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1.

2000년대 이후 대중문화에서 급조된 수많은 신조어들 중 ‘국민여동생’이라는 단어가 있다. 국민가수, 국민배우, 국민요정까지도 십분 이해되지만 ‘국민여동생’이라는 칭호는 아무래도 지극히 한국적인 호칭이 아닐까. ‘국민’이라는 단어는 이제 거의 접두사처럼 초특급 스타에게 자연스레 붙는 수식어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가족처럼 친밀하되 ‘누나’나 ‘언니’가 아닌 ‘여동생’이라는 호칭을 덧붙임으로써 문근영은 귀여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국민여동생이라는 칭호의 수혜를 가장 많이 누린 스타도 문근영이지만, 그 폐단에 가장 많이 노출된 스타도 문근영이었다. 사람들은 국민여동생 문근영이 성숙한 여인으로 변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깜찍하고 발랄한, 언제까지나 자라지 않을 것만 같은 귀여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영화 <어린 신부>와 <댄서의 순정>에는 엄청난 ‘국민적’ 관심이 쏠렸지만, 대학생이 된 그녀가 야심차게 도전한 성인 멜로 영화 <사랑 따윈 필요 없어>에는 ‘국민여동생’의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냉대와 가혹한 비판이 가해졌다. 그녀를 남장소년으로 등장시킨 <바람의 화원>은 다시 22세의 문근영을 10대 소녀로 퇴행시킴으로써 높은 시청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원더걸스, 소녀시대를 비롯한 수많은 10대 소녀 아이돌이 탄생하면서 ‘국민여동생’이라는 칭호는 확산되었다. 세대와 성별, 직업을 가리지 않고 폭발적으로 유행했던 원더걸스의 ‘텔미 UCC’는 단지 범접할 수 없는 스타를 멀리서 찬양하는 팬덤(fandom)이 아니라 그들처럼 춤추고 노래하고 그들과 ‘함께’ 즐긴다는 친밀성의 환상을 만들어냈다. 문근영, 원더걸스, 소녀시대 이전에도 10대 소녀 스타들은 많았다. 하지만 ‘국민여동생’이라는 칭호의 아우라에 둘러싸인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김혜수·채시라·하희라 등 기존의 10대 소녀 스타들은 뭔가 ‘남다른’ 존재였고, 하늘의 별처럼 가까이 갈 수 없는 희귀한 존재들로 형상화되었다. 그들은 여학생들의 장래 희망이 ‘연예인’이 아니라 교사나 간호사였던 시절의 스타들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여학생들은 스타를 선망하긴 했지만 ‘누구나 어릴 때부터 전략적으로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 연예인이 될 수 있다’는 ‘국민적 환상’으로 스타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소녀들의 장래희망 직업 1순위는 연예인이다. 그들은 TV와 인터넷이라는 여과장치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며 매스미디어로 편집된 세상이 현실보다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에 살고 있다. 80년대 소녀 스타들은 ‘책받침’에 코팅되어 간직되었지만 2000년대 스타들은 휴대폰 액정화면에 보관되고 컴퓨터 바탕화면에 전시되며 그들의 두뇌 속 ‘장래희망 1순위’를 점유한다.

2.

국민 여동생 신드롬은 알파걸 신드롬과 시너지를 일으키는 순간 더욱 강력한 문화적 파장력을 지니게 되었다. 여학생이 성적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남학생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며 미국의 아동심리학자 댄 킨들론은 공부,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분야에서 남학생들을 능가하는 새로운 사회계층인 ‘알파걸(Alpha Girl)’이 등장한다고 말했다. 이 용어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최고의 국민여동생이자 알파걸로 급부상한 10대 소녀가 바로 김연아다. 피겨스케이팅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10대 소녀가 변변한 국가 지원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세계를 제패하는 경이로운 사건이 일어났고, 언론의 김연아를 향한 폭발적인 찬사가 이어지면서 ‘김연아 신드롬’을 낳았다. 이후 김연아는 ‘스포츠 선수’에 머물지 않고 연예인 못지않은 엔터테인먼트의 재능과 광고 파워를 가지게 되었다. 김연아 스스로의 의도와 관계없이 ‘김연아’는 하나의 기념비적인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때 아닌 피겨스케이팅 바람이 불었고 너도나도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피겨스케이팅 교습을 시켜주기도 했다. 김연아 신드롬이 일으킨 문화적 파장 중 하나는 ‘누구나 노력하면 김연아처럼 세계정상에 우뚝 설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성공신화였다.

