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재단은 미국 서부의 명문 UC버클리와 손을 잡고 ‘한국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소설가 김연수, 시인 김기택, 소설가 조경란 씨에 이어 시인 함성호 씨가 본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다. 지난 6월에 버클리에 도착한 함 시인은 3개월간 머물며 UC버클리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의와 워크숍, 작품발표회, 언론 기고, 미국 내 여행 등의 기회를 갖고 돌아왔다. 레지던스 생활의 이모저모와 프로그램이 끝난 뒤의 감상을 담은 기고문을 2회에 걸쳐 수록한다.
버클리에서 보낸 100일
글 / 함성호_시인. 건축평론가. 1963년생
시집 『성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별』 『56억7천만년의 고독』, 산문집 『허무의 기록』 등
안녕? 잘 지내시는지.
일전엔 전원이 나가 할 말도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입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 이후로 두 쪽짜리 모미(note book)가 고장이 나서 한동안 애먹기도 했지요. 알다시피 여기는 버클리입니다. 정확히는 버클리 옆 도시인 알바니(Albany)지요. 지리적인 위치가 짐작하게 해주듯이 원래 알바니는 버클리에 속해 있었답니다. 그런데 버클리 시에서 알바니 지역을 쓰레기 매립장으로 결정했다고 하네요. 이에 반대해 알바니의 여성(남성들은 뭐했는지)들이 총을 들고(또, 총-여성이나 남성이나) 쓰레기 트럭들을 막았다고 해요. 그래서 주민 투표로 버클리에서 분리 되었다고 합니다.
▲ 숙소에서 바라본 버클리힐의 풍경
알바니라는 이름이 지어진 동기도 생뚱맞습니다. 뉴욕 최초의 시장을 기리기 위해 그가 태어난 뉴욕의 동네 이름을 가져와서 정했다는 군요. 그러니까 뉴욕에도 알바니라는 지명이 있고, 캘리포니아에도 있는 거지요. 알바니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의 등장인물인데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여기 사람들은 'Albany'를 라틴계는 ‘알바니’, 인디아계는 ‘오베니’, 색슨계는 ‘얼베니’라고 각각 다르게 발음 합니다. 신생 독립국인 미국은 (그것이 역사라는 외연을 띨 때)참 어이없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알바니 바로 옆 도시가 엘 세리토(El cerrito)인데 원래는 목장 동네였던가 봅니다. 세 명의 목장주가 모여서 도시를 만드는 데 합의하고 자기 땅을 내놓았다는군요. 더군다나 도시 이름을 자기 목장이름으로 고집하지 않았다고 흐뭇해하는 글을 보니 무슨 부족국가 시대의 연맹체가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는 듯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한반도의 칠가야 연맹도 아마 그렇게 이루어졌지 않았나 싶습니다.
알바니는 이 엘 세리토 지역과는 세리토 개울로 나뉘며 북쪽 경계선을 이루고, 남쪽으로는 코르도니스 개울을 경계로 버클리와 나뉩니다. 나는 이 경계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경계에 가 봤다고 해서 대단한 여행을 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는 경계가 아주 많습니다. 그 만큼 경계와 경계 사이도 작고 좁고, 성격도 다양하지요). 지금은 산파블로 거리를 경계로 동쪽은 모두 복개 되었고, 서쪽으로 샌프란시스코 만까지는 여전히 작은 도랑으로 남아있더군요. 나는 알바니의 북쪽 경계인 세리토 개울이 서쪽 샌프란시스코 만으로 빠져나가는 아담한 삼각주에 자리한, 유칼립투스 동산의 동사면 언덕에서 살고 있습니다. 버클리 시내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고, 바로 뒤는 유칼립투스가 우거진 숲입니다. 며칠 전 밤드리 노닐다 자정이 다 되어 언덕을 오르는데 샌프란시스코 만의 안개가 이 동산을 집어 삼킬 듯 넘어 오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새벽에 이 동산에 올라가 보았는데 뭔가 후두둑하는 소리에 놀라 보니, 유칼립투스 나무가 제 껍질을 마치 귀찮은 옷을 벗듯 하고 있더군요. 길이 이미터나 됨직한 껍질을 제 스스로 벗고 있었지요. 그렇구나 하고, 다시 오르는데 이번엔 풀섶을 밟는 뭔가의 발자국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번엔 긴장하고 어둠을 자세히 보니 사슴 두 마리가 저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조그만 동산에 사슴이 산다는 게 이상해서 저는 뚫어지게(저것이 내가 생각한 그것이 맞나 하고)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았습니다. 사슴 두 마리도 꼼짝 않고 서서 저를 뚫어지게(저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동물인가 하고)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그 상태가 계속 될 것 같아 제가 먼저 발을 떼었지요. 그제서야 사슴 둘도 제 갈 길로 서둘러 사라졌습니다. 제 갈 길이라고는 했지만 이 조그만 동산에 무슨 길이 그렇게 멀어서 바쁘며, 또 따로 갈 길이 있겠습니까만은, 우리는 그렇게 서로 갈 길로 서로에게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 작은 동산에서, 이 작은 동산에서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작은 동산에는 거대한 유칼립투스 나무가 울울하게 서있었지요. 유칼립투스 나무는 원래 이 곳 캘리포니아에서 자생하던 나무가 아니랍니다. 아시다시피 유칼립투스는 호주가 원산지이지요. 호주에서도 특히 남극으로 가는 관문인 타즈메니아 남부 지방입니다. 이곳의 기후가 타즈메니아와 비슷해서 인위적인 식목을 통해 이제는 이렇게 전 도시를 뒤덮게 되었다는군요. 미국은 그랜드캐니언과, 콜로라도 강, 사막 등, 손꼽을 수 있는 몇 개를 제외한 모든 자연은 ‘의사자연’입니다. 만든 것이라는 말이지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자연이 미국의 숲입니다. 비도 잘 내리지 않는 이 서부개척의 역사가 얼마나 무모한 시도였는지, 저는 놀랐습니다. 그들이 얘기하는 ‘프런티어 정신’이라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 바로 이 의사자연들을 볼 때입니다. “어떻게 이걸 만들었지?”하는 질문이 저절로 감탄을 대신해 새어 나옵니다.
