠인 동시에 문명을 생성하고 발전시켜온 원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지하가 볼 때 모권제의 몰락은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일관한 이시스 여신 대신, 잔인하고 무서운 어머니인 고르곤 계의 여신의 등장에 대한 남성문화의 반역과 함께 시작되었고 보는 것이다.

그런 김지하는 문명의 전환기는 지구적 차원의 재앙과 생태계의 파괴, 금융 자본주의의 불안정과 빈국과 부국 사이의 경제격차 등 대혼돈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지구 자전축의 북극 이동 등과 같은 우주사적 변화와 생태계의 파괴 및 불사(不死)의 괴생명체의 출현, 퇴화한 곤충 날개의 재진화(re-evolution) 등 우주와 지구, 인간과 생명계에 거대한 변동과 혼돈이 함께 온다고 주장한다. ‘신종 플루’와 같은 전염병의 세계적 유행과 물 오염, 에볼라와 바이러스 확산 등 크고 작은 재앙은 동시에 새로운 문명과 세계의 도래의 징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그런 과도기적 사회엔 15세기 이탈리아 중심의 르네상스 도시들인 피렌체와 베네치아 인들이 보여주었듯이 쌍소리와 욕설, 천박한 비유와 언어 파괴의 ‘막말’들이 유행한다. 또한 낮에는 강호순의 ‘범죄적 쾌락(guilty pleasure)'의 살인 행각과 같은 반윤리적 악행이 성행하고. 자살자가 급증한다. 그런가 하면 도착 증세와 이상심리, 극단적인 악과 분열을 추구하는 미적 감수성과 미의식이 출현한다. 생명과 평화가 아닌 ‘죽임과 싸움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하는 ‘괴기(grotesque)’의 미의식이 지배적인 흐름으로 등장한다.

얼마 전 한국 시단의 총아로 떠올랐던 ‘미래파 신드롬’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강간과 살인, 패륜과 근친상간, 정신 이상이나 악몽들로 채워진 이 시들은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귀족들과 교황가의 자식들, 그와 연루된 상인과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악덕이나 파렴치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전통 음보나 율격을 무시한, 처음도 끝도 없는 줄글 형태의 시들은 한 치의 시학적 반성이나 새로운 미학적 규범을 발견할 수 없다. 극단적인 추와 고통스런 괴기로부터 올라오는 어떤 낯선 ‘숭고나 심오’와 만나는 데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르네상기의 최절정기 피렌체가 보여주었듯이 곧 이러한 문화형태에 대한 권태기가 온다. 엽기적이고 괴기한 것들과 반대되는 현상들이 서서히 출현한다. 시커먼 어둠과 혼돈 속에서 그가 ‘흰 그늘’이라 명명한 숭고하고 심오한 것들이 올라온다. 야콥 브룩하르트가 말하는 ‘흰 눈부심을 거느린 악마들의 시위(invienttamentliche ausbrachtheit)'라고 할 수 있는 미학 열풍이 일어난다.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그 중의 하나이다. 불과 1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는 사회적 문화적 혼돈을 뚫고 나온 위대한 아시아발(發) 네오 르네상스의 첫 촛불을 켠 대사건이다. 동물 사료를 먹이는 미국의 미친 쇠고기 수입 파동 속에서 소의 ‘영성’과 생명성에 주제를 맞춘 <워낭소리>는, 전통의 생명사상과 공경의 정신을 오늘의 한국사회와 세계에 부활시킨 아름다운 영상이다. 또한 한갓 짐승일 뿐인 소와 인간 사이의 ‘모심과 친교’를 감동적으로 되살린 영화이다

그런 <워낭소리>의 핵심은 ‘늙은 소의 울음’, 그가 볼 때 우연히 포착한 소의 ‘흰 눈물’은 감동을 조직화하는 망상적 변증법의 미학 ‘몽타주 이론’을 여지없이 극복한 미학적 일대 사건이다. 특히 할리우드 짝퉁의 고비용 저효율의 상업 영화나 블록버스터 영화들 틈에서 슬며시 배어나온 그 ‘소의 눈물’은, 그 어떤 서구 영화의 문법에도 존재하지 않는 ‘복승미학(複勝美學)’. 그의 설명에 따르면, 숨은 차원의 생성 양식으로 역동적 균형 내지 혼돈적 질서의 신령한 리얼리즘을 탄생을 알리는 하나의 징표이다.

