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귀족 소녀의 욕망과 탈선, 그리고 내적 성숙 - 테오도르 폰타네의 소설『에피 브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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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귀족 소녀의 욕망과 탈선, 그리고 내적 성숙
- 테오도르 폰타네의 소설 『에피 브리스트』
글 / 김영주_숭실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1947년생
저서 『테오도르 폰타네연구』, 역서로는 『에피 브리스트』 『독일문학입문』 등
테오도르 폰타네(Theodor Fontane, 1819~1898)는 19세기 독일 사실주의 문학을 꽃피운 작가이다. 사회 현실에 대한 폰타네의 탁월한 감각과 예리한 판단력, 그의 문체의 우아함은 당대는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폰타네의 문학에는 여주인공의 삶과 연애, 결혼, 이혼, 죽음에 관한 모티브가 많이 다루어져 있다. 폰타네 스스로 “여성에게 열광하고 여성의 약점과 오류, 이브의 모든 매력과, 그 지옥을 닮은 면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거의 두 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자신의 여성 애호를 표현하고 있다. 폰타네의 여성 애호 사상은 그의 인간존중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폰타네는 당대 사회현실이 인간의 권리와 인간성 실현을 위해 개혁과 변화를 필요함을 인식하고, 여성상을 모델로 그의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폰타네의 대표작 『에피 브리스트(Effi Briest)』(1895)는 탁월한 작품성을 지닌 소설로서, 플로벨의 『보바리 부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전 세계 여성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소설이다. 여주인공 에피는 유서 깊은 호엔크레멘 귀족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부모와 주위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행복하고 구김살 없이 자라난 순수하고 발랄한 소녀이다. 17세의 에피가 21세 연상인 인스테텐 남작의 청혼을 받아들임으로써, 에피의 삶에 비극적 운명의 씨앗이 던져진다. 귀족관리 인스테텐은 항구도시 케신의 관구장이란 직책을 지닌 남성으로 오로지 자신의 사회적 출세와 명예에 급급한 출세주의자이다. 결혼에 관해 장밋빛 공상만을 일삼던 철부지 소녀 에피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온 결혼생활은 그녀가 꿈꾸던 것과는 영 딴판이다. 결혼과 동시에 에피가 짊어져야했던 관구장 부인이란 사회적 직책은 에피에게 어울리지 않는 구속감과 부담감을 던져 준다. 편협하고 위선적 케신 시골 귀족들과의 의례적인 사교는 에피의 순진하고 자유로운 천성과 맞지 않는다. 공무로 자주 출장을 다니며 집을 비우는 남편 인스테텐은 나이 어린 아내 에피에게 섬세한 사랑과 배려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인스테텐과의 지루한 결혼생활은 에피에게 때때로 공허감과 적막함을 안겨다 준다. 거기에다 케신 집에 출몰한다고 생각한 중국인 유령의 존재는 에피에게 정서적, 정신적, 심리적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급기야 에피는 남편의 군대시절 옛 친구 크람파스와 우연하고 공교로운 기회에 혼외관계를 갖는다. 소설에서 '쉬론'이나 '조크' 라는 불가사의한 자연현상이 상징하고 있듯이, 에피는 올바르지 못한 부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고자 한다. 그러나 여성에게 충성스런 친절을 보이면서, 여성의 심리를 잘 다룰 줄 아는 경솔한 카사노바 크람파스의 유혹을 막아내지 못한다. 에피와 크람파스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7년 이란 세월이 흐른 후, 우연한 기회에 두 사람사이의 비밀 편지 묶음이 인스테텐의 눈에 발견됨으로써 대 파국으로 치닫는다. 당시의 관습대로 에피는 한마디 변명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가차 없이 이혼당하고, 어린 딸을 빼앗긴 채, 고통과 고립 속에서 은둔의 생활을 산다. 사회는 부정한 여성 에피를 결코 용납하지 않고, 에피로부터 철저히 등을 돌린다. 친정아버지 브리스트가 딸에게 친정 호엔 크레멘으로 돌아와 살도록 허락해주었지만, 에피는 부모의 극진한 보살핌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도 옛날의 건강을 되찾지 못하고 죽어간다. 에피는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보이며, 죽음이란 삶의 축제에 초대받았다가,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며, 설령 그 시기가 좀 앞당겨졌다 해도 슬퍼하지 않아야 한다는 해탈의 경지를 갖는다. 그리고 죽음 직전에 인스테텐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휴머니티의 경지를 갖는다.
작품의 마지막은 “죄가 누구에게 있을까?” 라는 부부의 대화에서 “그건 간단히 결말이 나지 않는 광범위한 문제야” 라는 브리스트의 말로 끝맺는다. 죄의 문제는 희랍신화에서부터 현대문학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테마이지만, 이 소설에서 폰타네는 결코 죄의 명백한 소재를 언급하지 않는다. 브리스트는 체념 속에서 자신의 내적인 평온을 지키며, 사물을 관조하는 여유를 갖고, 흑백을 가리지 않고 불분명한 채 놓아둔다. 그는 어떤 사물에 극단적인 명백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균형과 관용을 잃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폰타네의 소설 『슈테힐린호수』의 주인공 둡스라브 백작의 이념과도 흡사하여 브리스트, 둡스라브 백작 등 등장인물은 만년의 폰타네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인스테텐과 크람파스의 결투를 만류하려 애쓰던 뷜러스돌프의 의혹은 당대 사회 규범 및 인습의 절대성에 대한 폰타네 자신의 의혹이기도 하다. 작가는 에피의 탈선에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에피에게 내적 성숙과 휴머니티를 선사한 반면, 사회적 출세와 관습을 우상으로 섬기던 인스테텐의 삶을 후회와 불행으로 결말짓고 있어, 냉혹한 독일 프로이센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을 보여준다. 그래서 독자들은 여주인공 에피의 탈선, 이혼, 죽음의 삶의 과정에 대해 단순한 동정을 느끼는 차원을 넘어, 연약한 철부지 소녀의 인간적 욕구와 경직된 사회와의 갈등을 인식하게 되고, 가련한 여성을 비극적 운명으로 치닫게 한 것이 무엇일까, 도대체 누가 이 여성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표를 던지게 될 것이다.
* 『에피 브리스트』는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발간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