버클리 어디에나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가 유칼립투스입니다. “코알라도 있어?”라고 물었지요? 코알라는 없습니다. 대신에 코알라가 즐겨 먹는 그 잎의 향기는 버클리 전 도시를 휩싸고 있습니다.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중국이나 인도의 가솔린 냄새와는 사뭇 다른 향기에 뭔지 모르지만 내가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유칼립투스라는 말은 호주 원주민어로 ‘잘 싸여있다’는 뜻이라네요. 3월에서부터 11월까지, 흰색, 붉은색, 노란색의 꽃이 피는데 꽃이 피기 전에 꽃받침이 꽃잎을 완전히 감싸고 있다고 그런 이름을 붙였나 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나무의 이름을 혼자 따로 붙여 보았습니다. ‘옥수수수염나무’라고요. 유칼립투스의 잎은 구불구불한 레이스처럼 생겨 전체적으로 생기가 없는 모습이지만 무성하고, 장대합니다. 이상하지요. 생기가 없는데도 장대할 수 있다니요. 옥수수수염이 꼭 그렇지요. 푸들푸들하지만 무성하잖아요. 그래서요. 아마 직접 보시면 제가 지은 이름이 꼭 맞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이 나무는 큰 것은 높이가 백 미터나 된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 앞의 옥수수수염 동산에 있는 나무들은 높이가 대략 사십 미터는 되어 보입니다. 그 높이에서 껍질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동산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곳은 일 년 내내 기후가 고른 탓에 모든 식물들이 계속 꽃을 달고 있습니다. 주먹만 한 벚꽃에 아기 머리통만 한 솔방울, 동백은 흔해 빠져, 귀하거나 서럽지 않습니다. 벚꽃이 주먹만 하니, 아찔한 현기증은 고사하고, 심지어는 꽃을 보면 시장기가 돌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식생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식물들을 키우느라고, 스프링클러가 밤 10시만 되면 전 도시에서 작동합니다. 골든게이트 파크의 원시림같은 공원은 원래는 황량한 모래언덕이었습니다. 이곳의 웃자란 풀을 헤치고 보면 마른 실트질 토양이 나옵니다. 이런 토질에서는 풀이나 낮은 관목들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울창한 숲과 대농장들은 웬일이라지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분쟁, 노예,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노동력 같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미국의 역사는 이민의 역사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다시 저는 이민자들을 생각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엔젤아일랜드에는 초기 이민자들을 수용하던 장소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우리의 색동저고리와 남색치마를 보았지요. 보스턴에서도 한국전쟁 참전비를 보았습니다. 벽에 쓰여진 중국인들의 절구들, 그래서 미국의 역사는 이민자들의 역사다, 라고 말해져야 옳습니다. 미시사로 쓰여져야 할 역사가 미국의 역사라는 생각입니다. 이 울창한 숲에서 나는 왜 이런 생각에 휩싸여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민족, 다언어, 다문화 사회라는 건 우리에게는 참 생소한 개념입니다. 이 생소함이 다른 것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날까봐 은근히 걱정도 됩니다. 그만 생각해야겠습니다.
나는 사슴과 헤어지고 필시 정상으로 났을 길을 향해 걸음을 떼었지요. 정상이라 봐야 비록 사슴과 헤어진 장소에서 몇 걸음이지만요, 울창한 옥수수수염나무 숲의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아래쪽에 누군가가 마련해 놓은 긴 의자 두 개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의자는 적재적소에 놓여 있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동쪽으로 눈을 주면 버클리 언덕이, 서쪽으로는 샌프란시스코의 동쪽만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샌프란시스코 만 쪽의 경사지에는 누군가가 매어 놓은 그네가 옥수수 수염나무 가지에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글은 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버클리를 인문지리학적 시각으로 다룬 것으로 추후 글을 마무리하여 다른 지면에 소개할 예정이다. 버클리에서의 레지던c스 생활에 관한 후기는 다음 호에 실을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