오늘의 한국 시인들에 대한 그의 기대와 실망도 이와 맞닿아 있다. 하루 10여개 이상씩 배달되어 오는 시집들과 각종 문예지들을 다 읽고 있지만, 그의 눈에 우주사적 변화와 세계사적 문명전환기 혼돈과 시꺼먼 어둠과 함께 오는 신성과 구원의 길을 구하고 있는 시들이 거의 잡히지 않는다. 대신 불교 근처를 어슬렁거리거나 적당히 어려운, 이미지 범벅이나 줄글 등 10여 개의 스테레오 타입의 시들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버젓이 발표되고 있다. 유명 시인이라고 해도 편당 4만원 안팎의 원고료를 받을 정도로 돈과 무관한 시를 쓰면서 허명(虛名)에 휘둘리고 있다.

김지하는 시야말로 온갖 고통과 어둠을 피하지 않은 시커먼 고통의 길이며, 무엇보다도 고통과 함께 하는 슬픈 일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파고 사는 행위나 상투적인 시 쓰기의 반복은 자기 기만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수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시인은 숨 막히는 삶의 그늘과 가난, 온갖 슬픔과 고통의 어둠 속에서 그야말로 흰 영성의 빛이 배어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를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는 시인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 살 때부터 마당에 새를 그려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작년에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는 ‘그림 그리면 배고프다’며 한사코 화가의 길을 가로 막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빠져든 그를 향해 그의 어머니가 매를 들거나 그의 손을 묶어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발가락에 숯을 끼고 오리와 닭을 회벽에 그리자, 이번엔 발가락까지 노끈으로 묶어버릴 만큼 악착스레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김지하 시인이 미학과에 진학한 것은 단연 그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그림길이 막히니까, 그는 그 차선책으로 미학과를 택했다고 한다. 미학과에 가 교수가 되면 생계가 해결 될 것이고, 동시에 그림과도 가까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동기였다는 것이다. 그런 판단이 선 후 그는 고등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해, 미학과에 차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미술학과 대신 미학과를 택한 것은 일종의 타협, 그것도 서러운 타협이었다고 말한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참혹한 좌절감과 상실감에 따른 자기 검열 내지 억압이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를 때리면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하는 그는, 뒤늦게나마 화가의 길을 가겠다고 최근 한 문학잡지에 발표된 시 「서럽고 서러운」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화가로서 그의 마지막 꿈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춘화도를 그리는 것. 그는 적나라하고 더러운 춘화도와 같은 추와 색정의 세계를 통해 가장 숭고하고 심오한 숭고미의 세계에 닿고자 꿈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미학과에 진학하고도 교수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가 스스로 교수의 길을 포기하거나 거부했다는 표현이 옳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친 결벽증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당시 교수 사회의 부정과 타락을 지켜다보면서, 그는 공부는 하되 대학원을 가거나 교수는 안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박정희 정권이 그에게 ‘직업적 혁명가를 지향하는 고의적 장기학적 보유자’라는 호칭을 붙이는 계기가 될 줄이야. 당시 정권의 핵심 담당자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자신이 의도적으로 학교에 오래 학적을 두며 학생운동을 일삼은 것처럼 알고 있지만 저간의 사정은 그게 아니었다며 껄껄껄 웃는다.

그러니까 김지하가 일반 학생들보다 긴 팔년 여 세월 동안 학적을 유지한 것은, 구한말 내각 수상이었던 김홍집의 손자로 당시 미학과에서 동양미학을 가르치던 김정록 교수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교수되기가 싫다”는 이유와 결심을 듣자, “교수사회가 그 정도로 타락했느냐”며 20분 이상 침묵했다. 그러다가 “김군은 학점이 좋아 학비는 내지 않아도 되니, 학부에서 오래 시간을 끌며 공부를 다 해라. 그래서 거리의 미학자가 돼라. 반드시 앞으로 동양의 새 바람이 불 것이다. 하지만 중국학에 기독교를 포함한 한국학의 보충과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김정록 교수의 진심어린 충고와 격려의 결과였던 것이다.

