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은어낚시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제비를 기르다』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미란』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등
나는 지금 두 달째 강원도에서 여름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하안거를 겸해 글쓰기에 전념하리라 작정하고 7월 1일 서울을 떠나온 것이다. 그동안 어찌나 바쁘게 살았던지, 처음 며칠 동안은 말 그대로 밥 먹고 잠만 잤다. 책이라도 읽자 하고 짐짓 눈을 부릅뜨고 책장을 펼치면 곧장 수수알처럼 잠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일단 잠부터 자두라는 뜻인가 싶어 낮이고 밤이고 몸을 되는대로 내버려두니 달콤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 보니 자는가 싶으면서도 반쯤은 깨어 있는 상태가 되풀이되는데 실은 그때가 가장 야릇한 시간대다. 이런저런 생각이 오락가락하면서 평소 듣지 못하던 소리가 귀에 들려오기도 하고 안 보이던 것들이 손님처럼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쏴아―하는 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온다. 필경 비가 쏟아지는 것이리라 싶어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드넓은 옥수수 밭에 바람이 불어가는 소리다. 옥수수 밭 위에는 무덤이 네 개 있는데 개망초 꽃이 자욱이 피어 있고 도둑고양이들이 때 없이 설쳐댄다. 옥수수는 아직 여물 때가 아니 돼 밭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저녁 어스름만 되면 누군가 옥수수 밭고랑을 휘젓고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환영이 날마다 꿈까지 이어져 수시로 수염을 늘어뜨린 옥수수 귀신이 창가를 기웃거리곤 한다.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며칠이 지나자 나는 그만 옥수수 귀신과 친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당신 누구요? 혹시 저 무덤에 사는 처녀 귀신이오, 아니면 정말 옥수수 귀신이오?” “수염 기른 처녀 봤소? 옥수수 밭에 은거하는 귀신 맞소.” “근데 왜 자꾸 내 방 창문은 기웃거리는 거요.” “당신이 심심하다고 불렀지 않소. 화투를 쳐 드릴까, 장기를 둬 드릴까.” “아직 여물지도 않은 주제에 화투는 칠 줄 아나 보오. 게다가 장기까지.” “나도 바쁜 몸이니 싫으면 그만 두오. 옥수수 밭둑에 앉아 길가에 지나다니는 처녀들이나 구경하려오.” “그럼 나도 데려가주오. 그게 그중 나을 것 같으니.” “선비네는 그만 일어나 책이나 보시오. 누에처럼 만날 잠만 자고 있으니 과연 무슨 뜻을 이루겠소.” 그러고는 푸른 수염을 휘날리며 휑하니 가버린다. 새벽에 잠이 깨 창문을 열어보니 이번에는 아닌 게 아니라 옥수수 밭에 하얗게 비가 쏟아지고 있다. 옥수수 귀신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밤새 비를 맞고 있으면 추울 텐데. 낮에 길가로 처녀들은 지나갔는가.
휴식기가 끝나고 이윽고 글쓰기를 시작하자 옥수수 귀신은 나타나지 않는다. 꿈에 불러도 좀처럼 오지 않는다. 낮이고 밤이고 나는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 옥수수 밭을 기웃거린다. 어느 날 마을을 산책하다 보니 벌거숭이 아이가 길에 나와 찐 옥수수를 먹고 있다 나를 보더니 집으로 도망간다. 잠시 후 할머니가 나와 내게 뜨끈한 옥수수를 건네준다. 그새 수확이 시작된 모양이다. 나는 심심풀이로 할머니한테 묻는다. “혹시 옥수수 귀신 못 봤어요? 요즘 통 보이지 않던데.” 그러자 할머니가 킬킬거리며 기세 좋게 되받는다. “내가 바로 그 귀신이라네. 태어날 때부터 줄곧 옥수수 밭에서 살았지. 내일도 모레도 와서 옥수수 받아가오.” 기대에 못 미치는 대답이어서 나는 퉁명스럽데 되묻는다. “다른 귀신은 없습니까?” “왜 없겠소. 사방 천지가 옥수수 밭인데. 시집 못 간 처녀 귀신, 아이 낳다 죽은 엄마 귀신, 눈 먼 귀신, 다리 한 짝 없는 귀신, 모가지 없는 귀신, 온갖 귀신들이 옥수수 밭에 득실거리고 있다오.” 듣고 있자니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지 생시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다. 할머니가 연신 킬킬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돌아서자, 눈앞에 온통 푸른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 왼쪽, 위아래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그야말로 사방 천지가 옥수수 밭이다. 나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홀연히 옥수수 밭으로 들어간다. 그래, 오늘은 옥수수 귀신을 만나서 밤새 화투나 치며 얘기하며 놀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