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문을 연다. 처마 아래 땅이 패여 있다. 가늘지만 아직도 내리는 비. 선잠을 일으켜 문 밖으로 나온다. 아, 세상은 저기 문밖에서 밤새 비를 맞고 있었구나. 당찬 노숙의 밤. 아직 꺼지지 않은 오렌지빛 가로등. 인간의 구조물도 잠들지 않고 밤새 노숙의 밤을 함께 밝혔으나, 그 어떤 자연이 저 빛을 필요로 했을까. 그저 의심 많은 인간의 불안을 지키며 자연의 잠을 방해한 가로등, 야간근무를 마치고 드디어 꺼진다.

딸과 두 해만, 딱 두 해만 살자고 내려 온 고향. 이른 아침 이 산촌의 고요가 내게 주는 느낌의 풍요. 새 소리, 물 소리, 바람 소리, 멀리 경운기 소리, 닭과 오리가 모이를 찾는 소리, 끙끙대는 강아지 소리, 그리고 아직 잠들어 있는 딸아이의 숨소리. 간혹, 마을 가까이 날아가는 헬리콥터. 퍽퍽 공기를 차내는 소리. 아무리 가까이 날아도 결코 만날 수 없는 무쇠. 날아가는 무쇠. 인간의 욕망이 띄워 올린 무쇠. 결코 나에게 내려앉지 않을 무쇠. 다시 한 번 도시를 떠나온 것을 느끼게 해주는 무쇠를 만나는 오늘 같은 아침.

텃밭으로 나간다. 나와 딸아이의 소변을 받아먹으며 자라는 채소들. 촉촉하게 젖어 있는 채소 위로 오줌을 눈다. 산 아래 걸린 구름, 이제 곧 비가 그칠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 것인가, 이 고요의 아침을. 그 고요 속에서 한 남자가 오줌을 누고 있는 모습을. 이것은 무척이나 평화롭고 한가로워 보이는 풍경일 수 있으나, 그 풍경 속은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른 아침 가는 비 맞으며 채마밭에 오줌을 누고 있는 저 남자의 마음속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딸아이의 상상력과 감성을 위해 시골에서 키우겠다는 생각 하나로 다니던 직장을 접고 들어 온 고향 가시막골. 아흔을 훌쩍 넘기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일흔을 향해 가시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에 작고 동그란 흙집 하나를 지어 딸아이 다온이와 내가 살고, 올해 춘천교대에 편입학한 아내와 둘째 세온이는 학교 앞 월세방에서 산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춘천으로 이사를 하던 날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던 다온이가 이렇게 물었다. “엄마 아빠,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돼?”

다온이를 위해 흙집을 짓고 솟대를 만들고 텃밭을 가꾸는 일. 아이의 반찬과 빨래를 하는 일. 저녁이 되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 그리고 아이를 재우는 일. 하루를 모두 잡아먹은 일과가 끝나고 아이가 코를 골기 시작하면 그제야 나는 밥벌이를 위해 글을 쓴다. 산문집 원고와 많지 않은 청탁원고.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내게 시를 써달라는 청탁이 끊어졌다. 대신 에세이를 써 달라는 청탁이 간혹 들어온다. 시인에게 시 대신 에세이 청탁이 전부니, 나는 과연 시인인가. 직장 없이 사는 나로서는 생계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시보다 에세이가 낫다. 에세이 원고료도 박하여 생계가 되지 않기는 매 한가지지만.

이런 사정을 아는 장관인지 얼마 전 문화관광부에서 기초예술 진흥책을 내 놓았다는 소식을 라디오로 들었다. 잠결이었지 싶다. 시 한편에 나랏돈 30만원인가를 준다는 라디오 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했다. 지금은 문예지에 시를 발표해도 원고료를 주는 곳은 무척 드물다. 그나마 신인들에게는 발표 지면조차 인색하기 짝이 없다.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원고료는 뒷전이고 발표를 하게 된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지경이 믿기 힘든 현실이다.

하여 쥐꼬리 같은 원고료를 현실감 있게 하려고 나라에서 돈을 보태준다는 기쁜 소식은 한편 은근히 마음을 무겁게 한다. 모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선정된 십여 개 특정 잡지에 발표된 작품에만 준다니, 앞으로 지원을 받게 될 메이저급 잡지 주변에는 더욱 강해진 자성에 이끌린 쇳가루들이 새까맣게 모여들 것이 아닌가. 그러니 시골에 박혀 보이지도 않는 나 같은 시답잖은 시인은 낄 틈이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지나친 걱정이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과연 나 같은 변방의 시인도 그 꿈의 원고료를 한 번쯤은 받아볼 수 있을까. 꿈이 아닌 현실이 도리어 꿈처럼 멀게 느껴지는 아침. 오줌을 털고 바지를 여미고 숨을 길게 내쉰다. 그래, 지금 내게는 30만원짜리 원고료 보다 작은 텃밭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저 야채들이 더욱 가깝고 손에 쥘 수 있는 싱그러운 현실이 아닌가. 친구가 오면 삼겹살을 싸먹기 위해 심어 둔 저 싱싱하고 푸른 상추들이 그래서 내겐 더욱 눈부신 현실이 아닌가. 방으로 돌아오는 나의 배경에서 자연은 봄의 초록으로 가득하다.