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기택_시인. 계간 <대산문화> 편집자문위원. 1957년생
시집 『태아의 잠』 『바늘 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등
가을이다. 나는 종종 가을 첫날을 냄새로 느낀다. 그것은 확연히 피부로 느낄 만큼 선선한 날씨로 오기도 하지만, 내게는 자주 냄새로도 온다. 그 냄새는 이른 아침에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순간에 갑자기 다가온다. 그 냄새는 차고 비리다. 여름에도 비슷한 비린내가 있지만, 가을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가을 냄새는 이제 막 숨 막히는 더위에서 풀려난 풀나무들이 뿜어내는 몸기운의 냄새이며, 이제 막 최대치의 성장을 멈춘 생명체들이 성장의 숨가쁨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내쉬는 호흡의 냄새다. 그것은 축축하고 텁텁한 여름 비린내와 달리 잘 마른 가벼운 냄새이다. 그것은 더운 날씨에 녹아 정지한 공기, 더위에 막혀 활기가 둔화된 공기, 고체의 질감을 가진 공기덩어리의 냄새가 아니라, 가벼워지고 날렵해진 흐름의 냄새이다. 그것은 노동이 막 끝나자마자 오는 구수한 휴식의 냄새이다. 그것은 충분히 익은 비린내가 향기로 막 변화하려는 과정의 변곡점에 있는 냄새이다. 더위에 축 늘어진 냄새가 아니라 찬 물을 먹고 정신이 번쩍 들어 빳빳하게 살아난 냄새이다. 앞으로만 달리다가 잠깐 멈추어 옆을 돌아보고 뒤를 돌아보는 냄새이다. 속도를 늦추어 제가 가야할 방향을 가늠하는 냄새이다.
나는 그 냄새에서 겨울의 예감을 읽는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늙음이라는 시간의 병을 후각과 청각으로 감지하는 예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을 차가운 공기로 들이마시는 예감, 더위에 지쳐 혼란해진 몸이 깨어나자마자 갑자기 스스로를 투시하는 예감, 제 삶이 갑자기 투명해져서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예감, 피와 살 속에서 활동하는 본능이 꺼내질 듯 만져지는 예감을 읽는다.
침묵도 소리의 일종이듯이, 잘 들리지 않는 무수한 작은 소리들로 되어있는 소리이듯이, 그 모든 것들이 제각기 자기 소리를 지니면서도 하나의 소리 속에 녹아서 하나의 완벽한 고요가 되는 소리이듯이, 가을 냄새는 수많은 삶들이 녹아서 하나가 된 냄새의 하모니이며, 하나 속에 전부가 들어있고 전부 속에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들어있는 향기의 하모니이다. 이 통째! 한 줄기 바람 속에 들어있는 이 통째! 매일 다람쥐 쳇바퀴를 돌리는 무감각한 관습을 한 방 후려치는 이 통째! 순식간에 모든 핏줄과 신경과 뉴런으로 퍼져 온몸을 깨어나게 하는 이 통째! 내 살과 세상과 우주를 하나의 후각으로 명쾌하게 요약시키는 이 통째!
가을이다. 이 좋은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하려니,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숨 쉬는 일처럼 자연스러워야 할 독서가 큰 짐이 되어 숨통을 막는다. 정보의 홍수, 지식의 과잉의 무게다. 읽을 것, 볼 것, 들을 것, 먹을 것은 많은데, 정작 없는 것은 그것을 즐길 시간과 그것을 씹을 이와 그것을 소화시킬 위장이다. 서가에는 읽으려고 벼르고 있는 책들은 그림의 떡이다. 새로 온 문예지의 목차를 읽고 막 본문을 펼치려고 하는데, 그 위에 새 문예지들이 얹히고, 다른 책들이 그 위에 다시 쌓인다.