그러나 웬만한 어른들도 뒤따를 수 없는 성공과 부와 명예를 거머쥔 10대 소녀들을 향한 이러한 문화적 숭배가 진정 모든 10대 소녀들의 문화적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언론의 10대 소녀 띄워주기 마케팅은 사실 매우 희귀한 몇몇 소녀들을 반복적으로 예찬하여 그들을 10대 소녀의 전형으로 조작하는 혐의가 짙다. 김연아, 문근영,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의 초특급 국민여동생들의 공통점은 그들 각자가 ‘1인 기업’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인 브랜드 파워를 지녔다는 점이다. 김연아는 10대 소녀지만 모든 것을 이루어낸, 어른도 달성하기 어려운 영웅적 미션을 수행한 완전무결한 소녀 이미지의 결정판이다.

한국 뿐 아니라 외국의 10대 소녀 스타들, 예를 들어 다코타 패닝이나 엠마 왓슨을 향한 엄청난 관심도 그녀들이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아 이룩한 엄청난 경제적 부에 쏠려 있었다. 그나마 언론이 ‘평범한(?)’ 10대 소녀들에게 갖는 관심은 그들이 ‘소녀 CEO’라도 되어 인터넷 쇼핑몰에서 억대의 매출을 올리는 정도의 화젯거리를 제공할 때다. 압도적인 다수의 10대 소녀들은 성적으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고통 받고 있고, 그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10대 소녀들의 하위문화는 점점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해가고 있다는 사실은 좀처럼 심층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소녀들의 전성시대를 과장하는 미디어의 어법은 더 많은 소녀들의 타자화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구별 짓기 전략이다. 아예 초등학생 때부터 ‘보아처럼, 김연아처럼, 원더걸스처럼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욕망을 내면화 하는 아이들.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학교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아비투스의 교육 현장으로서 아이들에게 역사 속 위인보다 더욱 위력적인 롤 모델을 세뇌시키고 있는 셈이다. ‘알파걸’과 ‘국민여동생’ 신드롬의 합동 연합 작전은 부르주아의 성공 이데올로기를 10대 소녀들에게 투사한다. 이 성공이데올로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10대들이여, 너희들이 어른들의 관심을 받으려면 김연아처럼 성공하라! 원더걸스처럼 귀엽고 깜찍하게 어른들을 유혹하라!’라는 복화술의 전언이 내장된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부터 ‘알파걸’이자 ‘국민여동생’으로 추앙받는 이 ‘특별한’ 소녀들에 대한 ‘평범한’ 소녀들의 감정은 단지 부러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심리적 압박으로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들은 20대 언니 오빠들을 보며 ‘88만원 세대’의 위협을 느끼고, 부모들의 못다 이룬 꿈을 자식에게 투사하는 광적인 교육열에 시달리며 오늘도 ‘학파라치’의 눈을 피해 학원으로 발길을 돌려야 할 것이다. 보수 언론의 ‘특별한’ 10대 소녀에 대한 열광은 미래의 ‘88만원 세대’들의 무한경쟁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 전략의 일부가 아닐까.

3.

물론 소녀들의 시대를 이끄는 문화적 동력이 ‘국민여동생’과 ‘알파걸’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10대 소녀들을 이미지화하는 미디어의 다채로운 콘텐츠는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급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성숙한 팜므 파탈처럼 남성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비롯한 각종 소녀그룹의 폭발적인 인기는 ‘공격성이 없는, 남성성을 위협하지 않는 소녀상’에 대한 남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 준다. 또한 이들은 10대와 20대의 전유물이었던 댄스 그룹이 40~50대 이상의 남성들의 시선까지 사로잡게 한 일등공신들이었다. 중년 남성들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쉽고 재미있는 율동을 따라하면서 그 쑥스러움을 즐길 줄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을 노골적인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죄책감까지도 ‘소비’되고 있는 셈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소녀들의 ‘티 없는 순수’를 소비했던 대중문화는 이제 소녀들이 ‘순수해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을 상품화한다. 소녀들은 이전까지 ‘아동’에 가까웠지만 이제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성숙함을 모두 실현하는 잠재적 이미지로 유통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아역의 등장 시기가 점점 길어지는 것 또한 흥미로운 문화적 현상이다. 아역들이 단지 성인배역의 ‘미니미’나 ‘아바타’가 아니라 독립된 배역으로서 그 자체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소녀’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작고 연약한’ 느낌은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고 강인한’, 게다가 성적으로 매력적인 파과기(破瓜期)의 여성에 대한 관능적 매혹으로 확장된다.

