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작가와 경전작가 사이의 문학혁명가 - 통속문화를 엘리트 문화로 개조한 85세의 거장 진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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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작가와 문학혁명가, 경전작가 사이
- 전집 2차 수정본을 완간한 85세의 중국문화 거장 진융(金庸)
글 / 박재우_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한일중동아시아문학포럼 조직위원.
지난 2월 말, 필자는 홍콩의 학술회의에 참가하는 길에 빅토리아만이 바라보이는 베이자오(北角)의 널찍한 진융(金庸, 1924~ )의 서재로 초대받아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금년 85세의 나이인 그가 작년에 6년간의 심혈을 기울여 수정한 무협소설 전집 제2차 개정판을 출간하였고, 아직도 정정하게 외국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다. 현재 역사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일본어를 새로 배우며 당나라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 진융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그의 무협소설이 있다”는 진융, 지난 세기 80년대와 90년대에 고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밤을 새워가며 또는 수업 중에 선생님 몰래 그의 무협소설을 보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본격문학”을 소개하는 이 난에 “무협소설” 작가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본격문학의 장에서 무협소설을 거론하기 힘든 우리나라 문단이나 독서계에서는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반문이다. 반면 우리는 진융의 무협소설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일부가 2004년 중국 고교 교과서에 실리고, 『설산비호(雪山飛虎)』가 2007년 북경중학교 어문교과서 독서 교재에 들어가는 현상에 대해 해석이 잘 되지 않아 당혹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국대륙 학계는 통속작가인 진융을 “문학혁명가”, 혹은 본격문학과 맞먹는 높은 수준의 작가나 경전작가로 대우하고 있을까.
진융은 1924년 저장(浙江)성 하이닝(海寧)에서 태어났는데 본명이 자량융(査良鏞)이고 마지막 글자를 쪼개어 진융(金庸)이라는 필명을 만들었다. 1948년 홍콩으로 나온 진융은 언론계에 종사하며 1955년부터 무협소설을 창작하게 된다.
우선, 진융 무협소설의 창작은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시기는 1955년부터 1959년 전후까지로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과 『벽혈검(碧血劍)』, 『설산비호 (雪山飛虎)』, 『비호외전(飛虎外傳)』 등을 창작한 시기이고, 제2시기는 그 후 1965년까지로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과 『신조협려(神雕俠侶)』,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등 우리나라에서는 『영웅문』 1, 2, 3부로 잘 알려져 있는 그의 대표작 “사조삼부작”을 창작한 시기이며, 제3시기는 1965년 이후 1972년까지로 『소오강호(笑傲江湖)』, 『천룡팔부(天龍八部)』와 영웅이 아닌 아Q 식의 소인배를 그려 반(反)무협소설로 칭해지는 『녹정기(鹿鼎記)』 등을 창작한 시기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이 대륙에서 “경전화”되어 간 과정은 어떠할까? 그의 무협소설 15부는 1955년부터 1972년까지 홍콩신문에 연재되고, 10년간의 수정 끝에 1979년 대만에서 15부 26권 전집이 출판되었다. 중국대륙에는 애독자 덩샤오핑과의 만남을 계기로 소개의 길이 열리게 되니, 1984년 11월 첫 작품 『서검은구록』이 출판된다. 그 후 그의 작품들은 우후죽순 격으로 많은 출판사에 의해 다양한 판본으로 출판된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이 거듭 영화화된다. 이로부터 중국 대륙에서의 진융 작품의 가치와 의의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고, 중국 지도층의 “성인을 위한 동화”라는 평가에 힘입어 더욱 널리 읽히게 된다. 1994년 베이징산롄(北京三聯)서점을 통해 36권 본이 출판된 후, 그의 소설은 더욱 널리 퍼지고,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이제 “진융열”은 사회적 신드롬으로 확산된다.