정보와 지식과 새로운 감성은 이미 넘쳐나고 있으므로, 서둘러 하나라도 빨리 그것을 맛보려고 하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그것만 가지고는 어림없다고, 더 채워달라고, 원고 청탁이 온다. 나는 폭우로 이미 범람해 버린 거리에 내 분량의 물을 습관적으로 한 컵 더 붓는다. 내 시나 산문이 발표된 지면에 실린 다른 글들을 읽으려고 하면, 더 많은 지면에 더 새로운 글을 채워줄 후배들을 위한 강의 요청이 온다.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아무 것도 쳐다보기 싫은 눈이 되어 집에 오면, '그림의 떡'은 더 이상 평면을 차지하고 있는 선과 색이 아니라 제가 지닌 정보와 지식과 감성의 양에 해당하는 부피와 무게로 바뀐다. 거기에 압도되어서 나는 단 한 페이지도 열어보지 못한다. 자는 동안에도 내 꿈은 그 무게와 부피에 눌린다. 무게와 부피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적당히 부족하여, 소화시키기에 알맞은 즐거움과 꿈을 가지고 있던 때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정보, 지식, 감성이 증가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욕망이 충족되기는커녕 오히려 결핍만 그만큼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채워야 할 결핍은 늘어나고, 작가와 지식 노동자들은 그 엄청난 공간을 채우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지적 노동을 하고 있는가? 그러나 세상은 너무 많다고 해서 줄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과잉을 효과적으로 줄여주기 위해서 더욱 양을 늘리는 방법도 생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읽을 것만 따로 골라주는 ‘~가 가려 뽑은 명작’, ‘~가 꼭 읽어야 할 100권의 책’ 등의 서비스나 ‘간추린 ~’, ‘요약’ 같은 친절한 서비스가 그것이다. 그것마저도 너무 많아 다시 줄이고 또 줄여서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보아야 할/ 들어야 할/ 가보아야 할/ 먹어야 할)’ 정보나 지식이나 감성이나 교양도 생기고 있다. 이제 문학이나 영화, 음악 등은 즐기기에서 노동과 의무로 바뀌었다.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숙제가 되었다. 천국이나 지옥까지 쫓아와서 숙제 검사를 할지 모른다. 다 못 읽으면, 다 못 보면, 다 못 들으면 치명적인 손해를 보거나 스스로 만든 지옥에 갈지 모른다는 불안이 책과 DVD를 잡게 한다. 그래서 혹사당한 시력은 더욱 떨어지고, 목과 허리는 점점 굳어져 비명을 지르며, 소화불량인 배는 문학의 한 기법처럼 ‘전경화(前景化)’된다.
가을이다. 그래도 이 계절에 꼭 읽어야 할 책을 골라야 한다면, 추천해야 한다면, 권해야 한다면, 어떤 책이 좋을까? 마침 한 시인이 권하는 책이 있다. 욕망과 무는 동전의 양면임을 말해온 시인, 무덤은 무의 더미이며, 변기의 식욕은 허구렁이라고 말하는 한 시인이, 거대한 말의 욕망이 책을 밀어내듯 만드는 시대에, 권하는 한 권의 책.
물의 책은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아야 한다.
투명해야 하고
펼치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야 한다.
물의 책은
어둠이 오면 어두워야 하고
밝음이 오면 밝아야 한다.
나는 물의 책으로
발이나 씻겠어.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물의 책으로 화분에 물을 줄 거야.
그래도 괜찮다.
- 최승호, 「물의 책」 전문
시인은 모든 말의 욕망이 물에 녹아 씻기는 책을 꿈꾼다. 볼펜으로 물 위에 시를 쓰려다가 수도 없이 실패해본 시인만이 꿀 수 있는 꿈이리라. 끊임없이 종이에 붙어, 메모리에 저장되어, 지속하고 쌓이고 커져서 권력이 되려는 글자가 들어갈 수 없는 책. 물 위에 쓴 글씨처럼, 책으로 쓰이자마자 욕망이 무화되어버리는 책. 욕망이 씻겨 투명해져서 어둠이 오면 어두워지고 밝음이 오면 밝아지는 책. ‘문학은 쓸모없다는 바로 그 사실을 써먹는 것’(김현)이라는 말처럼 쓸모없는 것이 최대의 가치가 되는 책. 기껏해야 발이나 씻어주고 화분의 물이나 주어도 가치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책. 무모하게도 나는 이런 책을 권하고 싶다. 가을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