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삼국지』(소설로서의 정식 명칭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나 이하 편의상 삼국지라 칭함)에 관해 학위 논문을 쓸 생각을 한 것은 2002년으로 현재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 아시아학과의 학과장인 로스 킹(Ross King) 교수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필자는 예전부터 한국문학과 비교문학에 관한 관심이 있었지만 막상 삼국지의 한국 문학/문화에 관한 영향이란 주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석사 때의 논문 분야와 다소 동떨어진 주제이기도 했고 또한 삼국지의 한국 유입에 관해 기존의 논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어문학을 주연구분야로 하는 킹 교수가 삼국지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라 하면 한국학이란 큰 틀 안에서 고전문학, 고전어학, 현대문학, 현대문화학 어떤 분야의 연구를 하던 삼국지라는 작품에 관한 언급이 끊임없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삼국지는 한국학 연구를 진행한다면 피할 수 없이 계속 마주치게 되는 주제(recurring theme)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설령 삼국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거나 삼국지를 정독해보지 않았다고 해도 삼국지에서 유래해서 이미 상식으로 자리매김한 사항들 , 예를 들어 정치인들을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 조조 등의 삼국지 주요 등장인물에 비교한다거나 계륵(鷄肋)이나 삼고초려(三顧草廬), 읍참마속(泣斬馬謖)같은 삼국지에서 유래한 비유에 익숙해져 있다. 이와는 달리 한국문학을 외국문학으로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삼국지는 어디까지나 중국문학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이유로 정식으로 공부할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려면 삼국지에 관한 선행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모순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한편 삼국지가 한국에 끼친 영향에 관한 영어 논문은 현재까지 단 한편으로 ― 그것도 아주 짧고 오류투성이인 내용이다 ― 서구권에서의 이 주제에 관한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2년 전에 독일어로 해당 주제의 박사 논문이 한 편 발표되었다.) 사실 해당 주제에 관한 한국어 논문도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단 한 편도 서구 언어로 옮겨져 발표된 것이 없다. 다른 한편으론 한국사회에서 수십 년째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차지하며 여러 장르로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당대의 중요 문화 상품으로서의 자리 잡은 삼국지의 위상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삼국지에 관한 기존 연구는 삼국지의 조선 유입에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에 필자의 박사논문은 삼국지와 한국 문화에 관한 배경 지식이 일천한 서양 독자를 염두에 두고 (늦어도) 16세기 무렵에 삼국지가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부터 21세기 현재까지의 삼국지의 한국 문화 전반에 관한 영향을 통시적으로 살펴본다는 필자의 능력에 비해 다소 야심찬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논문 전반부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소설 전파 경로와 유통에 관한 전반적인 고찰, 삼국지의 조선 유입 시기와 판본 고찰, 조선 중후기의 삼국지 독자층 확대와 그 원인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후반부는 비교문학과 번역학 이론을 바탕으로 현대 한국 인기 소설가들에 의해 번역/재창작된 삼국지의 인기의 비결 및 주요 번역의 특징과 삼국지가 여러 다양한 장르의 문화 콘텐츠로 재창작되고 있는 배경과 향후 전망을 고찰해 보았다.
결과적으로 필자의 논문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중국문학과 한국문학, 컴퓨터게임과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매체 연구를 포괄하는 내용으로 발전하여 상당히 포괄적인 시대적, 장르적 범위를 다루게 되었다. 원래 언어학과 중국고전소설 연구로 공부를 시작한 필자로서는 논문에서 다루는 내용이 갈수록 방대해지며 최근의 문화이론을 적용하게 되면서 부득불 공부의 영역을 많이 확장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논문 작성에 들이게 되었다. 또 하나의 어찌 보면 행복한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충은 삼국지의 새로운 재창작물들―새로운 소설 번역, 애니메이션, 영화, 만화, 게임 등의 삼국지 관련 새 작품들―이 논문을 한참 완성하고 있던 최근 몇 년간에도 한해가 다르게 계속 쏟아져 나왔다는 것으로 이미 작성한 원고를 통째로 뜯어고칠 수밖에 없었던 경험도 있다. 필자는 이제 삼국지와 관련한 새로운 창작물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또 일거리가 늘어난다는 생각에 오히려 가슴이 철렁할 지경이다. 한편으론 해외 학자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과 심도 있는 연구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필자가 한국 고전문학뿐 아니라 현대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삼국지에 대한 연구를 서양인들이 익숙한 관점과 언어로 발표하게 되어 부족한 역량으로나마 해외 한국학 연구의 활성화와 다양화에 기여 할 수 있게 되었기를 기대해 본다.
* 필자는 재단의 해외 한국문학 연구지원을 받아 ‘한국문학과 대중문화에 있어서 중국 『삼국지연의』의 영향’을 연구, 발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