‘제 2의 문근영’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10대 소녀 박보영이 아기 엄마로 등장한 <과속 스캔들>이 7백만 관객을 동원한 놀라운 흥행 성적은 대중들의 ‘소녀’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마치 바리데기처럼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고 아버지의 치명적인 결핍을 메워주는 딸이면서, 동시에 10대에 임신한 어린 아들을 놀라운 모성으로 돌보는 그녀. <과속 스캔들>의 박보영은 완벽한 딸과 완벽한 어머니의 잠재성을 동시에 지닌 ‘소녀’에 대한 대중의 이상을 충족시켜 주었다. 아기처럼 연약한 미소와 소녀처럼 순수한 이미지, 성숙한 여성의 이미지가 공존하는 박보영의 캐릭터는 ‘대중이 소녀에게 기대하는 모든 것’을 충족시킨 성공적 캐릭터였다.

4.

윤이형의 최근 소설 「바이올렛」(『한국문학』2009년 여름호)은 미래 사회의 이야기를 다룬 SF소설이지만 마치 최근 10대들의 마음을 엿보는 듯한 생생한 기시감을 선사한다. 이 이야기는 첨단 과학 기술로 유전자 성형에 성공한 ‘우생학적으로 월등히 뛰어난’ 아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서서히 미쳐간 ‘평범한’ 소녀의 이야기다. 그녀는 매일 아침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죽고 싶다’고 느낀다. 스물아홉 명의 아이들 중에 스물다섯 명은 GIP키드, 즉 유전자향상계획(Genetic Improvement Project)이 만들어낸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나머지 네 명만이 유전자 조작 없이 태어난 ‘쌩’ 아이들이다. GIP키드들의 아름다움과 총명함과 세련됨을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이 아이들은 GIP키드들의 ‘인성’조차 배려심 많고 친절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사실 앞에 절망하며 조금씩 미쳐간다.

GIP키드들은 나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 애들은 우아하고 똑똑하고 아름다웠다. 이건 결코 비꼬는 말이 아니다. 난 그 애들을 볼 때마다 천사들과 밀크티를 마시는 것처럼 황홀했으니 말이다. 단지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 애들 대부분이 예쁘지만 예쁜 것만으로는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지능에 비하면 외모는 나중에 교정하기가 훨씬 쉽고 간단하기 때문에 부모님들 대부분이 유전자 수정에서 지능 쪽에 집중한 것 같다. (…) 말했듯이, 그 아이들은 관대하다. 그건 크림처럼 부드러운 관대함이다. 요리를 못하는 아내가 다 태운 달걀 프라이를 겨우 상에 올렸을 때 그걸 맛있게 입에 넣으며 칭찬하는 신혼의 남편 같은 관대함이다. 나 같은 아이들이 잘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집 한 권을 붙잡고 일 년을 보내며 ‘공부하기 싫어, 입시 꺼져’ 같은 무용하고 무의미한 낙서를 연습장 한 귀퉁이에 적어놓는 동안, 그 아이들은 학교 공부 따위는 금세 끝내고 부드러운 티라미수 케이크를 먹으면서 부모님이랑 사회와 문화와 세계에 대한 대화를 해온 것이다. (『한국문학』 2009년 여름호, 112~113면)

단지 성적이나 외모뿐 아니라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미학적 체계 자체가 다른 GIP키드들, ‘열등한 아이들’을 향해 결코 육두문자를 내뱉지 않는 우아한 매너를 지닌 GIP키드들 속에서 이 ‘평범한 소녀들’은 서로와 연대하기는커녕 서로를 더욱 증오하며 ‘바이올렛’이라는 약에 의존하게 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넘을 수 없는 유전자의 차이 앞에서, 우리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천사 같은 아이들을 사랑했지, 비굴하게, 얼굴을 비틀며, 또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스스로를 상해 가며 목을 빼고 위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는 서로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다. 우리는 너무 추했다.”(위의 작품, 124면) 알파걸과 국민여동생의 시대는 그 ‘대단한 소녀들’이 가진 모든 권력에 매순간 스트레스를 받는 절대 다수의 소녀들, 게다가 10대 소녀를 따라갈 수 없는 평범한 어른들의 뼈아픈 열패감을 ‘자양분’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