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천운영_소설가. 1972년생 소설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사용법』 『잘 가라 서커스』 등
당신의 고향은 어디인가? 누군가 묻는다. 난감하다. 태어난 곳이 서울이니 서울이라 할까, 초중고를 다니고 여전히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 인천이니 인천이라 할까. 아니면 아버지 고향 무장이나 어머니 고향 순천을 대볼까. 서울이 고향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라 보이고, 부모님 고향에 빌붙기에는 염치가 없다. 태어나기만이라도 아주 먼 곳이었다면 좋을 것을. 고향이란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은데. 미나리꽝이나 갈대밭이나 과수원 같은 게 있으면 좋겠고, 적산가옥이나 소금창고나 향교나 토성 같은 게 있으면 더 좋겠는데. 아니면 물 건너 섬마을이나 산골마을이나 천변마을 같은 곳이 어쩐지 작가의 고향 같지 않겠는가.
언젠가 한중일 작가들이 모여 고향에 대한 주제로 심포지엄을 했을 때, 어떤 작가는 오래전 떠나온 고향이 마음속에서 항상 2km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고, 또 어떤 작가는 떠돌아다니다 멈추는 바로 그 자리가 고향이라고도 했다. 이에 도서관이나 인터넷 공간을 자신의 문학적 고향인지도 모른다는 젊은 작가도 있었다. 서울이 고향인 것이 어쩐지 시시해 보인다는 내 말에, 한 일본 작가가 소울(soul)이 고향이니 얼마나 근사하냐고 부러워해주었다. 정말로 그러한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불광동이다. 부모님 곁을 떠나 산 지 12년, 전세계약이 끝나는 2년마다 동네를 옮겨 다녔으니 이번이 여섯 번째 정착지다. 누군가는 밀려 밀려 거기까지 갔느냐 한다. 차분하고 단정한 동네에서 어찌 그리 번잡스러운 곳으로 갔느냐고도 한다. 그런데 밀려왔다는 느낌은커녕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그래, 고향.
부모님이 각자의 고향을 떠나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무악재였다. 어머니는 서울여상에 입학한 동생 때문에, 아버지는 얹혀살 수 있는 유일한 친척이 그곳에 살아서, 그렇게 선택한 동네가 무악재였다.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던 남녀가 같은 노선의 버스를 타고 퇴근을 하다가 정분이 나는 건 어쩌면 뻔하고도 남는 일. 그리하여 그들이 가족이 되어 보금자리를 튼 곳은 홍제동이다. 그로부터 대략 십년간 홍제동 불광동 연신내 진관외동 삼송동을 전전하던 가족은 결국 인천에 뿌리를 박는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집은 불광동 어느 즈음의 문간방이고, 그 동네는 내 기억 속 최초의 동네이기도 하다.
해가 지고 난 후 나가는 불광동 동네산책은 제법 흥미롭다. 야산을 넘어 은평구립도서관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연신내시장까지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는 게 기본 코스다. 허름하고 작은 단층집들이 닥지닥지 붙어서 끊어졌다 이어지고 무수한 막다른 길을 만들어내는 그 골목길의 이름은 번영1길 번영2길, 행복1길 행복2길.
그 좁고 구불구불한 번영길에는 오래된 미장원이 다섯 개나 있다. 책받침만한 낡은 간판으로 겨우 미장원임을 알 수 있는, 미용기술 하나로 자식 다 키워놓고 난 후 소일거리로 가끔 동네 할머니들 초강력 파마나 해줄 만한, 드라이어기 대신 철컥철컥 불고데기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곳. 그 짧은 거리에 그런 미장원이 다섯 개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골목까지 침투한 대기업 마트의 위협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자그마한 전빵도 물론 있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밤 가로등 아래는 손부채 하나씩 들고 나온 노인들 차지다. 요즘 같은 세상에 고함을 지르며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땀을 찔찔 흘리며 뛰는 아이들을 뒤쫓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전빵에 들어가 하드 하나 사서 애들처럼 쩝쩝 소리를 내며 먹게 되곤 하는 것이다.
번영길에서 나와 시장 한복판에 서서 나는 속으로 말하곤 한다. 자고로 소설가는 저잣거리에 있어야 하는 법. 이만하면 사람 사는 냄새가 제법 싱그럽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고 나면 어쩐지 으쓱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미나리꽝이나 적산가옥은 없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곳이 자꾸만 고향인 것만 같다. 번영과는 거리가 먼 듯한 번영1길에서 나는 고향을 얻는다. 참고로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의 주요 무대는 미장원에 딸린 다락방이고, 그 다락방에서 10년을 숨어 지낸 고문기술자의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