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실러의 『돈 카를로스』와 『오를레앙의 처녀』가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번역되어 나왔다. 『돈 카를로스』는 실러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그동안 국내에서 몇 차례 공연된 적은 있지만 정식 번역본이 없어 아쉬웠다. 괴테와 실러는 독일 고전주의 문학뿐만 아니라 독일문학 전체를 대표하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괴테의 작품은 대부분 우리말로 번역된 반면 실러의 작품은 그렇지 못하다. 괴테의 경우 전집까지 있으나 실러의 경우는 전집은커녕 아직 번역되지 않았거나 60-70년대에 번역되어 이미 절판된 작품들도 여럿 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발렌슈타인』은 절판되어 서점에서 구할 수 없다. 국내 독문학계에 괴테전문가는 많은 반면 실러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이가 드문 것도 이렇게 된 연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 대산세계문학총서 78권『돈 카를로스』
이러한 상황에서 그동안 번역되지 않았던 『돈 카를로스』가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나온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번역을 맡은 고 장상용 교수는 오랫동안 실러를 연구하여 『이비쿠스의 두루미』(실러의 담시), 『그리스의 신들』(실러의 사상시), 『쉴러-생애와 사상』 등을 번역 출판하고 『쉴러의 미학 예술론』을 펴낸 실러 전문가이다. 이번 번역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더 많은 실러 번역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 아쉽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실러 전문가의 번역답게 『돈 카를로스』와 『오를레앙의 처녀』 모두 원문의 뜻을 충분히 전달하면서 매끄럽게 읽힌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격정적 표현이 많고 사건이 급박하게 진행되며 미묘한 심리변화가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돈 카를로스』의 경우 유려하게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그 굴곡을 잘 표현해 내었다. 특히, 직역하였을 경우 어색한 우리말 표현이 될 수밖에 없는 문장들을 원문의 의미를 살리되 의역을 통해 자연스러운 표현이 되도록 한 점은 이 번역서가 지니는 커다란 장점이다.
역자가 우리말 표현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적합한 표현을 위해 오래 공을 들였음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Ich habe sehr viel Unglück mit meinen Müttern”(11쪽)이라는 문장을 직역하면 “나는 내 어머니들과는 참으로 많은 불운을 가졌어요”가 되는데 아무래도 어색하다. 이를 역자는 “나처럼 어머니 복 없는 사람도 없겠지요?”라고 의역함으로써 훨씬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이 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양날의 칼을 지니고 있다. 위의 예처럼 성공적인 경우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원문에서 지나치게 벗어나거나 원문의 뜻을 왜곡하는 경우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Sie spotten meiner”(12쪽)를 “농담이시겠지요?”로 옮긴 것은 조금 많이 나간 것이다. 다음 페이지에서 제대로 번역한 것처럼 “절 놀리시는군요”라고 원문에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았을 듯하다. 이밖에도 몇 군데에서 크고 작은 오역이 눈에 띈다. “Verwerfung(비난)”(199쪽)을 ‘체념’이라 번역한 것이나, “Ich schätze keinen Mann mehr”(208쪽)를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남자도 (당신보다 더) 높이 평가하지 않겠어요”라고 하지 않고 “나는 이제 남자라는 존재가 싫어졌습니다”라고 엉뚱하게 번역한 것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돈 카를로스』에 비해 『오를레앙의 처녀』가 가독성에서 조금 떨어지는 부분도 다듬을 필요가 있다. 장상용 교수 대신에 번역 원고를 마무리한 김상원 선생이 앞으로의 수정 작업을 계속해 나가면 좀 더 좋은 번역이 될 것이다.
알면 알수록 번역이란 참으로 힘든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끈하고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에 너무 치우치다 보면 원문에서 멀어지고, 원문에 너무 충실하다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직역투와 번역투 문장 투성이가 되어 읽기조차 힘들어진다. 번역이란 바로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작업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원문에 충실한 쪽으로 약간 기우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원문을 충실히 전달하되 그것을 매끄러운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좋은 전문번역가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 『돈 카를로스』는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78권으로 출판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