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소설가 박민규는 그의 소설 「절」에서 지금의 시대를 바야흐로 ‘소녀시대’라고 명한 바 있다. 박민규의 말처럼 지금 매체는 ‘소녀’들을 소환하기에 바쁘다. 게레스모에 해군 복장을 입은 9명의 소녀들은 램프의 요정을 자청하며 “소원을 말해봐”라고 속삭이고 티브이 드라마, 영화 속에서도 소녀들은 세계를 구원할 주인공들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여고생들의 윤리가 기존 사회가 요구하는 여고생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가령, <반두비>에 등장하는 소녀만 해도 그렇다. 엄마는 애인 챙기기에 바쁘고, 친구들은 학원 다니기에 바쁘다. 엄마의 집착에서도 자유롭고 그래서인지 입시 강박으로부터 좀 여유로운 민서는 자유롭다기보다는 외톨이에 가깝다. 어른스럽고 독립심 강한 민서는 당돌하다, 혹은 버릇없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소녀이다. 어른들의 세계를 우습게 보는 웃자란 소녀는 세상에 대해 별다른 낙천적 희망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이주노동자 카림의 지갑을 손에 넣고 모른 척한다. 그러니까 민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청소년’은 아니다. 그런데 민서는 근본적인 면에서 훨씬 더 착한 아이라고 할 수 있다. 학원을 다니지도 그렇다고 공명심을 앞세워 법질서를 지키지는 않지만 그녀는 무엇이 필요하고 옳은 일인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민서는 곤란에 빠진 카림을 돕는다. 그녀가 카림을 돕는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2009년 대한민국의 문화적 스펙트럼 안에서 소녀들이 각광받고 있는 것은 ‘민서’의 윤리적 감각과 통한다. 민서는 학교에서 교육받은 질서와 법, 도덕이나 규칙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민서는 학교에서 배운 질서가 단순히 문자적 차원에서 암기할 대상이 아니라 공감하고 실천해야 할 대상임을 알고 있다. 그 앎의 근원에는 바로 기입된 법이 곧 윤리의 전부인양 살아가는 성인의 세계에 정반대에 놓인 ‘순수’가 있다. 지금, 우리 문화가 소녀들을 주목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들의 순수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고생, 소녀들의 순수는 자신의 이익을 따르거나 두려움에 위축되지 않고 윤리적 선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소녀들은 위약한 미성년자가 아니라 세계의 악을 치유할 수 있을, 아직 때 묻지 않은 윤리적 주체로 각광받고 있는 셈이다. <우생순>에 이어 스포츠 영화의 계보를 이은 작품 <킹콩을 들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감동도 바로 소녀들의 ‘우직한 순수’에서 비롯된다. 비주류, 비인기 스포츠라고 할 수 있을 역도를 중심으로 6명의 소녀들이 모여든다. 그녀들은 여고생이지만 교복보다는 운동복이 더 잘 어울리는 아이들이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넉넉지 못하다. 그녀들에게 운동은 취미나 여가가 아니라 지금의 삶을 좀 더 나은 곳으로 견인해 줄 희망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운동에 매달린다. 선생님의 이상한 조언도 마치 금언인양 수행하고 열심히만 하면 대가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운동에 매진한다.

<킹콩을 들다>가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방식은 순진무구한 소녀들이 열심히 무엇인가에 매진하고 이뤄내는 과정으로 구체화된다.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은 순수한 열정이 있기에 그들의 눈물은 순도 높은 감동으로 여과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소녀들은 사회적으로 옳은 것 혹은 더 나은 것이라고 요구되는 것에 당당하게 맞선다. 소녀들은 그러한 요구는 다만 기회주의적인 비겁함이며 또 다른 점에서는 억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2005년 개봉해 뜨거운 논란을 불러왔던 작품 <제니, 주노>도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10대 소년, 소녀인 제니 주노는 엉겁결에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니와 주노는 아이를 낙태하라는 주위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고 다짐한다. 청소년이라기보다 아이에 가까워 보이는 제니와 주노가 기대고 있는 것은 바로 생명은 소중하다는 윤리적 기준이다. 영화 역시 생명의 윤리를 전면에 배치해 그 이외의 다른 요구들을 조건들로 배제한다. 그 아이들이 학생이라는 것, 미성년자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 지 모른다는 가능성과 경우의 수는 생명이라는 절대 윤리 앞에서 고민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생명이라는 절대 윤리 앞에서 다른 두려움을 버린다.

