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명궁』, 소설 『둔황의 사랑』 『협궤열차』 『여우 사냥』 『가장 멀리 있는 나』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 『삼국유사 읽는 호텔』 『새의 말을 듣다』, 산문집 『꽃』 등
며칠 전에 인사동에서 김형영, 석지현, 정희성과 만났다. 우리의 만남이 무엇인가. 홀연히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시동인지 <칠십년대>의 동인이었다. 제호에 이미 나타나 있지만, 그러나 창간호는 1969년에 나왔다. 그러하니, 나는 아직도 청진동 그 언저리를 오가고 있는 것이다.
청진동이란 도대체 어디인가. 광화문에서부터 종로 네거리까지의 그 뒷동네 어디쯤인가. 한 이태 전에 김정환 시인과 어떻게 어울렸다가 새벽쯤 이른바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술자리를 마감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 흔히 그랬다고들 하는 고전적인 행로를 밟은 셈이다. 그러나 끼니로서의 해장국을 별로 즐기지 않는데다가 술자리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해장국집이란 어정쩡한 공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예전에 문인들이 진을 쳤다는 청진동 운운하면 어설픈 느낌이 앞선다. 술집이라면 그저 불사불굴의 자세로 임전무퇴, 인사불성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끝없는 대화로 예술혼을 불태우고 이튿날이면 새로 태어나야 한다. 어제의 대화록은 한낱 ‘포-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같은 것. 그러나 잠재의식의 깊은 광맥 속에 묻어두기로 한다. 문학이란 잠재의식에 내공을 쌓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술꾼들이 설익은 사교를 하며 아무것도 새롭지 않은 대화를 건성으로 나누는 광경에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아직도 청진동 언저리를 헤매고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말해, 여기서 내가 말하는 청진동은 해장국 골목이나 피맛골로 대표되는 그 동네라기보다 종로를 축으로 해서 길게 뻗혀진, 확대된 지역일 수밖에 없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문학 비단길’ 모임은 지금 인사동에서 이루어지는데, 가령 고등학교 때 처음 황석영 선배를 만나 그가 이끈 독서토론회에 기웃거린 것은 1964년(!) 서대문의 신우관에서였다. 그러니까 이 공간에 ‘문인들의 청진동 시대’를 놓고자 하니, 무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또한 놓여진다.
<칠십년대>에는 강은교, 박건한, 석지현, 임정남이 함께 한다. 이 동인의 모임이야말로 청진동이 주무대였다. 김형영이 일하던 <월간문학>의 문협이 광화문에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시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던 시절이었다. 김현 평론가가 가운데 서서 <오적> 이전의 김지하와 대화를 나눈 것도 그 어디였다. 고은 시인도 동인의 이름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삼중당에서 시작한 출판사 생활을 샘터, 계몽사로 이어가며 소설가들과도 어울렸다. 김문수 선배를 정점에 두고 주로 관철동을 누빈 저녁 술판에는 유익서, 황충상, 이채형 등이 드나들었고, 민병산 선생을 둘러싼 문학 주변부 사람들도 자주 얼굴을 보였다. 이 모두 내가 말하는 청진동 언저리에 속한다. 그 무렵의 나는 술 실력이 도저하기만 해서 매일 마시고 또 마시며, 참칭 일지매로 강호에 기담을 남기려 노력하는 듯 보이곤 했다.
지난 세기의 70년대는 내게는 시의 시절이었다. <칠십년대>가 빛을 보기 전에 <신춘시> 동인이 있었다. 신춘문예를 통하면 누구나 참여하는 느슨한 시동인이었다. 발표지면이 극히 제한되어 있던 환경에서 돌파구는 동인지밖에 없던 그 시절은 여러 동인지들이 성가를 높이고 있었다. 나는 동인지들을 사러 종로로 달려 나오곤 했었다. 내가 김수영 시인을 본 적은 한번밖에 없는데, 바로 <신춘시> 모임에서였다. 신입회 때 당선작을 읽자, 그가 보여 달라고 해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대충 읽어본 그는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다였다.
이문구 선배를 보게 된 것은 김동리 선생의 문협에서였다. 그는 누가 오든 말든 대학노트를 펼쳐놓고 깨알 같은 글자로 소설쓰기에 몰두해 있곤 했다. 옆에서 바둑을 둔다, 포커를 한다, 시끄러워도 아랑곳없었다. 그러면서 내게 소설 제목으로 어떤 게 좋으냐고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런 중에도 화분을 돌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무줄기에 이끼 따위를 비닐로 감싸 두르고 뿌리를 내리는 데 열중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수준을 넘어 있었다. <월간문학>이 청진동으로 옮기고 맥줏집 사슴에서 그를 매개로 나보다 좀 위의 선배들과 어울릴 기회도 여러 번이었지만, 특별히 지금까지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은 식물학자 같은 그 모습이다.
나는 70년대 말에 소설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이로부터 소설동인지 <작가>를 만들어 강석경, 김상렬, 김원우, 김채원, 서동훈, 유홍종, 이문열, 이외수, 정종명, 표성흠, 황충상 등과 어울렸다. 첫 책을 내준 것은 그때 종각 뒤에 있던 민음사였다. 그러나 80년대의 나는 경기도 안산 땅에 자리잡게 되어, 청진동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올해 ‘탄생 1백 주년’ 문인 가운데는 『천변풍경』과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로 대표되는 박태원 소설가가 있다. 그의 구보 씨가 다닌 중심축은 청계천변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남대문과 서울역에 이르고, 위로는 광화문과 종로에 이른다. 그러니까 구보 씨의 발길이 닿은 길에서 위의 축은 나중까지도 내내 문인들의 길이었음을 알게 된다. 나 역시 구보 씨의 발길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이제 청진동은 사라졌다. 재개발로 모두 뒤바뀐 낯선 풍경 속에 예전의 대화들은 허공을 맴돈다. 빌딩의 일부로 편입된 피맛골은 피맛골이 아니다. ‘시인통신’이 사라진 것도 오래 전 일이다. 사람 살던 흔적이 이처럼 감쪽같이 사라지는 예는 천재지변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이다. 문학 또한 그렇다. 추억의 축적이 없는 마네킹의 문학. 아무리 신식의 감각이 휩쓸고 있다 해도 오늘의 얄팍한 문학에 가련한 마음부터 앞서는 걸 어찌하랴. 오늘의 세대는 불행한 세대이다. 어느 때인들 동시대는 야만과 불행으로 점철되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 자각을 버린 채 스스로 출구를 막고 있는 형국이다. 이른바 막장인 것이다. 과연 희망이란 있는 것인가. 이를 증언하는 침잠과 성찰의 문학이 설 땅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도 청진동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오랜 시절 청진동의 대화들이 내게 살아 있는 한, 지금 모두들 허상을 좇아 어디로 가고 있다 해도 나는 내가 갈 길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세상은 아름다운 한 권의 책에 이르기 위해 존재함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한 권은 한국어의 영혼의 문법으로 씌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