특이한 것은, 그의 학사논문이 15세기 피렌체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에서 벌어진 르네상스 연구였다는 사실이다. 국내 유일의 르네상스 연구가라고 자부할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는 그는, 그러나 당시 주변의 친구들조차 왜 르네상스를 논문으로 제출하는지 의아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의 공부는 그가 동아시아를 포함한 한반도 중심의 네오 르네상스를 구상하는데 있어 중요한 참고가 되고 있다고 전한다. 고대의 문화를 본보기로 서로 다른 문화의 결합으로 찬란한 예술문화를 꽃피웠던 이탈리아 도시의 움직임들이 그의 사상과 담론을 뒷받침 하는 멘토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마고신화에 주목하고 동학 등 한국의 전통 사상에 주목하는 것은, 고대를 현대화하려는 열기와 의욕 속에서 화려하게 르네상스 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그가 꿈꾸는 신문명은 그리스․로마 문명과 고전을 바탕으로 기독교와 인문주의 사상 등 시대와 이념을 달리하는 것들이 융합되어 복합적인 문화예술을 창출하는데 성공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그 모범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김지하의 이런 예언자적 담론 전개와 대안 제시가 모든 이들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한쪽에서는 그를 낭만주의자 내지 몽상가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지하 자신도 그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진리는 당대 사회를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곧잘 다음 단계의 이상 사회에 설계이자 구상을 뜻하는 것이 진리라면, 앞서가는 사람들을 곧잘 못난이 취급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그런 생각의 반영이었을까. 그의 시집 『못난 시들』 한 켠에 “비웃음 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노자’의 말 “불소비도(不笑非道)”를 소개하고 있다. 모든 앞서가는 이들을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자체가 “바로/못난 놈”(「못난 시 101」)이 아니겠느냐는 은근한 반격이다. 미래지향적인 자들을 비웃는 것 자체가 비웃음거리지 않느냐는 반문이 들어있다. 무엇이 잘 되었는지, 잘못 되었는지 따져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어떤 주장을 타매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올바른 지식인의 태도가 아니며, 현실추수적인 보수주의자 내지 현상유지주의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잘 안다는 이들조차 ‘저항적 신비주의자’로 규정하더라고 섭섭해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엄연히 현실주의자라고 강조한다. 그의 담론이나 주장들이 당장엔 비현실적이고 어떤 면에서 환상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엄격한 개념으로서 ‘팍툼(Factum, 현사실)’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촛불시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효과에 대한 그의 견해와 시선이 그렇다. 행여 다른 이들에게 허황하게 비칠지 모르나, 그는 촛불집회에 직접 참석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또한 모 사찰에서 스무 명 남짓의 인터넷 블로거들과 만나 수많은 개별 사례들을 수집하고 대화한 결과였다고 강조한다.

나 역시 그 점에 동의한다. 그의 시나 책을 읽어 갈 때 그냥 지나칠 수 있거나 조금은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알고 보면 과학적 사실로 확인된 사실로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거나 권위 있는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 등 명확한 근거나 배경을 갖고 있다.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대목들도 그 뿌리를 추적해보면, 과연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우주질서나 세계 경제 흐름, 신화세계와 문화운동에 대한 폭넓은 공부와 새로운 안목의 지식이 그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요즘 그는 자신의 회고록을 너무 빨리 냈던 것은 아니었는가 생각하고 있다. 단적으로 7년 후 감옥 생활과 그 이후 공부의 핵심이 한국의 동학과 동아시아 중심으로 한 개벽적 삶과 사상의 발현이었지만,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는 절망감과 초조감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명백히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촛불집회 이후에 전개되는 지구적 규모의 변화와 우리 사회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삶이 그렇듯 딱히 실패만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민주주의 위기론을 들먹이지만, 촛불집회 과정에서 확인된 것처럼 민주주의가 초등학생에게 체질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자신의 삶이 딱히 헛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수많은 문제 제기와 이리저리 뒤얽힌 논리 전개의 만남이었던 김지하 선생과의 무려 8시간에 걸친 대담은, 그야말로 그의 폭넓은 지식과 종횡무진하는 논법을 따라잡기에 솔직히 요령부득이었다. 특히 그가 말한 바를 모두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없는 만큼 그 양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열정적이고 진지한 말과 담론은 생명 해체의 지옥 체험 등 대전환의 숨 막히는 어둠의 때에 가장 고귀한 지혜와 삶의 규범은 바로 모심의 윤리라는 생각과 맞닿아 있다고 느껴졌다. 오늘의 세계에 만연한 혼란과 미구에 들이닥칠 빅 카오스를 극복한 길은 인격과 비인격, 생명과 무생명을 가리지 않고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막론하고 모두 다 거룩한 우주의 공동 주체로 높이 ‘모시는’ 문화와 사회의 대변혁 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김지하 시인과 대담 이후 나눈 통화에서 그는 원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왜 그리로 이사 가는지 미처 묻지 못했다. 하지만 김지하 시를 보면 그는 영락없는 유목민이다. 대부분의 그의 시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의 결과가 아니던가. 자신의 스승 장일순의 땅이자 그의 또 다른 어머니였던 소설가 박경리가 오래 은둔했던 원주, 제2의 고향인 그 땅에서 그는 그 어떤 장소의 혼과 신령한 생명문화 이론을 보여줄 것인가. 다만 한 가지 참된 시인의 참 좋은 반려인 고독과 침묵 속에서 새 문명을 촉발할 당파창 갈고 닦거나, 그토록 그리던 평화와 생명의 촛불을 이 세상의 어둠을 향한 해맑고 어여쁜 흰 그늘의 촛불 한 자루 켜 올리고 있는 그의 실루엣이 손에 잡힐 듯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