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정말 ‘소녀시대’일까. 텔레비전을 켜든, 신문을 보든, 인터넷을 켜든 어디에나 소녀들이 등장한다. 굳이 쫙쫙 잘 빠진 다리를 뽐내며 가요계를 점령하고 있는 특정 그룹의 소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그녀들 말고도 삼촌 이모 팬, 오빠 언니 팬들을 사로잡고 있는 다른 소녀들도 많이 있고, 작년 촛불집회의 선봉을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는 ‘촛불소녀’들이 있다. 특히 386 먹물 아저씨들은 이들에게 너무나 깊이 매혹된 나머지 웹 2.0세대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고, ‘국개론’, 이른바 ‘국민 개새끼’의 주요 원인으로 20대를 거론할 때 늘 써먹곤 했다, 이를테면 10대들도 이러는데 이 쓰잘데기 없는 것들! 하는 식으로.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입을 앙다물고 있는 촛불소녀 옆에 촛불소년은 없다. 나중에야 옆에 살짝 촛불소년이 그려졌지만, 그래도 거리의 교복이 상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맑은 목소리를 구호를 외치는 ‘촛불소녀’였고 거리의 마스코트로서 가장 사랑을 받은 것도 ‘소녀’였지 촛불 소년소녀들이 아니었다. 왜, 이토록 소녀에게 매혹되는 것일까.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걸 그룹의 인기야 남자들이 언제 젊은 여자 싫어했냐고 하면 될 일이고 촛불소녀에 대한 애정이야 아저씨들이 언제 소녀를 싫어했으며 특히 왕년에 운동 좀 하신 분들이 의식 있는 소녀를 보면 얼마나 벅차게 감동할지도 빤한 노릇이고 386으로 한정해 본다면 촛불소녀는 딸 아니면 딸 친구일 테니 자식새끼 안 예쁠 리 없기 때문에 이 사랑은 죄다 설명되는 것들이지만, 유독 이 시대가 ‘소녀’를 애호하는 경향은 존재하는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경향은 언제나 ‘난세’에 나타나는 것 같다. 프랑스가 거의 망하기 직전에 이르자 잔다르크가 나타났고, 죽을 각오를 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유관순은 영원한 민족의 누이로 남을 것이다. 독재정권 시절 김귀정의 꽃다운 영정은 넥타이 부대의 가슴 속을 뒤흔들었고, 임수경은 말 그대로 통일의 ‘꽃’이 되었다.

그 이후, 걸 그룹이 폭풍처럼 밀려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브라운 아이드 걸스>, <2ne1>, <4 minute> 등 소녀들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 파급력은 지금의 소녀들이 일으킨 돌풍보다 크면 컸지 못할 것 없었다. 그 때의 난세는 바로 IMF 였다.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온통 뒤숭숭한 가운데 그녀들은 정말이지 ‘처음 만나는 예쁜 소녀들’이었다. 신비한 느낌의 미모와 세련된 멜로디의 음악으로 살짝 거리감이 느껴지는 <S.E.S.>와, 그보다는 조금 더 친근하게 마치 우리 동네,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쁜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 <핑클>, 이렇게 예쁘고 어린 소녀들이 떼로 나타나 애교스러운 미소를 카메라를 향해 날리면 브라운관 앞에서 오빠와 삼촌들은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매혹 당했다. 저항할 필요도 없이, 그저 항복하는 것이 편했다. 그건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멤버 개개인의 개성은 다를지언정 그 아름다움은 하나같이 지극히 순결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혹은 그렇게 주려고 애쓰는 그 무엇이었기 때문에 ― 당시의 <핑클>과 <S.E.S.>는 유독 흰 원피스나 발목까지 오는 길이의 흰 옷을 즐겨 입었고 종종 흰 화관을 쓰기도 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누구나 알 것이다 ― 여자들도 시기하거나 질투하기보다는 경탄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웠다. <핑클>은 <S.E.S.>에 비해 댄스도, 노래 실력도 확연히 떨어졌지만 인기의 정도는 비등비등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아마 당시의 <핑클> 정도 실력으로 지금의 가요계에 데뷔했다면 10년 동안 눈이 많이 높아진 대중은 비웃다 못해 돌을 던졌을 것이고 아마 요즘 난다 긴다 하는 걸 그룹에 비교하면 유치원 학예회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아무도 그들에게 ‘실력’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대중이 그들에게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았고 또 준 것이다. 그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사는 게 갑갑해 죽겠는데, 당장 어머님이 장롱 안에 처박아 놓은 금까지 나라를 위해서 갖다 내고 있는 판국에, 실력이니 수준이니 하는 자를 갖다 댈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윳빛 피부에 긴 생머리를 나풀거리며 생긋생긋 웃으면서 그들은 일종의 구원투수 노릇을 했던 것이다. 사회야 어쨌건 경제야 어쨌건 사랑스럽고 깜찍하게 웃으면서 온갖 시름을 잊게끔.

