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라는 말을 만져본다. 어쩐지 녀석은 보드랍고, 연약하고, 두 손을 포개어 감싸 줘야 할 것만 같고, 비누향기라던가 풋내 같은 순수한 냄새가 난다. 소년이라는 말에서 풍겨오는 건강한 땀 냄새를 소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소나기를 맞으며 소년은 달리고 소녀는 힘겹게 기침을 뱉는다. 창백한 소녀가 보기 좋게 그을린 소년과 나란히 서면, 글쎄, 멍청하게 하얗다.
나이로만 보면 소녀인 나로서는, 소녀라는 말이 영 간지럽다. 오죽하면 비오기 직전에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소녀풍이라고 하는 건지. 여자아이와 여자 사이를 겪으면서는 누구나 부드러워야 하는 건지. 솔솔 불어오지 못하고 우당탕 부는 바람인 나는 소녀라는 이름에게 괜히 미안하다가, 또 짜증스럽다. 왜 자꾸 소녀 보고만 부드럽다는 거야. 소녀면 부드러워라, 부드러워야 해, 말해지지 않은 강요가 들려온다.
나는 소녀가 손에 쥐고 있는 ‘순결캔디’를 빼앗다시피 가져온다.
사실 우리 또래가 남녀차별이라는 불쾌하고 고집 센 말을 실감할 일은 많지 않다. 여학생들에게 치여서 수행평가 점수가 낮다고 남자학생들이 부득부득 남학교를 고집하는 시대에 나는 여학생으로 살고 있다. 남녀공학이었던 중학교에서는 성적은 물론이고 회장 자리도 여자아이들이 도맡아 했고, 여고에 올라온 지금에는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농담 속에 은근히 남자아이들을 바보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남녀차별을 받으면서 억눌려 있던 여고생들이 정치에 폭발적으로 참여한다는 기사를 같이 읽다가는 당혹스럽다. 난 한 번도 내가 남자보다 못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누군가의 말에 나도, 나도, 느낌표가 줄을 잇는다.
나는 멍하니 앉아서, 소녀들의 손에 저마다 쥐어진 순결캔디를 떠올린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몇 달에 한번 꼬박꼬박 성교육을 하곤 했다. 은근한 설렘과 또 그걸 악착같이 숨기려는 수줍음이 짓궂은 장난질과 태연한 말장난으로 교실을 채웠다. 교실이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어버릴 것만 같다.
몸을 소중히 하라고, 몸을 소중히 하는 방법은 꽁꽁 싸매는 것뿐이라는 식의 고루한 성교육이 끝나고, 양호 선생님은 그 놈의 순결캔디를 나누어주기 시작한다. 순결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살살 녹여먹으라며. 소녀들에게만. 맨 손의 소년들 앞에서 손에 사탕을 쥔 소녀들은 어쩐지 수치스럽다.
‘여성스럽다’는 말과 ‘남성스럽다’는 말을 나는 싫어하지 않는다. 되레 굉장히 좋아한다. 세상에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있어서 참 좋다. 아름답다, 라고 거창하게 말해보고도 싶다.
하지만 그 말이 벽이 되고 족쇄가 되어서 한계가 된다면 나는 싫다. 우리가 싫다.
나는 문득 신문 앞의 아이들에게 묻는다. 만약에, 불가항력적인 어떤 상황에, 성폭력을 당하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어떤 상황에서, 너희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순결을 잃고 어떻게 살겠어, 나 같으면 차라리 죽을 거 같아, 소녀들은 저마다 순결캔디를 야무지게 손에 쥐고서 말한다. 나는 온 몸에 다닥다닥 올라온 소름을 긁는다. 도대체 저 놈의 순결들은 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 와서 저렇게 밑도 끝도 없는 한계가 되어 있는지. 어느새 목숨을 다 뛰어 넘었는지.
친구가 손가락마다 사마귀 상처를 달고 했던 말을 나는 기억해낸다. 진짜 아프고 골치 아픈 사마귀는 살 속에 숨어 있다고. 살 속에 숨어서, 깊숙이 도려내지 않으면 또다시 돋아난다고.
요즈음의 소녀들이 남녀차별이라는 완고한 말을 실감할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실감하지 못할 만큼 살 속 깊이, 그 놈의 순결캔디가 녹아가고 있다. 녹아서 스미고 있다. 딸이었다가 엄마가 될 소녀들의 손이, 그 소녀의 딸일 또 다른 소녀의 손이 이제는 자유로웠으면 한다.
소녀풍이 불어오듯이.
그 많은 텔레비전은 누가 다 켜 놓았을까
뉴스가 시작될 즈음이면 텔레비전은 이미 켜져 있다. 대학생인 언니는 언니대로, 고등학생인 나는 나대로 밖에서 저녁까지 해결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이제 우리 가족이 나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뉴스뿐이니까, 어쩐지 뉴스는 봐야지 싶다. 나는 풀지 않을 학원 숙제와 울리지 않을 핸드폰을 챙겨 가지고 꼬박꼬박 거실에 자리를 잡는다.
