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정현기_평론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 우리말로 학문하기 회장. 1942년생
저서 『문학의 사회적 의미』 『한국소설의 이론』 『비평의 어둠걷기』 『한국문학의 해석과 평가』 『포위관념과 멀미』 『그대들이 거기 그렇게』, 시집 『시 속에 든 보석』 『흰 방울새와 최익현』 등
1. 묶이지 않고 사는 일에 대한 생각들
‘바라는 게 없어서 두렵지도 않고 그래서 자유’라고 묘비명에다 그렇게 당당하게 쓸 수 있었던 카잔차키스라는 사람을 곰곰이 생각한다. 그가 태어나 뭔가를 배워 알면서 확인한 것은 자기 나라 옛 그리스란, 이미 거덜 날대로 거덜이 나서, 유럽 박물관에 가야 그 빛났던(?) 자기네 문화유적들이 비명을 지르는 채, 유리 막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문화유적들은 다 도둑질 당해 프랑스로 영국으로 독일로 흘러들어가 유리관에 갇힌 채 발가벗겨져 있다. 새로운 그리스 말로 새 그리스 문화를 만들자고 외치던 사람은 총에 맞아 살해된다. 그렇게 죽은 사람을 존경하였던 그 작가 머릿속에 남는 게 뭐였을까?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묶여 살기를 바라는 것이나 아닐까? 무거운 쇠사슬에 발목을 묶여 어딘가 긴 줄로 몸을 감고 있더라도, 살기만 하면 그래도 된다고, 우리라는 인생은 마음 놓고 늘어져 지내는 꼴이나 아닌가? 모든 사람은 정말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가? 어딘가에 묶여 종처럼 살아도 편하기만 하면 다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거나 아닐까? 카잔차키스가 만들어 낸 그리스 사람 조르바는 악기를 켜는데 자꾸 가로거친다고 손가락 하나를 잘라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그게 자유라고 말한다. 자유!
1909년 안중근은 의병전투에서 진 다음 엔치아 방면에서 열 두 명의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태극기에다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피로 썼다. 당시 그는 일진회 친일 조직패들에게 붙잡혀 죽을 뻔한 수모를 견뎠다. 그는 그 때 자유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다. 그 대신 독립이라는 말을 썼다. 홀로 선다는 뜻은 뭔가? 한 나라가 똑바로 서지 못하면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힘 센 부라퀴들에게 부림이나 당하는 종살이로 떨어져야 한다. 자유란 남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데 따라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어떤 상태일 터이다. 조지 오웰을 평하는 마당에서 그의 친구 케스트너는 이렇게 오웰의 정치적인 꿈을 표현했단다. 피터 루이스가 쓰고 김기웅이 옮긴 『조지 오웰―1984년이냐 동물농장이냐!』라는 책에서 그의 말을 좀 빌려 보기로 한다.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 그 누구도 남에 대해 이렇게 하라, 저렇게 생각하라, 그렇게 느끼라고 강요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게 조지 오웰의 정치적 목표였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진짜 좋은 작가는 이런 생각을 마음에 그려 꿈꾼다. 그러나 그는 『동물농장』 출판 당시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고 소개되는 머리말 쓰기에서 이렇게 썼다.
“모름지기 자유라는 것에 그 어떤 뜻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귀에 쑤셔 넣는 권리일 것이다.”