당시 한 명의 강력한 구원투수, 한 명의 소녀가 더 존재했다. 골프선수 박세리가 바로 그 소녀였다. 당시 20대 초반으로 소녀라고 하기에는 조금 나이를 먹었을지 몰라도 젊고 사랑스러운 미혼 처녀, 로 흔히 통용되는 지금의 ‘소녀’라는 사회, 문화적 의미를 가진 헐거운 자를 가져다 대면 엄연히 박세리는 이 멤버에 입회할 자격이 있다. 운동선수다운 체격에 필드에서 검게 탄 순박한 느낌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녀에게 열광했고, 다리를 걷어 올리고 물속에 들어간 그녀의 튼튼한 다리 역시 찬탄의 대상이었다. 딱 10년 후, 박세리는 없지만 대한민국에는 김연아가 있다. 그녀는 이를테면 ‘완전체’에 가깝다. 세계적으로 ‘여왕’이라고 인정받을 정도의 피겨스케이팅 실력, 좋은 학벌, 영어 실력, 가수 뺨치는 노래 솜씨, 어떤 소리를 들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강한 정신력, 전형적이진 않다 하더라도 보는 이를 충분히 매혹시키는 미모, 서양인에게 비교해서도 떨어질 것 없는 긴 팔다리에 신체 비율까지. 10년 동안 박세리에서 김연아로 옮겨진 국민 여동생 자리를 보면, 이래저래 사랑받는 소녀로 등극하기 위한 관문은 점점 더 좁아지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래도 옛날 소녀들보다는 지금 소녀들이 더 고단할 것이다. 옛날 걸 그룹은 예쁘게 생긋생긋 웃으면서 미소를 날리면 오빠와 삼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요즘 걸 그룹은 남자 멤버 뺨치는 춤 솜씨에 예쁜 외모를 배신하는 털털한 성격까지 보여야 하고,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카메라 등 기록 수단의 발달과 인터넷의 눈부신 발전으로 대중에게 노출될 기회가 많아졌지만 반면 흠 잡힐 기회도 훨씬 더 많아졌다. 춤과 노래, 연기 등 실력은 물론이고 어떤 캡처에도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미모도 갖춰야 하고 그러면서도 그 미모를 과시하지 않되 너무 무뚝뚝해 보이지 않도록 적당한 애교도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의 폰카에도 잡히지 않을 만큼 사생활이 결백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광장에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촛불소녀’ 역시 고단할 것 같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고 있지만, 촛불소녀의 고단함은 얘가 너무나 단정해 보인다는 것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올 정도면 어리더라도 상당히 반골일 텐데 교복이고, 신발이고 뭐고 이 소녀에게서 껄렁한 구석은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다. 옷차림은 너무나 단정하고 머리 역시 귀밑 3cm를 결코 벗어날 것 같지 않다. 귀걸이나 서클렌즈도 했을 리 없고 물론 화장기도 없는 얼굴이다. 어떤 엄격한 학생주임이 오더라도 이 소녀에게서 흠을 잡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 촛불소녀가 이토록 단정하지 않았더라도 먹물들은 촛불소녀를 그토록 사랑했을까? 귀걸이를 몇 개씩 하고 코에 피어싱까지 하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요란한 옷차림의 촛불소녀였더라면 오히려 이쪽 편 흠 잡히기 딱 좋다 싶어 그냥 쟤는 집에 가 줬으면, 싶지 않았을까. 학교도 안 다니고 껄렁껄렁하고 담배 피우는 애들은 촛불소녀 자격이 있을까. 꼭 그 팸플릿의 그림처럼, 투명하고 단정해야만 소녀 자격이 있는 것일까. 아무도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걸 그룹을 마음껏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걸 그룹들이 대부분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다. 즉, 공식적으로 이들은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이 소녀들의 순결은 법을 통해 강력하게 수호된다. 그래서 암묵적 규약이 생기는 것이다. 누구의 것도 될 수 없기 때문에 모두의 것인 존재, 그래서 모두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 한때 이러한 소녀들의 일원이었던 이효리는 언제까지 그런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25세 이후 전략적으로 변신했다. <핑클>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노출을 감행하고, 꼭꼭 여미고 보여주지 않았던 속살을 죄다 풀었고 그로 인해 다른 멤버들과 달리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두 열망하되 함부로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한 차례 업그레이드한 이 전략은 아이비 역시 응용했다. 무대에서는 선정적인 자태로 의자춤을 추고 봉춤을 추고 섹스어필을 하든 뭘 하든, 무대를 내려오는 즉시 옷깃을 꼭꼭 여몄다. 그리고 마치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되뇌었다. 아버지가 너무나 엄하시다, 술 담배는 안 한다 왜냐하면 여성의 몸은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효리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종류의 방어막을 형성했는데, 이 방어막 때문에 그녀의 인기는 그토록 치솟을 수 있었지만 그 방어막이 사라지자 꼭대기의 톱스타에서 그토록 빨리 추락할 수도 있었다. 엄청난 추문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결혼한 다음에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도. 그 방어막은 이를테면 면허증 같은 거였다. 당신들은 나를 안심하고 사랑해도 좋다, 나는 보기에는 섹시하지만 섹스하자고 달려드는 그런 종류의 여자와는 다르다, 나는 고품격의 여성이다, 그러니 나를 안심하고 사랑하라, 는 메시지. 그 메시지가 깨어졌기 때문에 대중은 그토록 아이비에게 분노했고, 아직까지 그녀의 복귀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직 한창 때의 아가씨가 복잡한 연애 좀 한 것 가지고, 그러나 이게 현실이다.

우울하면서도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소녀’의 바로 다음 단계가 숙녀나 아가씨나 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아줌마‘라는 점이다. 쟁쟁한 이효리마저 지금은 요정 시절과 비교당하면서 놀림을 감수하고, 30대 미혼 여성 연예인은 버라이어티 쇼 등에서 늘 풋풋한 걸 스타들과 비교당하며 놀림의 대상이 된다. 중간지대는 결코 없다. 소녀들은 조금이라도 더 어렸을 때 뭔가 얻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서두르게 되고, 더 이상 소녀가 아닌 여자들은 ’아줌마‘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중간 지대는 점점 더 좁다 못해 사라져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녀에 대한 애호보다 빼어난 소녀들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것이 기묘한 롤리타 콤플렉스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도대체 보통 소녀들은 어디로 갔나, 두리번거리게 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