대중독서계와는 별도로 중국대륙 학계에서 그의 작품이 경전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자. 우선 1979년 샤먼대학의 한 교수가 “김학(金學)”을 주창하고, 1985년 연구논문이 나오지만 별 반응을 얻지 못한다. 그러다가 1986년 저명 “홍학(紅學)” 연구가 펑치융(馮其庸)이 재차 “김학”을 강조하며 진융 소설이 중국문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함으로써 진융 소설은 크게 주목을 받게 된다. 1988년, 푸단(復旦)대학의 저명 교수 장페이헝(章培恒)은 야오쉐인(姚雪垠)의 『이자성(李自成)』이 마오둔(茅盾)문학상을 받는 시점에서 글을 발표하여 “순문학과 통속문학을 『이자성』과 진융 문학의 고하를 가르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현실주의의 진실성을 가지고 평가하자면 진융 무협소설의 ‘가중견진(假中見眞)’이 더욱 예술적 감동을 발휘하고, 가독성으로 보더라도 『이자성』보다 상상력이 더 기발하고 구성이 더 긴박하며, 유머감이 풍부하다는 장점이 있어” 훌륭한 작품에 값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중국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김학” 연구의 주력의 하나가 되는 천머(陳墨)는 계속 “김학”을 고취하고, 9권이나 되는 전문 연구서를 출간한다. 1994년은 진융 열이 확산된 한 해였는데, 산롄서점본 전집 출간 외에, 베이징사대의 왕이추안(王一川) 교수는 “20세기 중국소설 대가”의 서열에서 진융을 루쉰, 선충원(沈從文), 바진(巴金) 다음의 제4위에 배치하여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베이징대학 옌자옌(嚴家炎) 교수는 진융의 베이징대학 명예교수 추대 의식 중에 진융 소설을 “조용한 문학혁명”이라고 하면서 엘리트문화로 통속문화를 개조한 만능의 작가로 극찬했다. 그 이후 이 대학 대학원 중문과에는 진융 소설 연구를 선택과목으로 개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어떤 학자들은 진융 소설은 고급한 통속소설에 불과할 뿐이고, “김학”은 성립할 수 없으며, 진융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해선 안 된다고 하였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문인이 왕수어(王朔)인데, 1999년 진융 작품을 엄숙문학 반열에 오를 수 없는 아주 속된 통속문학으로 보았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하여 석사논문과 박사논문, 그리고 천을 헤아리는 일반 논문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위에서 말한 대로 고교 교과서에도 실려 이제 본격문학과 맞먹는 수준 혹은 경전작가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융이 팔십 고령의 나이에 심혈을 기울여 제2차 수정본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은 “유행경전” 작가에 그치고 있는 진융이 구성상의 일부 부족과 디테일상의 적지 않은 오류를 그대로 둘 경우, 지금은 많이 읽힐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역사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질 것을 염려하였던 것은 아닐까? 보다 완숙한 하자 없는 작품으로 수정하여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는 “역사경전”으로 되기를 희망해서가 아닐까. 기실 『의천도룡기』와 『천룡팔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등의 6부는 작품 줄거리까지 비교적 많은 개정을 하였지만, 기타 작품들은 디테일한 부분과 글자 상에서 교정을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개작은 그의 뜻대로 모든 독자에게 만족을 준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부분의 스토리 처리에 변화를 가했지만 아직도 논의가 분분하다. “황약사가 매초풍을 사랑하다”는 부분, “단예가 왕어언과 헤어지다”는 부분, “장무기가 네 미녀를 함께 취하다”는 부분, “양과가 소용녀와 입맞춤을 하다”는 부분 등이 고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다. 위소보와 7인의 부인과의 관계 문제 처리도 논란이 첨예한 부분이다. 이런 논란 속에서 진융은 그렇다면 1차 개정판과 2차 개정판의 두 판본을 모두 유통시킬 작정이라고 하였다. 총체적으로 보아, 진융의 이러한 수정 노력이 “역사 경전”에로 몇 걸음 더 나아가게 했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융의 작품이 다른 무협소설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중국 전통문화를 가장 잘 반영하면서도 전통문화의 비합리적인 부분들을 적절히, 경우에 따라서는 획기적으로 개조하여 담아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진융은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관념”으로 중국전통 무협에 대해 일련의 혁신과 개조를 가하였다고 평가된다. 특히 인물묘사에 있어 전통 정사(正邪) 관념의 보루를 타파하였고, 관 본위 사상과 협소한 민족주의에 대해 반성적 사유를 드러내었으며, 그 기세가 드높고 감개가 깊어 통속문학에 속한 무협소설을 신문학과 같은 개념인 본격문학의 수준에까지 높여 놓았다는 것이 사계의 평가인 것이다.
그 중에서 주목할 점의 하나는 다른 무협작가들이 “한족(漢族)” 중심주의의 협소한 민족주의 입장에 서 있을 때, 진융은 바로 중화민족 대동주의 입장에서 소수민족을 높이 평가하는 자세로 민족문제를 보고 서술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진융도 초기에는 한족 중심중의의 한계를 보였지만, 거란인 소봉(蕭峰)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민족대동”의 주제를 설파한 『천룡팔부』나 만주족 황제 강희(康熙)를 명군으로 그린 『녹정기』 등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흉내 내기 어려운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미 중화권을 벗어나 독립국가로 우뚝 선 한국이나 몽고 같은 나라의 역사를 다룰 때 『의천도룡기』(제9회)나 『녹정기』(제104장)처럼 비하하는 자세로 다루지 말고 좀 더 존중하는 자세를 취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진융의 문학에는 현대정신이 숨 쉬고 있고 모더니티가 많이 녹아 있다. “문학혁명”의 평가를 받으며 역사적 경전 작가를 지향하고 있는 통속작가 진융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중국문학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