세상은 어김없이 시끄럽고 사람은 끊임없이 무서워서 뉴스는 매일같이 펑펑 터진다. 그래서 나는 시끄러워진다. 시끄럽게,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밟지 못한 땅을 투정한다.
언젠가부터 뉴스를 볼 때면 나는 어쩔 수 없는 불평꾼이 되었다. 뉴스라는 게 원래 유별난 이야기만 하는 시간이라서 그런 건지, 언니랑 얼추 키가 비슷해지면서 제법 시선의 키도 비슷하게 맞춰진 까닭인지는 몰라도, 나와 언니는 어느새 뉴스와 함께 떠든다.
하지만 어른들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지 싶다. 어른들에게는 나른하거나 심지어 졸린 시간들이 차라리 행복인 것처럼 보인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지길 위해서가 아니라 내일이 적어도 오늘만 하기를 기도하고 느닷없는 변화에 어느 주식이 폭삭 내리거나 훌쩍 뛰는 일이 없음에 감사한다.
거실의 어른들 역시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기는 마찬가지라서, 엄마는 간간한 한숨으로, 아빠는 단 한마디로 뉴스에 말을 보태고 있는 언니와 내 입을 막는다. 좀, 조용히 보자.
그러면 나는 조금은 맹랑한 오기로, 따져 묻고 싶어진다. 어떻게 조용히 할 수 있는 걸까. 뉴스를 보면서. 왜 조용히 해야만 할까.
나는, 그래,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 우리는 보여주고 보여지는 일을 좋아한다. 우리는 라디오보다는 텔레비전이, 침묵보다는 함성이, 교복보다는 차라리 제 각기의 잠옷이 더 좋다. 지각을 하더라도 머리는 감아야 집을 나설 수 있고 시끄러운 화음의 노래를 들으며 시끄러운 색의 옷을 걸치고 다닌다. 난 자리도 든 자리도 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듣는 것보다는 말해서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을 즐긴다.
그러니 우리가 촛불을 켜고 그 길 위에 서서 ‘우리’가 된 까닭은 어쩌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말해져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데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서,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분노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작고 여린 불빛을 찾아낸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민주주의는 배웠지만 독재는 미처 겪지 못했고, 정의라던가 평등이라는 말을 들으면 온 몸에서 함성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타는 목마름으로 그 이름을 부를 줄은 모른다.
우리의 촛불은 맹랑하거나 순진하고 결국 무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다. 이다음에 더 크고 높은 사람이 되었을 때의 한마디가 더욱 짙고 깊을 수 있음도 알고, 지금이 우리 인생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시기라는 것도 쑥스럽지만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촛불 가운데 서 있어 본 사람은 누구나, 뿌듯한 땀 냄새와 빛나는 눈동자들 속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촛불을 배우며 즐기고 있다는 걸 어느새 느낄 수 있었다.
그 여름, 나는 교복 차림으로 거리에 섰지만 그 교복을 입고 다음날 학교에 가기 위해서 막차 시간을 꼼꼼히 챙겼다. 방패를 든 전경들 대신 전경을 방패삼은 사람들에 분노해야 함을 잊지 않았고 무의미한 충돌 대신에 노래를 부르고, 나란히 걷던 사람들과 알 수 없는 친근감에 이야기를 나누고, 유쾌하게 조롱했다. 제각기 써서 매고 다니는 기발한 표어들을 보며 우리는 웃었다. 조용한 촛불을 들고 시끄럽게 웃었다.
그것이 우리의 촛불이다. 우리는 선동적인 욕설과 폭발하는 분노 대신 즐거운 놀이와 함께 하는 기쁨으로 거리를 채웠다. 그러면서 내내 촛불을 켰다. 그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지나서, 이 봄과 여름까지. 우리는 그 사이 몇 번의 시험을 치르고 학원을 옮기기도 하고 봄옷을 몇 벌 사고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촛불을 켰다. 우리는 촛불을 들면서도 연예인 이야기에 웃을 수 있고 그러다 밀린 수행평가를 끝마칠 수도 있는 나이이기 때문에. 이 나라는 결국 우리가 물려받을 나라라는 교과서적인 진실을 실감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조금 맹랑하거나 순진하거나 심지어 순진한 오기로, 다시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그리고 뉴스가 시작하기를 기다린다. 촛불을 들었던 손으로, 촛불을 들 손으로, 리모컨을 쥐고서.
산타클로스는 굴뚝으로, 조심스럽게
점심시간은 나른하다. 배는 부른데 낮잠 자기에는 시시하고 멍청히 앉아 있기에는 더더욱 시시할, 딱 그 만큼. 그 점심시간, 교실에서 의자를 동그랗게 모아 동그랗게 앉아 있던 우리의 이야기는 엉뚱하게도 심리테스트로 흘러간다. 아무렴 재밌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라서, 집 그림 그리는 걸 보고 성격을 맞출 수 있대, 친구의 말에 우리는 천진하게 펜과 종이를 챙겨가지고 와서 시키는 대로 각자 집을 그린다.
