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도 더운 여름밤이었다. 저 멀리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파주의 한적한 동네였지만 창문을 활짝 열어두어도 바람 한 줄기 불어오지 않았다. 네온사인 하나 없는 막막한 어둠조차 농밀한 열기처럼 느껴졌다. 에어컨도 없었고, 선풍기 바람은 시원찮았다. 그저 멍하니 야속한 여름밤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힙합 그룹 에픽하이의 6집 앨범, 날선 노랫말이 빠른 비트를 타고 흘렀다. 애잔한 사랑의 감정조차 힘찬 비트로 날려 버리는 <Love Love Love>.
아무도 내 맘을 모르죠. I can't stop Love Love Love
힙합을 따라잡기에는 몸도, 마음도 게을러지고 말았지만 어쩐지 그 노래가 나를 사로잡았다. 랩을 따라 불러 보겠다고 혀 꼬이는 소리로 한참을 흥얼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힙합의 비트로 답답한 심장을 두드리고 있는 한 소년이 바로 곁에 있었다. 현종원. 훤칠하게 키가 크고 야위었지만 어깨가 딱 벌어졌다. 그리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세련된 외모가 어딘가 눈길을 끄는 데가 있다. 후진 차림으로는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지만, 그렇다고 요란스레 차려입는 것은 딱 질색이다. 엠피tm리 이어폰을 귀에 꽂고 휴대전화를 손에 들지 않으면 팔 하나를 떼어낸 듯 허전한 인문계 고등학교 1학년 소년. 나는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나에게 숙제처럼 남아 있던 이야기인 ‘청소년 데이트 강간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하고 싶다, 하고 싶다, 하고 싶다.
종원이의 육성과도 같은 첫 문장이 떠올랐다. 더위가 단숨에 날아가고 음악이 저 멀리 물러났다. 나는 노트북 앞으로 다가앉아 종원이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다. 데이트 강간을 소재로 한 청소년 단편을 쓰리라고 작심한지 꽤 오래 되었지만 내 고민은 늘 여자아이였다. 어떤 아이일까? 왜 그랬을까?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래봤자 떠오르는 건 교복 치마를 깡똥하게 줄여 입은 여자아이의 뒷모습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밤 느닷없이 종원이가 내게 온 것이었다. 나 자신이 여자인지라 남성 청소년의 성에 관해서는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종원이의 내밀한 욕망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여자아이를 떠올릴 때면 그토록 막막했던 이야기인데 종원이로 인해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사건의 전말과 그 이면의 더 많은 이야기와 감정들. 그렇게 대산창작기금을 받은 청소년 단편집 『영두의 우연한 현실』의 첫 단편 「빨간 신호등」이 완성되었다. 그 여름밤부터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도록, 내내 힙합을 들었다. 직설로 가득한 힙합의 비트와 노랫말이 주문처럼 떠돌며 닫힌 문을 차례로 열었다. 드렁큰타이거의 삐딱한 비트가 두 번째 문을 열었다. 외계인을 만나 지구를 박차고 떠나는 소녀 최가람의 이야기 「로스웰주의보」였다. 「어떤 실연」의 송미와 「영두의 우연한 현실」의 두 영두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의 정후 역시 힙합의 주문에 걸려 백기투항하듯 내게로 왔다. 봄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역시나, 힙합을 들으며 원고를 출력해서 누런 서류 봉투에 넣었다. 우체국으로 가는 길에도 분명히, 힙합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대산창작기금을 받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을 때도 힙합이 심장박동처럼 익숙하게 나를 두드리고 있었다. 마침내 다섯 편의 수상작과 또 다른 단편 「오답승리의 희망」으로 구성된 『영두의 우연한 현실』을 출간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당연히 힙합을 떠올렸다. 작가의 말을 쓰려고 앉으니 그 어떤 소회보다 먼저 리듬이 떠올랐다. 힙합에 빚진 데가 많은 책이다. 작가의 말을 그렇게 마무리하며 나는 다시 볼륨을 높였다. 마력은 사라지고 없었다. 힙합은 그저 힙합일 뿐, 더 이상 주문이 아니었다. 종원이를 만나는 순간에 걸렸던 힙합의 주문은 내게 몽환적인 기억을 남기고 그렇게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 힙합을 듣는다. 비트의 사이사이, 이제는 유물이 되어버린 주문의 기억이 아로새겨져 있다. 마력은 사라졌지만 매력은 여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