이러한 모습은 공교롭게도 미국 영화 <주노>에서도 발견된다. 우리 영화 <제니, 주노>가 아이를 낳기로 선택한 두 소년, 소녀의 모습을 그렸다면 <주노>는 이 과정을 좀 더 사실적으로 밀착해 보여준다. 부른 배를 내밀고 병원에 찾아가 초음파 검사를 하는 모습이나 아기를 입양해 키워 줄 부모를 인터뷰하는 모습은 소녀라기보다는 책임감 있는 엄마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 <제니, 주노>나 <주노>에서 그려졌듯이 영화 속의 10대는 절대적 윤리 앞에서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가능성과 염려란 사실 절대 윤리를 거부할 변명에 불과하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10대들의 모습, 소녀들의 힘은 절대 윤리를 믿는 순수한 열정의 주체이다.

그러나 한편, 절대적 윤리를 믿고 그것을 타협 없이 관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때로 소녀들은 환멸과 만나기도 한다. 한국형 시리즈 공포 영화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을 <여고괴담>의 소녀들은 환멸과 만난 소녀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여고괴담>의 성과는 ‘여고생’을 한국 사회의 피억압 계층의 상징으로 선택했다는 데에 있다. 수험생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열망을 접어야 하고, 성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당하고 심지어 짓궂은 선생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여고생들은 우리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였다. <여고괴담>은 소녀들이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입고 다치는가를 공포 영화의 문법을 통해 훌륭하게 제시했다. 소녀들의 순수함은 사회적으로 지켜주지 못할 때, 끔찍한 트라우마의 덫에 걸려 버릴 수 있다.

소녀들은 성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악에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는 윤리적 주체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폭력 앞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는 약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녀들을 어떤 존재로 호명하느냐에 따라 영화 속에 그려진 소녀들의 모습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최근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로맨스의 주인공인 소녀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격정적이며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소녀들은, 소녀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소비하는 소녀 계층에서 더욱 각광받는 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인터넷에서 스타로 떠올랐던 귀여니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영화들, <늑대의 유혹>, <도레미파솔라시도>, <그놈은 멋있었다> 등의 주인공은 모두 평범한 10대의 소녀들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들은 동네, 학교 인근에서 가장 멋있다고 소문 난 남학생과 만나 사랑하게 된다. 평범한 외모에 중간 수준의 학업 성적을 가진 소녀들은 외모나 싸움, 학업 성적에서 뛰어난 남학생을 만나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최근 영화와 소설로 세계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트와일라잇>이라는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트와일라잇>의 여주인공은 평범한 십대 고등학생이다. 그녀는 주변에서 귀족이라고 소문난 한 가문의 남학생 눈에 들게 되고, 알고 보니 그는 흡혈귀이다. 사랑에 빠진 소녀는 드라마틱한 운명의 주인공이 된다.

귀여니의 소설들이나 <트와일라잇>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모두 평범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그들은 모두 ‘특별한’ 남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운명적 장애를 만나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알고 보니 남매이기도 하고 때로 원한 관계의 집안이기도 하고 때로 다른 종족이기까지 하다. 10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이러한 로맨스 서사에서 소녀들은 신데렐라의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 문제는 매체들이 이러한 소녀의 이미지를, 부유한 남성에게 간택되어 비극적 운명에 빠져드는 여성형을 소녀들의 소비대상으로 직조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순진무구 하기에 비극적 사랑에 빠지는 소녀들은 하지만 소녀들에게 기입된 환상의 파편이다. 비극적 로맨스에 대한 감각이야말로 후천적으로 교육된 것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소녀상은 소녀들에게 짧은 치마를 입히고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하게 하는 쇼엔터테인먼트 소녀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소녀의 이미지를 누가 소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 그녀들이 모두 대상적으로 남용되고 있는 소녀들임에는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윤리적 주체로서 형상화된 <반두비>의 ‘민서’나 피억압적 주체의 표상으로 그려진 <여고괴담>의 소녀들은 주목해야 할 소녀들임에 분명하다. 당당하게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된 <과속 스캔들>의 ‘소녀’ 역시도 사회의 기존 질서나 편견에 맞선 소녀의 맥락에 닿아 있다. 아직 완강하게 굳지 않은 소녀들을 통해 소비되는 이미지들은 후기 산업화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고 때론 이상적 윤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소녀들을 불러 내 일종의 판타지의 대상으로 소비하고 윤리적 주체로 호명하기도 한다. 누구보다도 먼저 촛불을 들고, 누구보다도 먼저 옳은 일에 목소리를 높이는 주체가 바로 소녀이다.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폭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 '풀'처럼 여리고 순수하기에 소녀들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먼저 운다. 소녀는 우리 시대의 징후를 대변하는 아이콘, 바야흐로, 지금은 소녀시대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