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리베라투르상 장려상 후보에 올랐는데 수상자가 된다면 받아들이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3월 중 독일에 와서 시상식에 참가하고 낭독회를 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책상 앞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무도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래 미룬 원고들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반나절 뒤, 나는 감사히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다. 한동안 글을 못 써서 ‘정말 내가 작가이기는 한건가’ 의심스럽던 참에 받은 수상 소식을, 내 의문에 대한 우회적인 응답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독자 앞에서 소설을 낭독하는 일에 대한 호기심도 일었다. 내 글이 실린 책을 받으면 내가 쓴 글과 마주칠세라 그 페이지는 황급히 건너뛰는 판에 독자 앞에서 내가 쓴 글을 읽다니. 겁나는 일이었고, 그러니만큼 오히려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 라이프치히, 그리고 같은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의 빈, 이렇게 네 군데에서 낭독회가 있을 예정이고, 시상식은 라이프치히에서 열린다고 했다.

도착한 다음날 저녁, 프랑크푸르트의 한국문화원에서 첫 낭독회를 했다. 리베라투르 장려상이 독일어로 번역되지 않은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서, 낭독회를 위해 소설의 일부가 우선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낭독에 들어가기 전, 사회자가 리베라투르 상과 선정된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고, 낭독회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청중에게 말해주었다. 난생 처음인 낭독회라서 조금 부담스럽던 마음이 풀린 것은, 낭독회장에 자유롭게 배치된 소파 덕분이었다. 뒤편엔 접이식 의자들이 놓여 있었지만, 낭독을 위한 테이블 앞쪽엔 청중을 위한 소파가 넉넉한 품새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앉은 청중들의 자연스러움에 나도 동화될 수 있었다.

낭독회는 지역에 따라 탄력있게 진행되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선 내가 한국어로 한 장 전체를 읽은 뒤에 독일인이 독일어로 번역된 다른 장을 읽었다. 한국 교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베를린에서는 한국어와 독일어를 다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해서 한 장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 한국어로 일부를 낭독하고 그 뒷부분을 번역자가 독일어로, 다시 그 뒷부분을 내가 한국어로 진행하는 식이었다. 라이프치히에선 청중이 거의 다 독일인이었으므로 한국어 낭독의 비중을 줄이고 독일어 낭독의 비중을 늘렸다.

낭독하는 동안 진지하면서도 편안하게 듣던 청중들은 낭독 뒤의 질의응답 시간엔 활기찼다. 장편 소설의 일부분만을 듣고 무슨 질문들을 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이런 식의 낭독에 익숙해선지 질문이 다양했다. 소설 속에 드러나는 한국의 전통(출산한 뒤에 탯줄을 사르는 장면이었다)이 인상 깊었는데 그런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작품 해설이며 낭독한 부분을 보아선 한국 가정에서 여성의 비중이 낮다고 느껴지는데 이게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인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피해자로 그렸다고 생각되는데 그러한가, 독일어 번역은 시적인데 원문도 그러한가, 하는 작품에 관한 질문이 있는가 하면 한국에서 여성 작가들의 활약은 어떠한가, 전업작가라고 들었는데 글쓰기만으로 생활이 가능한가, 자신을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생각하는가, 왜 작가가 되었는가 하는 작가 개인에 대한 관심사까지 다양했다. 서술격조사 ‘다’와 어미 ‘-다’가 일종의 운율처럼 느껴졌는지, ‘다’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낭독회를 거듭하면서 낭독에 탄력이 붙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첫번째 낭독회를 마치고 난 뒤, 독일에서 오래 살아서 낭독회에 참가한 적이 많다는 어느 교민에게서 “억양을 더 살리면 더 좋을 것 같다”라는 조언을 들은 것도 도움이 되었고, 추운 저녁, ‘멀고 낯선 나라 한국’이거나 ‘오래전 떠나온 모국’에서 온 작가의 서툰 낭독을 듣겠다고 그 자리를 찾은 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지루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용기를 북돋기도 했다. 좀더 리듬을 살리려 노력하다보니, 낭독하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대화체가 좀더 많은 부분을 번역했더라면 낭독이 더 재미있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대학 시절 잠깐 들었던 연극반에서도 연기보다는 분장을 맡고 싶어했던 내가 그런 마음이 된다는 게 스스로 신기했다. 낭독하는 도중, 소설 속에 사용된 한국 이름들이 독일인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생각이 미치는 순간 슬몃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러시아 소설을 한창 읽던 무렵, 그 길고 외우기 힘들던, 자주 헷갈리던 이름들. 돌림자를 사용한 한국소설 속의 이름들은 독일어권 사람들에게는 그 러시아 이름이나 마찬가지로 헷갈릴 터였다. 듣는 이의 입장에서 소설을 읽어가다 보니, ‘이 부분은 좀더 압축했으면 좋았겠구나’, ‘대화체가 너무 모자라니 이 부분을 대화체로 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간단없이 일었다.

