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이즈음 우리 사회에서의 진리는 오직 ‘소녀들’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저마다 각기 첨예한 이론으로, 퇴로를 상정하지 않은 채 박 터지게 진검승부만을 거듭하고 있는 이 상대주의 사회에서, 그래도 우리 모두의 무릎을 꿇게 만드는 단 하나의 존재는, 바로 ‘소녀들’이다. 과연 ‘소녀들’의 무엇이 우리의 무릎을 이렇게 부끄러운지도 모르게, 온전히 말랑말랑하게 다 드러나게 만들어놓았을까? 그것에 대한 질문이 이번 특집의 요지이다.

사실, ‘소녀들’은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전에도 있었으며, 이후에도 계속 거기 있을 것이다. 이전에도 ‘소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항상 존재했었고, 그래서 각 시대마다, 보는 이(명명하는 이)에 따라서, ‘소녀’들은 무수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왔었다. 그러나 이즈음의 ‘소녀들’이 이전의 ‘소녀’들과 다른 점은, 바로 그 시선들을 거부하고(때론 싸우면서 때론 도망치면서), 역으로 그녀들의 시선으로 우리 모두를 바라보고, 그래서 우리를 변신하게끔 만들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알랭 바디우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녀들은 하나의 ‘사건’으로 우리 곁에 서게 된 것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이란, 기존 질서체계를 교란하고 균열시키는 예기치 못한 ‘사태의 돌발’이다. 또한 기존의 가치관으론 도무지 규정할 수 없고 명명할 수 없는 ‘결정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건’의 개념에 가장 충실하게 다가서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소녀들’이다. 그녀들은 아무도 행동하지 않을 때 가장 먼저 촛불을 밝히고 광장에 서기도 했으며, 또 때론 파란 풍선을 흔들면서, 2박 3일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한다. 기존의 문법들과 독자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소설과 시들을 써내는가 하면, 아빠 또래의 남자들을 꼬드겨 돈을 뜯어내기도 한다. 이 중 어떤 것이 이 시대 진정한 ‘소녀들’의 모습인가 판별해내는 시도는, 십중팔구 ‘소녀들’을 ‘소녀들’로 보지 않고, 그저 기성에 포획되고 포섭되어야 할 어떤 대상쯤으로 생각하는, 비윤리적이고 독선적인 작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 우리 시대의 ‘소녀들’은 그들 스스로를 복수(複數)의 ‘소녀들’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 사이, 예술적인 것과 비예술적인 것 사이의 위계질서를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들끼리 연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녀들의 움직임은 다분히 윤리적이고, 기존의 이해 지평에서 벗어난 행동들이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개입’이란, 그러한 ‘소녀들’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바라보고 인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녀들의 돌발 사태와, 결정 불가능한 에너지와, 무시당한 위계질서를, 이 시대의 진리로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주체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다시 처음부터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벌써부터 이미 그러한 징후들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역시나, 시가 제일 먼저 나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녀들’의 시대가 아니고, ‘소녀들’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