어, 다들 굴뚝이 있네? 의아쩍은지 다행스러운지 목소리 끝이 들려 있다. 집 그릴 때 굴뚝을 그리는 사람은 자기만의 굴뚝이 있는 거래. 취미나 특기 같은 거. 좋은 거야.
모두가 굴뚝을 갖고 있다고?
누구는 우리더러 촛불세대라고 하고 엄지족이라고도 하지만 우리는 결국 한국의 학생들이다. 교육이라고 하면 으레 입시스트레스라던가 사교육과 공교육이라던가 하는 말들이 따라붙는 곳에서, 바로 그 교육을 받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저마다의 굴뚝이 있다는 말은 어쩐지 사치스럽게 들린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이들을 훑어본다. 아니,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와 미니홈피에 빠져 있는 친구와 한옥을 찾아 여행을 다니는 친구와 연예인 누구의 부인이 되고 말겠다는 친구와 글을 쓰는 시늉을 내는 나를 본다.
누구는 영화를 좋아한다.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하품 한번을 안 하는지. 그가 흑백영화 속의 미국배우 이름부터 할리우드 영화 속 배우의 출연작들을 줄줄 읊을 때면 나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갑자기 너무 멋있어 보여서.
누구는 미니홈피에 빠져있다. 말 그대로 작은 홈페이지를 저마다 갖는 어느 사이트에 눌러 앉아서 또 누군가의 미니홈피를 부산스럽게 돌아다닌다. 사진에 뻔한 칭찬 댓글을 달고 방명록에 ‘오랜만이지! 보고 싶다ㅜㅜ’ 한 줄 남기고 오는 게 왜 그렇게 재밌는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자세로 갖은 예쁜 척을 하면서 찍어 올린 사진들이 그럴 때면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또 누구는 한옥을 찾아 여행을 다닌다. 한옥을 좋아하는 나와 방학 때 여행 다닐 계획을 틈틈이 짠다. 조금 친해진 후에 얘기를 해보니 놀라울 정도로 취향이 비슷해서, 진부한 표현이지만, 혹시 숨겨놓은 형제인가 싶었던 친구. 학교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으니까.
연예인을 좇아 여행을 다니는 누구도 있다. 그 사람은 네가 있는지도 모를 텐데! 장난으로 던진 한마디에 친구를 잃을 뻔 했다. 눈으로 불을 뿜을 수도 있구나.
그리고 내게도 굴뚝이 있다. 그 굴뚝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여덟시까지 학교에 가고 11시까지 자율 아닌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매일을, 회색 도시를, 그 모두를 그럭저럭 버텨내게 하는 굴뚝이 내게 있었다. 아니, 사실은, 굴뚝이 있어 그 모두가 행복하기까지 하다.
나는 새삼스럽게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본다. 매일 일곱 시간 씩 꼬박꼬박 앉아 있는 교실이 갑자기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다. 사물함마다 주렁주렁 열린 자물쇠들과 벽에 걸린 달력과 그 달력 곳곳에 표시된 모의고사 날짜들과 이 교실에서 같은 시간과 숨을 나눠 쓰고 있는 아이들까지. 낯설다.
저 아이들은 또 저마다의 굴뚝을 가지고 있을 텐데, 왜 우리는 한 번도 서로의 굴뚝으로 들어가 산타클로스가 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도대체 그동안 우리는 한 교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각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굴뚝 삼아 뜨거운 연기를 푹푹 내뿜고 있는지, 가장 나눠야 할 이야기를 어떻게 이제껏 단 한 번도 나누지 못했나 싶다.
그러니까 나는 수염도 없고 할아버지도 아니지만, 붉은 털옷 대신 하얀 교복을 입은 채로, 산타클로스가 되기로 한다. 아무도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사람이 사람을 대하며 조심스럽다는 건 얼마나 사랑스러운 일인지! 나는 있는 힘껏 조심스럽게 굴뚝을 통해 집집마다 들어가 볼 생각이다. 그러면 나는 선물을 머리맡에 놓고 도망을 놓는 대신 침대께에 앉아서 오래도록 잠자는 얼굴을 바라보겠지. 스르르 잠에서 깬 누군가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겠고.
사실 산타클로스가 된다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그것뿐이다. 누군가가 필기 잘 된 공책을 훔쳐가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누군가가 훔쳐 갈까봐 칸칸이 달아놓은 사물함의 자물쇠를 끊어낼 수도 없고, 교실의 아이들을 산으로 들로 풀어놓을 수도 없다. 도시는 여전히 경적 소리로 부옇고 우리는 매일 아침 교복을 입고 학교에 온다.
그래도 나는 이제 산타클로스가 되어 굴뚝을 찾고 있다. 굴뚝을 갖고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굴뚝을 나눈다는 건 더더욱 좋은 거니까. 조심스럽게, 굴뚝을 통해, 곤히 잠자고 있을 또 다른 산타클로스를 찾아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