이 문장으로 출판하려고 했던 글은 끝내 햇볕을 보지 못하였다고 피터 루이스는 썼다. 제국주의 정책으로 세계의 재물들을 빼앗아 떵떵거리며 살려고 애쓰던 20세기 초 대영제국 출신 조지 오웰은 식민지 땅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런던이나 파리라는 휘황한 도시에 사는 가난뱅이들의 힘겹고 쓰라린 생활을 지켜보았고, 거기서 밝은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는 그렇게 시작되어 많은 소설을 남겼고, 오늘날, 그의 소설 『1984년』에서 예언한대로, 딱 맞아떨어진 사회로 개편되어 온, 그런 삶 판 됨을 그는 꿰뚫어 읽었다. 가난뱅이가 없는 사회, 아니 가난이 별로 부끄럽지만은 않은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2. 가난살이에 묶인 사람들에 대하여
좋은 작품을 쓰려고 하는 사람의 조건은 먼저 가난해야 한다고 현대 중국의 어느 작가는 썼다. 가난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작가가 되려고 일부러 가난해 지려는 사람은 없다. 가난은 두려운 어둠이고 외로움이며 슬픔이다. 그런데도 가난한 사람들은 뜻밖에도 많다. 누가 가난한가? 여기 저기 서양에 가서, 또는 이 나라 좋다는 대학에서 공부를 잔뜩 해가지고, 여기 저기 시간강사를 하면서 혼인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리고 글도 쓰면서 자기 능력을 제대로 쓸 만한 일자리가 없나 하고 기웃거리지만 그런 곳은 통 나타나지 않고, 아이들은 커가면서 마땅히 들여야 할 돈은 좀처럼 생기지를 않는다. 이런 지식인 학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아주 많다. 훌륭한 인재들이 가난에 허덕이면서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려니 더욱 죽을 맛이다. 대부분의 한국 작가나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배운 지식인들이 속한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 몸을 움직여 노동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겪는 가난살이 이야기는 더욱 캄캄한 벼랑 위로 깎아지른 어떤 곳에 내던져져 있기 쉽다.
가난은 돈벌이와 곧장 매어져 있다.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사람들은 이 나라에 아주 많다. 그런데도 어떤 나팔수들은 우리나라가 문명국가 순위 세계 몇 째다,라고 떠든다. 그런 말은 그저 허황한 말뿐이다. 번쩍이는 도시 건물들이 있고 반짝이는 아스팔트가 있고 때때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태극 마크를 단 채 하늘에 떠다닌다. 그걸 잣대로 삼으면 정말 가난이 무엇인지를 가려내기 어렵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 아니 서양도 마찬가지인데, 지상에는 가난한 거지들이 너무 많이 우글거린다. 몇 천억, 몇 십조 따위 숫자의 돈을 가졌다는 사람 쳐놓고 가난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걸귀 저주에 든 에리쉬크톤처럼 너무 많이 가진 이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차지 않아 재산이나 땅이나 건물, 전쟁을 통한 사람들의 피 따위 먹어치우지 않는 게 없어 보인다. 그들은 행운아라고 스스로 착각하면서 남을 종으로 부릴 돈 놀이에 빠져 허기증에 허우적거린다.
요즘, 세상에는, 이상한 책들이 떠돌아다닌다. 어쩌다가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을 읽고 나서 퍽 속이 상했는데, 다시 읽은 쑹홍빙의 『화폐전쟁』이라는 책이 사람 속을 뒤집는다.
“국제금융재벌은 RFID기술을 이용해 모든 지구인을 언제 어디서나 감시할 수 있다. 현금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단순한 컴퓨터 키보드 조작만으로도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재산 권리를 빼앗길 수 있다. 자유를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최고로 두려운 장면이다. 그러나 금융재벌들에게는 이런 장면이야말로 ‘신세계 질서’ 최고의 경지다.”
도대체 이 지구 위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운명을 이리저리 바꿀, 무슨 일이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저렇게 찍어낸 돈을 가지고 별의별 장난질을 치는 사람들이 걸신들린 부라퀴 짓으로 가난의 어둠 속에 빠져 있는 한, 휘황한 이 문명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무언가에 꽁꽁 묶인 채, 돌아앉아 자유니 뭐니 헛소리나 중얼거리는 삶을 살지나 않는 것인지? 그래도 사람들은 산다. 돈이 있든 없든 고래등 같은 집이 있든 없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펼쳐진 하늘빛과 공기, 철철이 피워 올려주는 꽃들에게 취해 나날들을 그럭저럭 살아간다.
가난은 정말 그렇게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다. 가난이 걱정이고 근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게 걱정과 근심으로 나날들을 보내는 한, 가난살이가 사람들의 한 살이에 부끄러운 것일 수만은 없다. 엉뚱한 돈으로 사람들 위에 왕처럼 권세를 누리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게걸병에 저주받은 가난뱅이가 아닐 것인가? 그래서 작가됨의 디딤돌이야말로 가난이라고 감히 누군가가 말한 것일 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