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그로트 파스칼(Grotte Pascal)_번역가. 이화여자대학교 조교수. 1965년생
불역 『둥둥 낙랑둥,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최인훈 작), 『오태석 희곡집』 등
어렸을 때 부친이 요절한 까닭에 일본사람인 외숙모가 하루아침에 모친 역할을 맡게 되자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친구들의 야릇한 반응과 더불어 극심한 문화 충돌을 경험했다. 세월이 흘러 대학에 입학하고 온몸을 내던지듯 일본학에 몰두했다. 그때 한국은 덩달아 딸려온 나라였다. 일본학을 공부하는 서양 학생의 눈으로 바라본 한반도는 전 분야에 걸쳐 자주 언급되고는 있었지만 당시 일본 지인들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는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이 유태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다를 바 없었다.
일본을 이해하려면 한국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호기심에 충동받았던 나는 복수 전공의 길을 선택해 목마름을 달랬다. 한국학, 일본학, 그리고 한일관계를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일본은 국제무대에 자리 잡은 지 오래된 반면에 (대부분의 프랑스사람에게) 한국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나라일 뿐이었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한국문화의 진정한 본질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래서 불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한국의 고전을 부활시킨 최인훈(「둥둥 낙랑 둥」,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과 한국의 정서를 피부로 느끼게 하는 오태석(「태」, 「부자유친」,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번역해 보았다.
그러다가 위대한 작가, 베스트셀러의 개념을 떠나, 숭실대학교 불문과의 옛 동료들 덕분에, 우연히 여류 작가 남상순의 작품을 읽어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이야말로 한국의 정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혼란스러운 근·현대사와 한국의 풍습, 향토문화를 한꺼번에 불어권 독자에게 소개할 수 있는 보석 같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흰 뱀을 찾아서」의 매력에 사로잡힌 나의 머릿속엔 어린 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작가 파뇰(Marcel Pagnol)의 남불(南佛) 이야기가 떠올랐다. 농암은 우리 오바뉴(Aubagne)와 닮았으며, 문경새재는 우리 알프 드 오트 프로방스(Alpes de Haute provence)와 비슷했고, 주인공 아이 종수는 어딘지 모르게 개구쟁이 리리 데 브롱(Lili des Belon)의 냄새를 풍겼으며 경경이는 복수심 많은 마농(Manon)이었다.
▲ 불역 『흰 뱀을 찾아서』
물론 이 작품을 꼭 불어권 독자에게 소개하려 마음먹고 번역에 임하자 시작부터 굿, 삼신 바가지, 하늘의 선물로 여긴 쌀, 백사(白蛇), 금기줄, 땡삐, ‘노란 샤쓰의 사나이’라는 유행가, 지도에 잘못 나온 한자(巃/籠)의 한글 표기 같은 것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 속의 주인공이 산에 올라가 헤매면서 바구니 모양의 무덤을 찾는 장면, 일본인에 대한 감정, ‘빨갱이’, 국군에 의한 산북의 학살 비밀, 새마을운동 등 번역하기 어려운 과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풀 이름이며 소박한 시골밥상, 사투리를 불어로 옮기는 일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 산골마을 생활을 소재로 한 남상순의 작품은 한국을 뛰어넘어 어느 문화권 사람에게나 다방면으로 읽힐 수 있는 소설이라는 확신이 그런 어려움을 잊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작품이 인간의 보편적 삶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어가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으나 불어 영역에 대한 책임을 혼자 치러야 했기 때문에 작가를 직접 만나 어려운 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고 불어에 능통한 심사위원이 일일이 세밀하게 대조해서 부족한 부분들을 정교하게 다듬는 수고를 해주었다. 반면에 한국어를 모르는 프랑스 출판사 편집장은 향토의 향을 살리기 위해 불어의 시제 중 접속법의 사용을 포기하자는 등의 제안을 해와 가독성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이 작품을 번역하며 한국어뿐만 아니라 모국어인 프랑스어와도 이중으로 싸워야 했던 수많은 시간들은 나에겐 최고의 훈련이자 값진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 불역 『흰 뱀을 찾아서』(Surlestracesduserpentblanc)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 출판 지원을 받아 프랑스 이마고(Imago)에서 2009년 6월에 출판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