시상식은 라이프치히 ‘책의 집’에서 열렸다. 라이프치히 도서전이 열리고 있어서 반나절 정도 도서전 전시장을 구경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을 거쳐 라이프치히로 동행하면서 “넌 독립적이구나. 어떤 나라에서 온 작가들은 낯선 도시에 혼자 있는 걸 불안해하던데……”라던 진행자 자파리 씨가 선물한 자유시간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리베라투르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였다. 은행원이나 교사, 주부 등의 직업을 가진 그들은 바쁜 시간 가운데 일부를 내어 나를 안내해주었다. 승용차를 이용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것도 내겐 반가운 일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좀더 많이 걸으며 둘레둘레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 유적지며 도서관을 안내해주는 틈틈이 안내 리플릿을 챙겨주고,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해주고,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되도록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의욕이 충만한 나머지 사적인 모임이 있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구역까지 용감하게 이끌고 가던 회원들. 낭독회 기간 중의 보험 문제에까지 신경을 쓴다거나,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공식일정을 마친 뒤의 내 개인적인 여행에 필요한 자료까지 챙겨주는 세심한 배려. 이러한 정성이 이들의 몸에 밴 습성인지 아니면 ‘머나먼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유럽행이 처음이라는, 영어가 서툰, 게다가 여성인’ 손님에 대한 특별한 접대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도 안내자의 인솔 하에 이름난 곳을 두루 섭렵하기보다는, 혼자 할랑할랑 돌아다니면서 사람 구경을 즐기는 나로선 겨끔내기 안내를 받으며 손님답게 처신하는 일에 은근히 몸이 뒤틀리기도 했다.

혼자가 되자마자 ‘초대받은 손님’의 점잖은 틀거지를 벗어버린 나는 전시장 곳곳을 구경했다. 구석에 퍼질러 앉아 카드놀이를 하는 젊은이들, 손바닥만한 크기의 책을 직접 실과 바늘로 제본해 자기의 책을 만드는 데 열중한 아이들, 한국에서 이미 한물간 DDR 기기 앞에서 서툰 스텝을 밟는 소녀들, 지루한 표정으로 부스를 지키다 관심을 보이는 손님에게 설명해주는 출판사 직원들…… 약속한 시각, 한국문학 번역 출판에 주력하는 펜드라곤 출판사 부스에 가니 리베라투르 장려상을 수상자가 한 시간 동안 머문다는 이벤트 안내문까지 붙여놓고 있었다.

시상식은 ‘책의 집’ 홀에 있는 카페에서 열렸다. 탁자 위에 프랑크푸르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던 토끼 모양 초콜릿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크고 작은 그 토끼 초콜릿은 시상식 진행자가 리베라투르 대상과 장려상을 청중에게 설명하는 소도구로 쓰였다. 큰 토끼는 대상, 아기 토끼는 장려상.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나는 이번 행사 내내 진행을 맡았던 자파리 씨에게 엽서를 썼다. 한국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게 각각 다른 꽃이었다, 라고. 지극히 정성스러우면서도 소박했던 마음들, 그 꽃들을 만나게 해준 리베라투르 재단, 이를 후원해 준 대산문화재단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